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정말 나쁜 엄마였을까
처음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자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소외된 이들 가까이에서 지내다 보니,
긍휼한 마음보다 오히려 미워하는 마음이 많이 생기곤 했습니다.
어찌 보면 나의 분노는 정당합니다.
첫째 형에게 막내 동생을 팔아 돈을 가져오라고 시키는 부모,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부인과 아이들을 칼로 위협하는 아빠,
네 번째 남편에게 7살 된 딸아이가 성폭행 당하는 것을 방치한 엄마,
맏딸을 수 년간 무료로 일하게 할 테니 돈을 좀 꾸어 달라는 부모,
새 남편을 만나고 나서 무작정 아이를 맡기겠다는 엄마.
아이들에게 다른 이를 용서하라고 가르치면서도,
아이들이 엄마도 자기를 버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며 그를 감싸면
마음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습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지도, 돌봐 주지도 않은 부모를
왜 피해자인 아이가 감싸야 하는지 화가 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정당한 분노 조금과 우월감 한 줌,
그리고 나의 위선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 한 아름이었습니다.
대체 세 번을 당하고도 왜 또 네 번째 남자와 살아야 하냐는 물음에,
남편 넷인 그녀의 동네 여자들은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가끔 허드렛일이라도 해서 남편이 벌어오는 돈 한 푼이 아쉬운 것이라고요.
새벽에 만오천원의 야채를 도매시장에 사서 만원어치를 파는 하루를 살아 본 적이 없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엄마에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딸 앞에서
대꾸 한 번 못 하는 그녀는 미안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엄마 노릇 못 하고 남의 손에 키워서 할 말이 없다고요.
조용히 뒤돌아 앉은 어깨가 꼭 아이의 그것처럼 작아 보였습니다.
슬픔을 꾹꾹 삼키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그도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님을.
물론 그들이 잘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은 아이에게 큰 상처를 남기니까요.
하지만 만약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나는 좀 더 훌륭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들이 무정한 부모였던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더 나은 선택을 한 이들이
정말 훌륭한 부모였던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다음 세대의 아이들은 꼭
나쁜 엄마, 나쁜 아빠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선택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