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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May 25. 2023

사장은(메인피디는) 감히 문 닫지 마

평생 조연출로 살 줄 알았던 메인피디의 회한

입사하고 10년 가까이를 메인 연출 선배를 말 그대로 '돕는' '조'연출로 살다가 어느덧 연차가 되어 메인피디로 살고 있다.


지금은 <살림하는 남자들>이란 기존에 있던 프로그램의 메인 연출을 맡고 있지만,

작년엔 <주접이 풍년>이라는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해 볼 수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심장이 조이도록 긴장될 수 있을까 싶었던 순간이었고, 운 좋게 유능한 조력자들이 많아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입봉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 특히 처음 메인피디가 된 나에게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피디선배가 있었다. 선배에게 뭔가 끌고 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단호한 어투로 말씀하셨다.


"은지야, 냉정하게 네 첫 프로 잘되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한 명도 없어. 너밖에 없어. 나머지는 네 프로그램이 다 안되길 바라고 있어."


상상도 안 해본 말이고 심적으로 힘든 시기였기에 선배의 말에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차오르는 눈물을 참고 이유를 물으니 선배가 말씀하셨다.


"이 프로 잘돼 봐야 스텝들은 할 일만 늘어나는 거고 너는 더 요구사항만 늘어날 텐데 좋아하겠니. 그리고 회사 선후배들이 네가 잘되면 좋아할 것 같아? 다들 피디들인데 네 프로가 안 내려가면 자기 프로그램할 자리가 없어지는 건데 좋아하겠어? 다 경쟁자라서 배만 아플 뿐이야. 다들 이 프로그램이 잘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고 착각하면 안 돼. 가장 욕심내고 이 프로그램을 사랑하는 건 너야. 그래서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고 들을 수밖에 없는 거야."


듣는 내내 선배의 말이 씁쓸했지만, 6개월 여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면서 선배의 말을 끄덕이며 곱씹는 날이 많아졌다.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던 스태프들이 '휴가가 적다.', '페이를 올려달라.' 등의 이유로 떠나갔고 그때마다 나는 이해하는 척 보내주고 뒤돌아서 조용히 아파했다.


그럼에도 문을 닫을 순 없었다. 문을 닫고 싶은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진짜 문이 닫힐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작년에 다녔던 헬스클럽에서 일대일 PT를 받고 있었는데, 내 담당 트레이너가 말도 없이 그만뒀다. 당황스러워서 헬스장 대표를 찾아가서 항의했지만 쉰이 훌쩍 넘은 대표님은 오히려 "내가 더 울고 싶어요. 오늘 당장 와서 지금 그만둔다고 나가는데 어떡해요."라고 진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가 할 말을 잃게 했던 일이 떠올랐다.




입사하고 그릇 넓은 선배들 등에 숨어, 내 분량의 편집만 잘 털면 칭찬받고 편의점에 캔맥주 마시러 가고 매주 그저 행복한 조연출로 꽤 긴 시간을 살았었다.


메인피디(사장)가 되니 그 주에 시원하게 털 수 있는 게 없다. 다음 주에 대한 압박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메인 연출이 된 이후로는 어딜 가든 사장님의 표정을 유심히 보게 된다.


지금 다니고 있는 크로스핏 수업을 대표님이 한 타임도 못 쉬고 풀타임으로 최근에 하는 걸 보았다.

문득 '수업을 해야 하는 직원이 그만뒀나 보다.'라는 직감과 함께, 작년에 <주접이 풍년> 팀 편집 PD, FD, 작가 등 핵심 인력들이 돌아가면서 그만둔다고 했을 때 느꼈던 구멍 난 듯한 마음과 상실감이 떠올라서 마음이 아팠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3일간의 내 과몰입이 무색하게 기존 코치님이 어제부터 다시 나오셨다.

짧은 휴가를 다녀오신 건지, 그만두려다가 대표님이 설득해서 다시 나오신 건지는 모른다.


다만 지친 얼굴로 대표님이 어제 조기퇴근 하는 모습을 보고 말없이 혼자 안도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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