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의 사투와 무료 관람의 행운, 모스크바에서 조우한 뭉크의 영혼
영혼을 베어 문 듯한 전율, 뭉크를 만나다
어제의 강행군으로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캠핑카 에벤에셀에게 달콤한 휴가를 주고 우리는 모스크바 지하철 여행에 나섰다.
낯선 도시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무인 발권기 앞에서 셀프로 승차권을 척척 구입했다. 거리와 상관없이 55 루블인 일회용 승차권 예지느이(Единый)를 들고 주황색 노선을 따라 트레티야콥스카야역으로 향했다.
모스크바 지하철은 소문대로 역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정교하게 새겨진 대형 조각 부조들을 감상하노라면 이곳이 역인지 박물관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역에서 미술관으로 걷는 길, 누군가 썩은 나무 밑동에 정성껏 심어놓은 예쁜 꽃들이 낯선 이방인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하지만 감상도 잠시, 미술관 앞은 이미 인산인해였다.
오늘은 평일이니 괜찮겠지 했던 기대는 2시간이 넘는 대기 줄 앞에서 무너졌다. 인터넷 예약자들에게 밀려 춥고 다리 아픈 시간을 견디며 드디어 입구에 다다랐을 때, 시계는 오후 5시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헐~
바로 우리 앞에서 문이 닫히며 오늘 입장 마감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3시간을 기다렸는데, 단 3명 차이로 잘린 것이다.
속상한 마음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그때, 기적처럼 한 여직원이 나타났다. 우리는 간절한 눈빛과 함께 "멀리서 온 한국인 관광객"임을 어필하며 일종의 '외국인 찬스'를 썼다.
통사정 끝에 우리의 사정을 이해해 준 그녀 덕분에 극적으로 입장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무료 관람의 행운까지 거머쥐었다.
이곳이 별관임은 꿈에도 모른 채 우리는 행운에 감사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이번 전시의 테마는 ‘생의 프리즈(The Frieze of Life)’.
사랑, 불안, 절망, 그리고 죽음. 한 인간의 내면사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장 먼저 마주한 '절규'는 교과서 속 도판과는 전혀 다른 실재의 충격이었다.
이어서 'The Death Bed'에서 느껴지는 죽음의 그림자, 'Two Human Being'의 지독한 고독, 그리고 붉은 머리카락이 남자를 휘감은 'Beneath the Red Apples'까지. 뭉크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진동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시의 끝자락, 거대한 화면을 가득 채운 'The Sun'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전율했다. 절규하던 불안과 고통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라고 선언하는 듯한 그 광휘 앞에서 우리는 한참을 서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와 보니 보려 했던 본관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그러나 계획이 빗나간 자리에 운명처럼 끼어든 뭉크와의 조우는 분명 ‘신의 한 수’였다.
아르바트 거리: 빅토르 최를 추억하며
다시 지하철을 갈아타고 모스크바의 명동이라 불리는 아르바트 거리로 향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강렬한 버스킹 공연이 거리의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꼬마 아가씨의 풍선을 주워주며 가벼운 장난도 쳐보았다. 웅장한 건물들에 압도당하던 긴장감이 사라지고, 비로소 러시아의 일상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아르바트의 음유시인 불라트 오쿠자바와 푸시킨의 동상을 지나며 러시아의 예술적 향취에 젖어들 무렵,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보라색 우산 하나에 몸을 맞대고 걷는 아르바트의 밤은 낮보다 더 낭만적이었다. 바흐탄고프 극장의 은은한 조명이 비에 젖어 더욱 반짝였다.
쪙님이 심사숙고해 선택한 아르메니아 식당 Apapat에서 따뜻하고 맛나게 저녁을 먹고 나니 차가운 비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거리 한쪽, 온통 낙서로 뒤덮인 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러시아 록의 전설, 고려인 3세 가수 빅토르 최를 기리는 최의 벽이다. 누군가는 스프레이로 그의 이름을 남겼고, 누군가는 가사를 적어두었다. 음악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부드러워졌다. 멜로디 안에서는 모두가 같은 박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지하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며 모스크바의 긴 하루를 마무리했다. 절규와 태양, 그리고 기타 선율. 그날의 모스크바는 우리에게 가장 뜨겁고 낭만적인 얼굴을 보여주었다. 평생 잊지 못할 낭만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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