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모스크바에서 만난 뜻밖의 위로

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by 편부효

길의 끝에서 마주한 등대, 낯선 땅의 한글 간판


붉은 광장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맞이한 주일 아침. 자석에 이끌리듯 길을 나섰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주소는 낯선 키릴 문자가 가득한 거리였다.


"여보, 여기 맞는 것 같아?"


불안한 눈빛으로 골목을 돌자, 저 멀리 낯익은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십자가였다. 그리고 그 아래 선명하게 적힌 한글 간판. '모스크바 한인 장로교회'.


1990년, 소련과 수교가 맺어지기도 전에 세워졌다는 그 교회. 러시아어 간판들의 숲에서 발견한 ‘교회’라는 두 글자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만난 오아시스처럼, 혹은 망망대해에서 만난 등대처럼 우리를 반겼다.


타국에서 깨달은 오만, ‘나’라는 감옥을 넘어서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하고 정겨운 선율이 우리를 감쌌다. 강단에 서신 이헌철 담임목사님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말씀을 전하셨다.


목사님의 설교는 여행자인 우리 부부의 무뎌진 폐부를 찔렀다. 낯선 땅을 여행하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멋대로 판단하고 비판해 왔던가. 목사님의 말씀은 지친 여행자의 영혼에 따끔한 주삿바늘이자, 동시에 따뜻한 위로의 연고가 되어 스며들었다. 그래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예배 후 이헌철 목사님과 사모님은 선교 수기집과 수필집을 선물로 주셨고, 식당에서는 권사님들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칼칼한 김치를 퍼주셨다.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만난 완벽한 고향이었다.


김치에서 올라오는 익숙한 마늘 냄새와 김이 오르는 쌀밥의 온기가,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와 있었는지를 그제야 실감하게 했다.


보리차 소동, 강변에 나타난 유니콘


오후에는 구세주 성당 앞 강변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저녁 유람선을 타기 전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쪙은 딸과 보이스톡을 하며 수다를 떨고 있었고, 가스레인지 위에는 보리차 물이 끓고 있었다.


"어어! 물 넘친다!"


주전자 뚜껑이 들썩이는 소리에 놀란 쪙. 급하게 뛰어가다가 그만... 쿵! 상부 수납장 모서리에 이마를 정통으로 들이받았다.


"으악!" 별로 아파하지는 않았는데, 이마 한가운데에 대왕만 한 혹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유니콘의 뿔처럼.


"여보, 괜찮아? 으하하하하!" 아픈 건 둘째치고 이 몰골이 너무 웃겨서 우리 둘 다 배를 잡고 뒹굴었다. "이 얼굴로 유람선 타도 될까?"


야경은 황홀하고 눈치싸움은 치열했던 유람선


결국 쪙은 이마에 영광의 상처(?)를 달고 저녁 8시 모스크바강 유람선에 올랐다.



강 위에서 바라보는 크렘린과 성당들의 야경은 황홀했다. 그런데 이 배, 안내방송이 없다.


"지금 어디쯤이지? 내려야 할 곳 지나는 거 아니야?"


넋 놓고 야경을 즐기다가 엉뚱한 곳에 내릴 판이었다.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구글 지도와 창밖을 번갈아 보며 눈치게임을 해야 했다.


"저기다! 구세주 성당 보인다!" 하마터면 종점까지 갈 뻔했지만, 무사히 하차 성공.


구세주 성당 뷰, '5성급 에벤에셀 호텔' 숙박

다시 돌아온 우리의 집, 에벤에셀호. 오늘 밤 정박지는 구세주 성당이 코앞에 보이는 모스크바 강변 주차장이다. 침대도 아니고 화장실도 좁지만 '뷰(View)' 하나만큼은 5성급 호텔 부럽지 않은 이곳.


"여보, 오늘 밤은 여기 '5성급 에벤에셀 호텔'에서 자자."


이마에는 혹이 났고, 유람선에선 가슴을 졸였지만, 모스크바의 야경을 이불 삼아 잠드는 밤은 그 어느 때보다 낭만적이었다.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새로운 이야기가 배달됩니다.



#유라시아횡단 #러시아캠핑카여행 #부부세계일주

#캠핑카세계여행 #시베리아횡단 #은퇴후세계여행

#인생2막 #은퇴후도전 #지구촌여행기 #에벤에셀




이전 15화제13장:붉은 광장 주차 대작전과 킹크랩의 한(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