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고 중독자입니다
나는 보고 '중독자'이다.
나를 거쳐갔던 상사라면 모두 인정할 정도이다.
내가 보고 중독자를 자처하며 사사로운 것까지 굳이 보고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업무 과정에서 상사의 참여도를 올리기 위해서.
실제로 보고로 인해 상사의 참여도가 올라가지 않더라도, 과정을 공유받으면서 전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는 꼭 소위 말하는 사회생활이나 아부(?)의 차원이 아니라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방송 제작은 협업인데 모든 게 저질러진 이후에 받는 통보만큼이나 사람을 비참하고 화나게 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2. 업무 관련 얘기를 내가 아닌 다른 루트로 듣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업무를 하면서 나의 결정이 다 맞을 순 없다. 그러나 잘못된 일일지라도 우리 팀 내에서 공유받는 것과 외부를 통해 전해 듣게 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외부를 통해 인지되는 순간 객관적 잘못은 더 커지고 사전에 미리 공유받지 못했기에 예방하지 못했다는 추가 지적사항 까지 더해지게 된다. 나를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작은 것이라도 꼭 공유하는 편이다.
3. 중간보고 과정에서 방향 수정을 하기 위해서.
일에 몰입하다 보면 감히 내가 유능하다고 여겨지는 순간이 있다. 나에 대해 날 선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문 상급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어찌 보면 나의 위치인 메인 연출자라는 것도 그런 위치일 수 있다.
대부분 나의 부족이나 잘못을 지적해 주기보단, 나의 생각을 구현시켜 주는 사람들과 주로 일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나의 방향을 뒤집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럴 때 먼저 경험을 한 상급자에게 사사로이 공유를 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하다못해, 누군가를 미팅할 때는 어떤 선물이 좋겠다거나, 내가 관심있는 특정 출연자가 과거에 이러이러한 실수를 우리에게 범한적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는 등의 팁도 받은 적이 있다. 이건 '미팅 예정 건'과 같은 사사로운 건들을 보고 할 때 얻을 수 있는 피드백들이다. 실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지만, 누구도 먼저 나에게 알려주려고 하지 않는 정보들이다.
4. 나와의 업무 친밀도를 올리기 위해서.
팬들은 라이브방송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럴사한 조명 하나 없이 호텔방에서 잠깐 휴대폰으로 라이브를 켜고 나의 최애가 인사만 하더라도 열광한다. 일상을 공유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일상을 공유하는 것과 업무 보고는 굳이 따지자면 귀찮은 일들이다. 시간도 들고 텍스트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작문 자체에 부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보고 받는 사람들이 느끼는 고마움은 다르다. 내가 이 정도로 이 팀에 중요한 일원이라는 존중감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사입장에서도 그렇게 존중감을 느낀 채 우리 팀에 상사로 계셔주는 것과 아닌 것에는 업무에도 질적인 차이가 난다. 또한 나도 누군가를 존중하며 일할 때 일의 효율이나 활력이 올라간다. 누군가를 한심해하고 저주하며 일하는 것만큼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는 없다.
이처럼 소통의 기본은 조바심으로 느껴질 정도의 공유라는 게 사회인으로서 나의 생각이었다.
이에 확신을 불어넣어준 최근 계기가 있었다.
감사하게도 카카오뱅크로부터 제안을 받아 11월 초에 강연을 하게 되었다.
전반적인 처리 과정이 매끄러웠지만, 강연료 계약에 대한 부분에 딜레이가 있었다.
사실 나에게 큰 부분은 아니었기에, 크게 우려는 없었는데
먼저 선제적으로 이메일로 알람이 왔다.
강연 계약이 늦어지고 있으나 강연은 문제없이 진행될 예정이니 안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메일이었기에 따로 답장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문자가 또 왔다.
이메일을 혹시 확인 못했을까 봐 문자를 보냈다는 내용과 함께
혹시라도 강연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하고 있을까 봐 이메일을 보냈는데
내가 확인을 못했을까 봐 문자를 따로 주신 것이었다.
배려해 주시고 안내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바로 답장을 드리고 나서,
역시 잘 되는 소통의 기본에는 '조바심'이 깔려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바심'이라는게 부정적인 어휘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 그 자체다.
상대가 내 메시지를 못 읽고 답답해하고 있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함과 걱정.
그것이 상대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시간은 나에게도 소중하고 남에게도 소중하다.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고도 노심조차 문자까지 다시 보내준 카카오 뱅크 직원의 시간도 바쁘고 소중했을 것이다. 그런 시간을 쪼게 나를 걱정해 준 '조바심'에 참 감사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조바심이라 비웃을지라도
꾸준히 공유를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