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16시간의 여정 끝에 마주한 찬란한 부활의 증거들
러시아의 스케일, 444를 아는가?
러시아에는 444라는 말이 있다. 영하 40도가 추위냐, 도수 40도가 술이냐, 운전 400km가 거리냐 하는 농담 섞인 호기다.
오늘 우리는 이 말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아침 7시, 세르게이선교사님 부부와 함께 길을 나섰다.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약물 중독자 치료센터에 가자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나선 길이었다.
하지만 차는 달리고 또 달렸다.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블라디미르를 지나고도 한참을 더 들어갔다.
모스크바에서 무려 385km 떨어진 이바노보주 니쿨스코예. 도착했을 때는 이미 출발한 지 6시간이 지난 후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거리를 옆 동네 마실 가듯 다녀오는 러시아의 압도적인 스케일에 혀를 내둘렀다.
기적의 농장, 그리고 셰프 유라
도착한 곳은 차가운 수용소가 아니었다. 염소 아홉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토끼들이 뛰어노는 평화로운 농장이었다.
러시아 정부 지원 없이 2016년 세르게이 선교사님이 구입한 땅에 현지인 빅토르 목사님과 약물 중독 형제님들이 피땀 흘려 일군 기적의 터전이었다.
하지만 이 평화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농장의 한쪽에서는 새로운 자립을 위한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버려진 창고를 뜯어내고 서까래를 올려 번듯한 양계장으로 탈바꿈시키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기술자도 없는 이들이 오직 서로의 어깨를 빌려 지어 올리는 그 투박한 뼈대 위로 재활의 희망이 함께 쌓이고 있었다.
점심 식탁에는 정성 가득한 유기농 요리가 차려졌다. 메인 셰프는 유라였다.
그는 과거 이가 다 빠지고 걷지도 못할 만큼 심각한 약물 중독자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신앙을 통해 건강을 되찾았고, 블라디미르까지 가서 농법을 배워와 비닐하우스를 진두지휘하는 능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투박한 손으로 차려준 밥상에서 생명의 맛이 났다.
일어나 걸어라, 제냐가 마주한 빛
2층 숙소에서 만난 청년 제냐의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오랜 약물 투약과 영양실조로 온몸의 뼈가 녹아내렸다는 의사의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병원에서도 포기해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가, 꿈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이의 일어나 걸으라는 음성을 듣고 일주일 만에 걷게 되었다고 열변을 토했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뜨겁게 말을 쏟아내던 그의 모습은 신비롭기 까지 했다.(통역은 선교사님 사모님께서 해주셨다)
나중에 의사가 두 발로 걸어 들어온 그를 보고 내가 알던 그 뼈만 앙상한 제냐는 어디 가고 네가 왔느냐며 믿지 못했다는 이야기. 확신에 차서 말하는 제냐의 맑은 눈빛에는 그 어떤 설교보다 강력한 부활의 증거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빈손의 부끄러움과 뜨거운 밤
우리는 그들을 위로하겠다고 갔지만, 정작 위로받은 건 우리였다. "저희는 빈손으로 왔는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어제 담근 김치를 깜빡하고 두고 온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미안해하는 우리에게 그들은 오히려 직접 숲에서 채취한 귀한 자작나무 수액을 선물로 내밀었다. 가진 것 없어도 나누기를 기뻐하는 그들의 마음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돌아오는 길, 다시 385km를 달렸다. 밤 11시 40분이 되어서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왕복 16시간 40분의 대장정이었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차 안의 공기는 뜨거웠다. 화려한 붉은 광장의 야경보다 흙먼지 날리는 시골 농장에서 만난 그들의 투박한 미소가 더 찬란하게 빛나는 밤이었다. 이곳이 진짜 러시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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