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심장을 옥죄는 아침의 경고, 5,000 루블
구세주 성당이 내려다보이는 모스크바 강변의 아침은 눈부시게 상쾌했다.
어젯밤 유람선에서의 소동과 쪙의 이마에 솟아난 유니콘 혹을 안주 삼아 웃음꽃을 피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에벤에셀의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느긋하게 모닝커피를 내리던 그때였다.
무심코 창밖 주차 안내판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춰 섰다.
순간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5,000 루블이면 우리 돈으로 약 10만 원. 러시아 물가를 생각하면 며칠을 아껴야 모을 돈이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어젯밤부터 이곳에 당당히 정박 중이었다.
"여보, 이거 벌금이래!" "5천 루블이야!" 이거 지금 내야 하나 봐!"
내 목소리에 놀란 쪙이 달려왔다. 안내판에는 문자로 차량 번호를 등록하고 주차비를 결제하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외국 유심을 사용하는 우리에게 러시아 현지 번호로 문자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한 임무였다.
전용 앱을 깔아보려 했으나 접속조차 되지 않았다. 졸지에 우리는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법을 어긴 범법자가 되어 생돈 10만 원을 날리게 생긴 처지였다.
'10만 원이면 우리가 그토록 아끼는 기름을 두 번이나 가득 채울 수 있고, 쪙이 좋아하는 킹크랩을 한 번 더 먹을 수 있는 돈인데!'
피 같은 돈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상상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쪙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이대로 견인되는 건 아닐까, 국경에서 출국 금지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온갖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결국 최후의 보루인 모스크바 한국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영겁처럼 느껴졌다.
“아, 선생님. 걱정 마세요. 외국 차량은 시스템 등록 자체가 안 돼서 주차요금을 낼 수도 없고 벌금을 부과할 수 없습니다. 그냥 가셔도 됩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대사관직원의 목소리는 그 어떤 교향곡보다 아름다운 천사의 나팔소리 같았다. "정말입니까? 정말 괜찮은 건가요?" 몇 번을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십년감수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아침 햇살이 다시금 평화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이슨 건조기가 날려버린 편견, 리오 몰의 문화충격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리오(Rio Sevastopolskiy)쇼핑몰로 향했다.
그곳 화장실에서 '문화충격'을 경험했다. 도구의 발전사에 관심이 많다는 나였지만, 정작 내 머릿속 선입견이라는 도구는 얼마나 낡아 있었던가.
화장실 수도꼭지 양옆에는 날개처럼 묘한 장치가 달려 있었다. 손을 씻고 슬쩍 갖다 대니 강력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며 씻은 손의 물기를 단번에 말려버렸다.
그 유명한 다이슨(Dyson) 에어블레이드 워시+드라이(Dyson Airblade Wash+Dry)시스템이었다.
대략 150만 원에서 200만 원을 훌쩍 넘기 때문에, 웬만큼 인테리어에 큰 비용을 투자하는 랜드마크 건물이 아니면 한국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귀하신 몸'이었다.
"와, 여보! 이거 봐! 물 뚝뚝 흘리면서 손 털 필요가 없어!"
러시아는 투박할 거라 생각했던 내 머릿속 지도가 살짝 구겨졌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기한 마음에 나는 몇 번이나 손을 다시 씻으며 촌놈 티를 냈다. 낡은 것은 러시아가 아니라 내 고정관념이었다. 나는 또 하나의 편견을 들고 여행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에벤에셀, 정성을 버무리는 '김치 공장'으로 변신
문명 체험을 마친 우리의 마지막 임무는 식재료 장보기였다. Lenta 마트에는 배추가 없어 다시 오션(Auchan) 마트까지 찾아가는 우여곡절 끝에 기어이 싱싱한 배추 5 포기를 마치 전리품처럼 손에 넣었다. 내일 만날 소중한 분들을 위한 선물 준비였다.
에벤에셀로 돌아오자마자 평화롭던 우리의 집은 거대한 '김치 공장'으로 변신했다. 냉동고 깊숙이 보관했던 양념팩을 꺼냈다.
한국을 떠나기 전, 혹시나 터질까 봐 겹겹이 포장하며 정성을 쏟았던 그 소중한 양념이었다. 해동된 양념에서 익숙하고 진한 마늘과 젓갈 냄새가 퍼지자 에벤에셀 안은 순식간에 고향의 향기로 가득 찼다.
좁은 캠핑카 주방에서 배추 5 포기를 절이고 버무리는 작업은 흡사 전쟁이었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좁은 싱크대에 매달려 배추와 씨름하느라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허리야... 그래도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쪙은 이마의 혹도 잊은 채 정성을 다해 배추 속을 채웠다. 좁은 공간에서 사방으로 튀는 물기를 닦아가며, 우리는 진심을 버무렸다.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풍기는 진한 김치 냄새가 창밖으로 퍼져나갔다.
혹시나 러시아 사람들이 항의하러 오지는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모스크바의 시원한 밤공기가 우리를 응원해 주는 듯했다.
마침내 빨갛게 꽃이 핀 김치를 통에 꾹꾹 눌러 담았다. 냉장고에 김치통이 꽉 채워지는 것을 보니 10만 원 벌금 위기를 넘겼을 때보다 더 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 김치가 내일 만날 분들에게 고향의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면, 오늘의 허리 통증은 기분 좋은 훈장일 뿐이었다.
모스크바의 밤은 그렇게 김치 익어가는 냄새와 함께 천천히 식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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