노동 이후 사회를 사유할 때 가장 먼저 제기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노동이 인간 존재의 본질인지 아니면 인간 삶을 유지하고 구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인지에 관한 물음이다. 이 질문은 단순히 경제학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인간의 존엄과 자기실현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다. 근대 사회는 오랫동안 노동을 인간의 중심 활동으로 간주해 왔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노동을 통해 생존하며, 노동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이해되었다. 그러나 AI와 자동화가 인간 노동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전제는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제 문제는 단지 “어떤 일자리가 사라지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노동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충만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노동을 인간 존재의 본질에 가깝게 이해한 대표적 전통 가운데 하나는 마르크스에게서 발견된다.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인간을 단순히 생존을 유지하는 동물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세계를 형성하고 자신의 삶을 대상화하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그에게 노동은 단지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외화하고 세계 속에 자신을 실현하는 방식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외된 노동은 단순한 경제적 손실이 아니라 인간성의 훼손이 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은 자유롭고 의식적인 생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종적 존재(species-being)”를 드러내는 존재이며, 노동은 원래 인간의 자기실현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¹ 이런 의미에서 노동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표현에 가깝다.
(Karl Marx, “Estranged Labour,” in Economic and Philosophic Manuscripts of 1844, accessed March 17, 2026, Marxists Internet Archive.)
그러나 마르크스의 통찰은 동시에 중요한 긴장을 내포한다. 그가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은 임금노동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고 자신을 실현하는 자유로운 활동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노동, 곧 시장과 조직, 생계 압박 속에서 수행되는 다수의 노동 형태를 그대로 인간 본질과 동일시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오히려 축소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이 타자적 힘에 예속된 노동 형태였다. 그러므로 그의 논의는 “노동은 인간의 본질이다”라는 단순 명제보다는, “인간은 자기실현적 활동을 필요로 하며, 노동은 그 한 형식일 수 있다”는 방향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한나 아렌트는 이 문제를 더 섬세하게 분해한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하였다. 스탠퍼드 철학백과에 따르면, 아렌트에게 노동은 생명 유지와 관련된 순환적 활동이고, 작업은 보다 지속적인 인공 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며, 행위는 다원적 인간들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정치적 활동이다.²
(Hannah Arendt entr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ee also “Acti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인간 삶 전체를 노동 하나로 환원하는 근대적 습관이 비판되기 때문이다. 아렌트에게 노동은 인간 삶에 필수적이지만, 인간 존재 전체를 대표하는 가장 높은 활동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다움은 세계를 만들고 타자와 더불어 말하고 행동하는 차원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노동은 인간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 삶을 떠받치는 한 차원이며, 인간은 노동을 넘어 작업과 행위를 통해 더 충만하게 자신을 실현한다.
이러한 구분은 노동 이후 사회를 논의할 때 특히 중요하다. 근대 산업사회는 노동을 인간 삶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인간의 가치 역시 생산성과 유용성에 따라 평가하는 경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아렌트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단지 생계를 위해 반복적으로 노동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세계를 형성하는 존재이며, 공적 공간에서 타자와 관계 맺고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따라서 노동이 축소되거나 그 필요성이 약화된다고 해서 인간 존재의 의미가 곧바로 붕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노동 이후의 여백을 어떤 활동이 채우는가에 있다. 만일 그 여백이 소비와 오락만으로 채워진다면 인간은 공허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사유, 창조, 관계, 공동의 행위로 이어진다면 노동의 약화는 오히려 인간 회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철학적 전통은 오래전부터 인간 삶의 최고선을 반드시 노동에 두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유용한 일을 많이 하는 삶이 아니라, 인간다운 번영, 곧 탁월성과 숙고를 포함하는 삶이었다. 스탠퍼드 철학백과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좋은 삶이 단순한 수단적 성취가 아니라,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활동과 덕의 실현을 포함한다고 정리한다. 또한 같은 계열의 논의에서 여가 혹은 자유 시간(scholê)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활동이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는 삶의 방식으로 이해된다.³
(“Aristotle’s Ethic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ristotle’s Aesthetic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이 전통에서 노동은 삶에 필요한 것이지만, 인간 존재의 궁극 목적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여러 활동 가운데 노동을 수행하는 존재이다.
이 지점에서 “노동은 본질인가, 수단인가”라는 질문은 이분법적으로만 답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편으로 인간은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경험하기 어렵다. 인간은 세계를 변형하고, 의미를 만들고, 자신을 표현하는 활동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노동은 넓은 의미의 인간 활동성의 중요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특정한 역사적 노동 형태, 곧 임금노동이나 성과 중심 노동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치다.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이지만, 노동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관계 맺고, 사유하고, 창조하고, 사랑하고, 예배하고, 노는 존재이기도 하다. 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노동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고, 노동을 인간 존재 전체와 동일시하는 환원을 경계하는 데 있다.
따라서 노동 이후 사회가 던지는 질문은 사실상 더 깊은 인간학적 질문이다. 만일 인간의 존엄이 오직 노동 생산성에 의해 증명된다면, 자동화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무가치한 존재로 밀려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가 노동 성과 이전의 어떤 근거, 곧 인간 자체의 존엄, 관계적 존재성, 자유로운 활동 가능성에 놓여 있다면, 노동의 축소는 곧 인간의 축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경우 노동은 인간의 본질 그 자체라기보다,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형성하는 여러 실천 가운데 하나로 재배치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이후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 소명, 안식의 개념과도 깊이 연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 전통 역시 인간의 가치를 노동 성과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찾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은 인간 존재의 본질인가, 수단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이 잠정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노동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활동성의 한 표현이지만, 역사적으로 주어진 특정한 노동 체제가 곧 인간 존재의 본질은 아니다. 인간은 활동하는 존재이며, 세계를 돌보고 형성하며 타자와 관계 맺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활동은 노동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 이후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노동의 완전한 폐기가 아니라, 노동을 인간 존재 전체 속에서 다시 위치시키는 일이다. 바로 여기서 철학적 질문은 신학적 질문으로 넘어간다. 인간은 단지 일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일 너머의 의미와 목적을 향해 부름받은 존재인가. 이 물음이야말로 이후 논의를 이끄는 핵심 질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