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이 노동의 원형을 보여 준다면, 창세기 3장은 그 원형이 죄로 인해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보여 주는 본문이다. 이 점에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성경이 노동의 기원을 타락 이후로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창세기 2장 15절에서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타락의 결과는 노동의 발생이 아니라 노동의 변형이다. 다시 말해 창세기 3장은 노동 자체를 폐기하지 않고, 노동이 더 이상 기쁨과 질서의 자리로만 경험되지 않고 수고와 저항, 좌절과 죽음의 지평 안에서 수행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타락은 노동의 본질을 제거하기보다, 그 조건과 경험을 뒤틀어 놓는 사건이라고 이해해야 한다.¹
(윤형, 「구약성서 관점에서 고찰한 노동의 가치와 인식에 대한 연구」, 『구약논단』 24권 3호 (2018).)
창세기 3장의 흐름은 인간의 불순종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불순종은 단순한 규칙 위반으로 축소될 수 없다. 인간은 뱀의 유혹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앞세우고, 피조물의 한계를 받아들이기보다 하나님처럼 선과 악의 기준을 쥐려 한다. 이 사건은 인간 존재의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이동하는 전환점이다. 따라서 타락은 단지 개인적 도덕 실패가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의 방향 전환이며, 그 결과 노동 역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세계를 돌보는 행위에서 자기보존과 자기정당화의 불안 속에서 수행되는 행위로 변질된다.²
(양재희, 「창세기 3장 내러티브 연구: 14–19절의 히브리 시 분석을 중심으로」, 학술논문(2019).)
이 점은 하나님의 선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여기서 문법적으로 주목할 점은 직접 저주를 받는 대상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땅이라는 사실이다. 최근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논문은 창세기 2–3장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많은 학자들이 이 본문에서 인간보다 뱀과 땅이 직접 저주의 대상이라고 읽어 왔으며, 본문의 언어도 최소한 그 차이를 분명히 보여 준다고 정리한다. 비슷하게 J. Å. Sigvartsen도 창세기 3장의 저주 공식이 사람이 아니라 뱀과 땅에 적용된다고 지적한다. 국내에서는 윤형이 이 문제를 더 정교하게 다루면서, 여기서 저주받는 것은 일반적 의미의 “땅”보다 아담의 근원이며 노동의 대상인 “경작지”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는 저주가 “원래의 일 자체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노동영역에 임한다”고 정리한다.³
(T. J. Patty, “Did God Curse Humanity? A Pragmatic Reexamination of Genesis 2–3,”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2025); J. Å. Sigvartsen, 관련 창세기 질서 논의; 윤형, 앞의 글.)
이 사실은 노동 신학적으로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일하는 것” 자체를 형벌로 선언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주를 받은 것은 인간이 일해야 하는 현실의 장, 곧 땅이며, 그 결과 인간의 노동은 저항하는 세계와 씨름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윤형은 창세기 3:17을 노동의 부정적 기원이 아니라 “노동에 수반되는 어려움에 대한 원인론적 성격”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Richard Davidson 역시 창세기 1–3장 연구에서 인간이 에덴의 사명을 유지한 채 타락 이후에는 그 사명을 왜곡된 조건 속에서 수행하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타락은 노동을 무효화하지 않고, 노동의 선한 본질을 고통스럽고 불완전한 조건 속으로 밀어 넣는다.⁴
(윤형, 앞의 글; Richard M. Davidson, 창세기 1–3장 관련 연구)
창세기 3장 17–19절은 이 왜곡의 내용을 세 겹으로 보여 준다.
첫째, 노동은 이제 수고와 고통의 경험이 된다.
둘째, 노동은 저항하는 자연과의 싸움이 된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땅이 더 이상 인간의 돌봄에 조화롭게 응답하지 않는다는 상징이다.
셋째, 노동은 죽음의 지평 속에 놓인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라는 말은 노동이 이제 유한성과 분리될 수 없음을 드러낸다. Mark Saucy는 성경 전체의 일 신학을 종말론적 틀 안에서 논하면서, 타락 이후의 노동은 여전히 소명을 반영하지만 허무와 마찰과 유한성의 조건 아래 놓인다고 설명한다.⁵
(Mark Saucy, “Storied Work: The Eschatology Turn and the Meaning of Our Work,”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60, no. 1 (2017); 윤형, 앞의 글)
이처럼 창세기 3장의 핵심은 노동의 폐지가 아니라 노동의 저주받은 환경화에 있다. 인간은 여전히 먹어야 하고, 여전히 땅과 관계해야 하며, 여전히 일한다. 그러나 이제 노동은 더 이상 에덴의 조화 속에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관계 속에서 수행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긴장 속에 놓였으며, 인간과 땅의 관계 또한 적대와 마찰의 구조로 변한다. R. Ouro는 창세기 1장과 3장의 언어적·주제적 연결을 분석하면서, 창조 기사에서 “좋다”라고 선언된 땅이 타락 이후 “저주받은” 땅으로 전환되는 것은 단순한 분위기 변화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관계 자체가 변질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따라서 타락은 선한 것을 제거하기보다 선한 것을 뒤틀고 부패시키는 사건이며, 노동도 정확히 그런 방식으로 왜곡된다.⁶
(R. Ouro, The Garden of Eden Account: The Chiastic Structure of Genesis 2-3 (2016))
이 왜곡은 단지 외적 조건에만 머물지 않는다. 창세기 3장의 죄는 인간의 마음을 바꾸고, 그 결과 노동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 또한 변질시킨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피조세계를 돌보기 위해 일하기보다,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일하게 된다. 윤형은 창세기 원역사를 따라가며 노동이 단지 직업의 분화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점차 인간 상호 간의 지배권 문제와 연결된다고 지적한다. 이런 통찰은 창세기 3장의 타락이 노동을 단지 힘들게 만든 것이 아니라, 노동을 지배와 자기확장의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출발점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⁷
(윤형, 「창세기 원역사에 나타난 노동과 주권(창 1–11장)」, 『구약논단』 17권 3호 (2011).)
이 점은 앞 절에서 살핀 창세기 9장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창세기 9장이 홍수 이후의 세계에서 노동과 통치를 생명 보존과 폭력 억제의 윤리 아래 재배치했다면, 창세기 3장은 왜 그러한 재배치가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근원적 본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통치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통치는 더 이상 순전하고 안전한 통치가 아니다. 죄는 통치를 지배욕으로 바꾸고, 노동을 돌봄이 아니라 착취로 변질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 노동 이해는 창세기 1–2장의 창조 질서만이 아니라, 창세기 3장의 타락 현실과 창세기 9장의 생명 보존 윤리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또한 창세기 3장은 노동의 왜곡을 단순히 경제적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노동의 수고는 단지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일에서 만족과 의미를 온전히 얻지 못하게 되었다는 문제이기도 하다. Saucy는 현재의 일이 새 창조의 종말론과 연결되지만, 타락 이후 인간의 노동은 여전히 소명을 반영하면서도 더 이상 스스로를 완성하지 못하며 늘 불완전성과 허무를 동반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현대의 사무직, 돌봄노동, 지식노동, 목회, 예술, 가사노동까지 포함해 모든 노동에 적용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피곤하고, 아무리 의미 있는 일이라도 좌절을 경험하며, 아무리 큰 성취를 이루어도 완전한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3장은 인간 노동의 현실을 매우 깊이 통찰하는 본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 3장을 노동에 대한 전면 부정으로 읽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본문은 노동이 여전히 인간 삶의 일부로 남아 있음을 전제한다. 인간은 에덴에서 추방된 뒤에도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된다(창 3:23). 즉 추방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땅과 관계하고, 일하며,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노동의 자리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노동이 이제 상실된 에덴을 그리워하는 자리, 곧 회복을 기다리는 자리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성서학연구원 자료는 창세기 3장과 4장을 비교하면서, 아담의 경우에는 땅이 저주를 받아도 땀 흘린 노동을 통해 여전히 소산을 얻지만, 가인은 아예 땅의 소산을 거부당한다고 설명한다. 이 비교는 창세기 3장의 심판이 노동의 전면 철회가 아니라, 왜곡되었으나 보존된 소명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¹⁰
(장로회신학대학교 성서학연구원, 제97회 심포지엄 자료집.)
결국 창세기 3장은 노동에 대해 이중의 진실을 말한다. 한편으로 노동은 여전히 인간의 본래 소명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일하도록 창조되었고, 세계를 돌보고 살아갈 책임을 벗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죄는 노동을 수고와 저항, 불안과 죽음의 조건 아래 놓는다. 따라서 타락 이후의 인간은 노동을 통해 온전한 자기 구원에 이를 수 없고, 노동 자체를 통해 자신의 존엄이나 궁극적 의미를 확보할 수도 없다. 노동은 중요하지만 궁극적이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이후 안식의 계명과 지혜문학, 그리고 신약의 노동 이해로 이어지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