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이후 사회에 대한 상상에서 가장 강하게 떠오르는 감정 가운데 하나는 단순한 실업의 두려움이 아니라, “나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위기의식이다. 이 위기의식은 경제적 불안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 핵심은 생계 문제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사회적 유용성, 생산성, 기능 수행 능력과 강하게 결부시켜 온 근대적 조건에서 비롯된다. 노동 중심 사회에서 사람은 일함으로써 자신이 공동체에 기여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그 기여를 통해 인정과 자존감을 획득해 왔다. 그러므로 기술이 인간 노동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상황은 단지 “일자리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던 상징 질서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을 뜻한다. 이 때문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공포는 경제적 범주를 넘어 존재론적 위기의 성격을 띤다.
이러한 불안은 이미 현대 사회 비판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포착되어 왔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Wasted Lives』에서 현대성은 질서와 효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잉여’ 혹은 ‘폐기된’ 사람들을 생산한다고 진단한다. 출판사 소개와 관련 해설들이 요약하듯, 바우만에게 현대 사회의 문제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회가 일정한 사람들을 “superfluous populations”, 곧 잉여적이고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하게 되는 구조 그 자체에 있다. 그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현대 사회의 정치와 문화, 배제의 방식들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로 본다.¹
(Zygmunt Bauman, Wasted Lives: Modernity and Its Outcasts (Cambridge: Polity, 2004).)
여기서 중요한 점은 쓸모없음이 개인의 주관적 열등감이 아니라, 사회적 분류와 제도적 배제 속에서 생산되는 객관적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먼저 존재론적으로 무가치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특정한 기준에 따라 일부 사람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AI와 자동화의 시대는 바로 이러한 바우만적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증폭시킨다. 기술이 반복 노동뿐 아니라 인지적 과업까지 빠르게 흡수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에는 숙련과 전문성을 통해 사회적 자리를 보장받던 사람들까지도 자신의 필요성이 감소할 수 있다는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위기의 핵심은 단순한 경쟁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기계가 나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다면, 나는 왜 필요한가”라는 물음이 인간 존재의 깊은 층위까지 파고든다는 데 있다. 그래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위기의식은 단지 저숙련 노동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성과 성과 중심 사회를 내면화한 모든 사람에게 확장될 수 있는 불안이며, AI 시대에는 그 보편성이 더욱 커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쓸모없음’은 사회적 낙오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가치의 기준이 외부 기능으로 환원될 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실존적 위기가 된다.
이 문제는 단지 사회학적 진단에 머물지 않고, 인간 존엄 개념 자체를 다시 묻게 만든다. 스탠퍼드 철학백과는 인간 존엄을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지니는 기본적 가치 혹은 지위로 설명하며, 이것이 도덕적 존중과 권리의 근거가 된다고 정리한다.²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가치는 기능, 생산성, 시장 성과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사회는 종종 존엄을 선언적으로는 보편적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 인정의 질서는 여전히 유용성과 성과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이때 인간은 법적·도덕적 차원에서는 존엄한 존재로 불리지만, 사회적 경험 차원에서는 끊임없이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바로 이 간극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위기의식을 심화시킨다. 인간은 추상적으로는 존엄하지만, 일상에서는 성과가 없으면 잉여처럼 느껴지는 이중 구조 안에 놓이는 것이다.
따라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위기의식은 사실상 존엄을 무엇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만일 존엄이 인간의 생산 기여도에 달려 있다면, 자동화 시대는 대규모 존엄의 위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존엄이 인간 존재 그 자체의 가치에 근거한다면, 노동의 축소는 인간 가치의 축소와 동일시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바로 후자의 원리가 사회제도와 문화적 상상력 안에서 충분히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존엄의 철학은 인간이 누구이기에 존중받아야 하는지를 말하지만, 노동 중심 사회의 문화는 인간이 무엇을 하기에 인정받는지를 더 크게 강조해 왔다. 그러므로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재분배 정책만이 아니라, 인간 가치의 기준을 성과 중심에서 존재 중심으로 옮기는 문화적·윤리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능력접근(capability approach)은 중요한 보완 시각을 제공한다. 스탠퍼드 철학백과에 따르면 능력접근은 인간의 복지와 정의를, 단지 소득이나 효율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라는 능력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³ 이 접근은 특히 ‘쓸모’의 문제를 재정의하는 데 유익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가 어떤 사람을 당장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실질적 자유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느냐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사람을 “쓸모없는 존재”로 보는 것은 정의의 기준 자체를 왜곡하는 일이다. 인간은 단지 경제 기계의 톱니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형성하고 관계를 맺고 의미를 실현할 수 있는 존재이며, 정의로운 사회는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보장하는 사회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모없는 인간’의 공포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단지 추상적 권리의 보유자일 뿐 아니라 인정받기를 원하는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존중과 자존감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자기존중이 개인적·사회적·도덕적으로 모두 중요하다고 강조한다.³
(Ingrid Robeyns, “The Capability Approach,”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22; Robin S. Dillon, “Respect,”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20.)
사람은 단순히 생존만 보장된다고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공동체 안에서 자리를 가지며,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따라서 노동 이후 사회의 위기는 단지 소득의 문제가 아니라 인정의 문제이다. 자동화가 생산을 충분히 떠받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자신이 쓸모 있고 존중받는다는 감각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사회는 깊은 허무와 분노, 상실감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위기의식은 경제 시스템의 주변 문제가 아니라, 사회 통합과 인간 정신의 중심 문제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쓸모”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실제로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세계를 돌보고, 공동체를 세우는 활동을 통해 살아간다. 문제는 그 쓸모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곧 시장 생산성과 경쟁력의 언어로만 정의하는 데 있다. 바우만이 비판했듯이 현대 사회는 효율과 질서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잉여로 분류할 수 있고,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을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처리되어야 할 잔여물처럼 경험하게 된다.¹ 그러나 인간의 쓸모는 생산성과 동일하지 않다. 돌봄, 우정, 양육, 위로, 사유, 예술, 예배, 공동체적 헌신처럼 시장에서 즉시 가격화되지 않는 활동들도 인간 세계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유익이다. 따라서 노동 이후 사회가 요청하는 것은 “인간은 쓸모없다”는 결론이 아니라, “인간의 쓸모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재구성이다.
결국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위기의식은 기술 변화 자체보다, 인간 가치를 오직 기능과 성과에 묶어 온 사회적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노동이 약화될 때 공포가 커지는 이유는 인간이 본래 무가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존엄을 지탱해야 할 문화적·도덕적 언어가 충분히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 이후 사회의 과제는 단순히 일자리를 더 보전하는 데만 있지 않다. 그보다 더 깊은 과제는 인간이 노동 성과 이전에 이미 존엄한 존재이며, 시장 생산성 바깥에서도 의미와 관계와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회복하는 데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논의로 이어질 “놀이하는 인간의 가능성”은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다. 인간은 쓸모를 잃으면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유용성의 논리를 넘어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존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