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2장과 9장
성경이 말하는 노동의 의미를 해명하려면 창세기 1–2장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러나 그 읽기는 창세기 9장까지 함께 보아야 비로소 충분해진다. 그 이유는 창세기 1–2장이 인간 노동의 원형을 제시하고, 창세기 9장은 홍수 이후의 세계 속에서 그 원형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절의 핵심 과제는 두 본문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읽는 데 있다. 곧 창세기 1–2장에서 노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세계를 다스리고 경작하며 지키는 사명으로 주어지지만, 창세기 9장에서는 그 사명이 폭력 이후의 세계 안에서 생명 보존과 관계 책임의 윤리 아래 다시 배치된다. 이 점에서 노동은 단순한 생산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질서를 세우고 생명을 보존하는 언약적 책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윤형은 창세기 원역사 전체를 노동과 주권의 관점에서 읽으면서,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단순한 상하지배가 아니라 상호의존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형, 「창세기 원역사에 나타난 노동과 주권(창 1–11장)」, 『구약논단』 17권 3호 (2011).)
임희묵 역시 창세기 1장과 9장의 비교를 통해, 구원의 방향이 창조질서의 회복과 생명 참여에 있음을 강조한다.
(임희묵, 「창조질서 회복으로서의 구원과 비움과 생명참여의 생태영성」, 『신학연구』 (2024).)
먼저 창세기 1장은 인간의 노동과 사명을 하나님의 형상과 직접 연결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명하신다. 여기서 사용된 kābaš와 rādâ는 결코 약한 표현이 아니다. 관련 학술 정리 자료는 이 두 용어가 창세기 1:26–28에서 지배와 정복의 함의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음을 보여 주며, Michael Stead는 특히 이 표현들을 왕적이고 강한 통치 어휘로 읽어야 한다고 논증한다.
(Michael R. Stead, “To ‘Rule Over’ and ‘Subdue’ the Creation in Genesis 1,” PDF essay.)
동시에 그는 이 통치가 임의적 폭력이나 착취의 허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는 대리적 통치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노동은 소극적 관리가 아니라 실제적 주도권을 가진 통치 사명이지만, 그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틀 안에서 규정된다. 곧 인간은 절대 주권자가 아니라 위임받은 통치자이다.
이 지점에서 창세기 1장의 노동은 단순한 생계 노동이 아니라 왕적 사명으로 이해된다. 인간은 세상 속에 놓인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역사 속에서 펼쳐 가도록 위임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이 왕적 사명은 곧바로 무제한적 소유권이나 파괴적 지배로 읽혀서는 안 된다. 윤형의 분석은 창세기 원역사에서 노동과 그 대상의 관계를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니라 상호의존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지배 언어를 무디게 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 지배의 성격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걸맞게 재규정하려는 시도이다. 즉 인간의 통치는 생명을 억압하는 폭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질서를 피조세계 안에 구현하는 책임 있는 주도성이다. 이 점에서 창세기 1장의 노동은 강한 통치의 어휘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창조의 선함을 보존해야 하는 사명으로 묶여 있다.
창세기 2장에 이르면 이 사명은 보다 구체적인 노동의 언어로 재진술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신다(창 2:15). 여기서 ‘abad와 shamar는 단순히 농업 노동을 뜻하는 수준을 넘어, 섬김과 보호의 의미를 함께 지닌다. 김재구는 창세기 2:15의 이 두 동사가 오경에서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성막과 제사장 직무를 설명할 때와 연결된다고 지적하면서, 에덴동산을 성전 모형으로, 아담의 일을 제사장적 직무로 해석할 수 있다고 논한다.
(김재구, 「아담과 노아의 실패 그리고 아브라함의 성공」, 『구약논단』 15권 1호 (2009).)
그의 논문은 Wenham의 “Sanctuary Symbolism in the Garden of Eden Story”를 인용하며, 에덴이 단순한 낙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공간이라는 해석 전통을 한국 학계 안에서 정리한다. Richard Davidson도 에덴을 원초적 성소로 읽는 해석이 학계에서 점차 강한 합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하며, 창세기 2:15의 ‘abad와 shamar를 성소 봉사와 연결한다. 따라서 창세기 2장의 노동은 창세기 1장의 왕적 사명을 구체적이고 제사장적인 언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맡기신 공간을 섬기고 지키는 존재이다.
이렇게 보면 창세기 1장과 2장은 노동의 원형을 두 겹으로 제시한다. 창세기 1장은 인간의 노동을 형상에 근거한 왕적 통치로 보여 주고, 창세기 2장은 그 통치를 경작과 보호의 제사장적 책임으로 구체화한다. 다시 말해 성경의 첫 노동 이해는 “지배냐 섬김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섬기는 방식으로 다스리고, 지키는 방식으로 주도하는 사명이다. 이 점에서 노동은 단순한 생산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세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이다. 창세기 1–2장의 노동은 타락 이전부터 주어진 선한 소명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 서 있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보여 주는 본문이다. 윤형이 말하는 “노동과 인간됨의 비분리성”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처음부터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였고, 그 노동은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의 이 원형은 창세기 6–9장의 폭력 서사를 지나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창세기 6장은 땅이 포악함으로 가득 찼다고 말하고, 홍수는 단지 자연 재난이 아니라 폭력으로 무너진 창조 질서에 대한 심판으로 제시된다. 이런 맥락에서 창세기 9장은 창세기 1장의 창조 복을 단순 반복하는 본문이 아니라, 폭력 이후의 세계를 위한 재질서화 본문으로 읽혀야 한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신다(창 9:1, 7). 즉 창조의 복은 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 있던 “정복하라”와 “다스리라”는 표현은 여기서 직접 반복되지 않는다. 그 대신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이 너희 손에 붙였음이니라”(창 9:2)는 말씀이 주어진다. Pei Tsai의 연구는 이 “fear and dread”와 “into your hand”라는 표현이 전쟁 언어와 닿아 있으며,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홍수 이전과 다른 긴장 속으로 들어갔음을 보여 준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창세기 9장은 창세기 1장의 지배 명령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고, 폭력 이후의 세계에 맞게 제한되고 경계된 위탁의 언어로 바꾸어 놓는다.
(Pei Tsai, “The Importance of the Noahic Covenant and Its Function …” PDF dissertation/study (2015).)
이 변화는 노아 언약의 범위에서도 확인된다. Robert Gnuse는 창세기 9장의 언약이 노아와 인류만 아니라 동물들과도 함께 맺어진 언약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Robert Gnuse, “The Covenant with Noah in Genesis 9,” Biblical Theology Bulletin 52, no. 1 (2022).)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홍수 이후의 질서가 인간만을 위한 질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질서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창세기 9장은 인간의 중심성을 지우지 않지만, 그 중심성을 절대적 지배권이 아니라 생명 공동체 안의 책임적 위치로 재배치한다. 임희묵도 창세기 1장과 9장의 수사비평을 통해, 전자가 창조의 선함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그 선함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관계성과 다른 생명 존중의 가치를 더 부각한다고 말한다. 이 분석은 창세기 9장이 창세기 1장의 사명을 축소한다기보다, 폭력 이후의 세계에서 그것을 생명 보존의 윤리로 조정한다고 이해하게 한다.
이 재구성은 무엇보다 창세기 9:6에서 분명해진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더 이상 창세기 1장처럼 직접적으로 통치 명령의 근거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을 규정하는 근거로 호출된다. Jozef Jančovič는 이 본문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창세기 9:6의 imago Dei가 단순히 추상적 인간 존엄 진술이 아니라 피 흘림을 규제하는 법적·윤리적 문맥 속에 놓여 있다고 논한다.
(Jozef Jančovič, “Blood Revenge in Light of the Imago Dei in Genesis 9:6,” The Biblical Annals 10, no. 2 (2020))
Stephen Wilson 역시 홍수 이야기의 폭력 문맥에서 창세기 9:6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형상 개념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무기라기보다 최소한 피의 복수와 생명 침해를 규율하는 경계선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두 학자의 결론은 세부 해석에서 차이가 있어도, 창세기 9장의 형상이 창세기 1장의 형상과는 다른 기능적 자리에 놓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즉 형상은 이제 지배의 근거보다 먼저 생명 보호의 근거가 된다.
바로 이 점이 이 절의 핵심 논지이다. 창세기 1장의 형상은 분명 강한 통치와 맞물려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세계를 향한 왕적 사명을 받는다. 그러나 창세기 9장의 형상은 폭력을 멈추고 생명의 존엄을 지키는 기초로 재위치된다. 이것은 앞선 형상 이해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파괴된 세계 안에서 그 의미를 더 엄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곧 형상은 처음에는 “세계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고, 홍수 이후에는 “타자의 생명을 어디까지 침해할 수 없는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임희묵의 표현을 빌리면, 창세기 1장과 9장은 각각 창조의 선함과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관계성·타 생명 존중의 가치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창세기 9장은 창세기 1장의 강한 지배 언어를 무효화한다기보다, 그것을 생명 보존의 윤리로 정제하고 제한한다.
이렇게 읽을 때 노동 신학의 방향도 분명해진다. 창세기 1–2장에서 노동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세계를 다스리고 경작하며 지키는 왕적-제사장적 사명이다. 그러나 창세기 9장을 지나면서 그 사명은 더 이상 무제한적 확장과 정복의 논리로만 이해될 수 없게 된다. 노동은 이제 폭력 이후의 세계 안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관계를 유지하며 타자의 존엄을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경적 노동은 본래부터 생산과 통치의 요소를 가지지만, 동시에 그 통치가 반드시 보호와 보존, 경계와 책임의 윤리 아래 있어야 함을 가르친다. 노동은 하나님처럼 마음대로 지배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다루는 행위이다. 윤형의 상호의존 해석과 김재구의 제사장적 읽기, 그리고 Gnuse와 Jančovič의 노아 언약 해석을 종합하면, 창세기 1–2장과 9장이 보여 주는 노동은 “강한 통치”와 “생명 보존적 제한”을 함께 품는다고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이 결론 지을 수 있다.
첫째, 창세기 1–2장은 노동을 타락 이전의 창조 질서 속에 놓인 인간의 본래 소명으로 제시한다.
둘째, 그 노동은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왕적 통치와, 에덴을 경작하고 지키는 제사장적 책임을 함께 포함한다.
셋째, 창세기 9장은 홍수와 폭력 이후 동일한 창조 복을 유지하면서도 정복·지배의 직접 명령을 반복하지 않고, 두려움·위탁·피 흘림 금지·모든 생물과의 언약을 통해 그 사명을 재구성한다.
넷째,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은 창세기 1장에서 책임 있는 통치의 근거로, 창세기 9장에서는 생명 존엄 보호의 근거로 기능한다.
다섯째, 그러므로 성경적 노동은 단지 생산과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세계 안에서 질서를 세우고 생명을 보존하는 언약적 소명이다.
이 점에서 창세기 1–2장과 9장은 노동의 원형과 그 윤리적 한계를 함께 제시하는 본문이며, 이후 창세기 3장의 타락과 출애굽기의 안식일 계명을 해석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