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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May 18. 2023

*반전주의* 내가 만난 지독히 성실했던 연예인

나를 기절시킨(?) 유일무이한 연예인

어느덧 예능 피디로 살아온 지 10년이 되어간다. 꽤 많은 연예인들을 봤다면 보았는데, 아직까지 내 기준 가장, '지독히' 성실했던 예능인은 단연 이휘재다.


이휘재 씨를 만난 건 내가 임산부였던 2016년이다. 임신으로 인해 3년 가까이 조연출로 일했던 <1박 2일>에서 비교적 근무 강도가 낮은 프로그램인 <비타민>이라는 스튜디오 프로그램으로 옮기게 되면 서다. 당시 MC가 이휘재였다.


프로그램을 옮길 때도 나 또한 대중들이 그렇듯 이휘재라는 사람을 바람둥이 혹은 비호감 정도의 이미지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렇게 다가온 <비타민> 첫 녹화 날.


모든 예능 프로그램은 녹화 전에 MC들과 보통 대본 리딩을 한다. 1시에 리딩이면 보통 10분 전에 연예인들이 오면 양호한 편이다. 그런데 이휘재 씨가 11시 반에 이미 대기실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대체 왜지? 근처에 볼 일이 있으셨나?'

사실 여유 있게 밥도 먹고 쉬다가 가려고 했는데, 초면인 연예인 혼자 우두커니 있을 걸 생각하니 초조해서 부랴부랴 대기실로 갔다.


막상 가니 본인은 원래 늦을까 봐 몇 시간씩 빨리 온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아저씨처럼 웃으며 직접 싸 온 과일을 먹었다.


실제로 이후로도 이휘재 씨의 두어 시간 빠른 출근은 매주 계속 됐다.

일찍 오는 것도 신기했는데, 더 신기한 그림이 있었다.


'대본리딩'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실 수년간 같은 포맷으로 이어져온 <비타민>의 경우, 리딩 할 거리가 사실상 없다. 특히 강호동, 신동엽, 이휘재 등 A급 MC들은 세세하게 절대 리딩을 하지 않는다. 이미 진행 능력이 몸에 탑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메인 작가가 특이사항이 있을 때에만, "오늘은 데뷔 30주년을 맞은 A 가수가 나와요."등의 굵직한 팁만 주고 녹화에 들어간다. 대본도 넘겨보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수많은 메인 MC를 거쳐온 이휘재 씨가 내 앞에서 대본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비타민 MC 이휘재입니다."부터 마지막 멘트인 "오늘도 시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주에 만나요." 따위의 상투적인 멘트마저 안경을 고쳐 쓰며 진지하게 소리 내어 읽었다.


당시 만삭에 가까웠던 나는, 그 한 글자도 놓치지 않는 숨 막히는(?) 리딩의 기이한 풍경에 순간 어지럼증을 느꼈다. 실제로 그즈음 미주 신경성 실신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기에 딱 그 공포를 느끼고 자리를 급히 떴다. 그 자리에서 쓰러졌으면 아마 안 그래도 걱정 많은 MC인 이휘재 씨의 걱정을 한가득 샀을 것이었다.


재빨리 식은땀을 닦으며 이휘재 씨를 피해(?) 화장실로 피신했고, 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쓰러졌다.

내 인생 두 번째 기절의 순간이었다. 다행히 금방 정신을 차리고 나와서 조연출로서 녹화를 진행했다.


결론적으로 이휘재는 나를 기절시킨 유일무이한 연예인이 되어버렸다.

물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남편 정도한테 미친듯한 MC의 대본 리딩 때문에 기절한 일화를 들려줬다.


이러한 일화가 있음에도 입을 닫았기 때문에, 서로 개인번호도 없을 만큼 사적인 친분은 없고, 아마 잠깐 스쳐간 조연출인 나를 기억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 내가 입봉 할 시기가 되어 기획안을 쓸 때 '헤어진 부모와 자식을 만나게 하는 기획의 프로그램'에 섭외 안에 이휘재를 넣어서 부장님을 보여준 적이 있다.


비호감, 바람 이미지를 다 이길 만큼 자녀에게 아빠로서는 진심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파일럿 시절, 우스꽝스러운 머리띠를 한 채 열이 나는 쌍둥이를 안고 울면서 응급실로 달려간 이휘재를 본 모든 사람이 느꼈을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기획안에 이휘재에 대한 소개로 "여느 연예인과 달리 음주운전이나 사회적 전과가 전혀 없지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 자숙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썼던 것 같다. 이 문장까지는 보지도 않고 '이휘재' 세 글자를 본 부장님이 나를 차근차근 다그쳤다.


"이휘재? 너는 입봉을 하는 피디가 호감 연예인들로만 쫙 섭외리스트를 짜와도 될까 말 깐 데, 굳이 다 싫어하는 이휘재를 넣어온 거니? 입봉이 간절하지 않은가 보네."라며 사실상 기획안 폐기를 지시했다. 물론 이 부장님은 <주접이 풍년> 기획안도 폐기하라고 하셨던 분이긴 하다.


따라서 이 기획안은 당사자인 이휘재는커녕,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기획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가 만난 지독히 성실한 연예인을 꼽으라면, 여전히 이휘재인 건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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