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462391&ref=A
오늘 아침 운동하면서 보게 된 뉴스다.
어제는 책이 내 비루한 인생을 구원했다는 글을 썼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보게 된 상하이에 마지막으로 남은 신문 판매점을 소개하는 뉴스.
판매 저조에 진작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계속 종이신문을 팔아달라는 단골 독자들의 간곡한 요청과 건물주가 월세를 감면해 주는 등 숱한 설득으로 아직 위태롭게나마 남아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방송관계자, 정확히는 피디 지망생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변함이 없었고 많이들 그렇듯 목표는 있었으나 구체적인 계획이 부재했었기에 숱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한 두 번 낙방은 추억이 될 수 있지만 수차례 낙방은 자기 비하를 기본으로 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다 교내 커뮤니티에서 찾게 된 것이
"생활스터디"였다.
아니, 하다 하다 무슨 생활스터디를 하나 싶겠지만,
생각보다 목표는 높으나 의지가 약한 이들은 많았기에 아침 9시에 학교에 모여 다 같이 출석을 부르고 늦은 자에게 벌금을 부여하며, 점심시간 마저 통제하며 성실히 생활스터디를 해나갔다.
게으른 와중 나름 우직한 성실성은 있었기에 거기서도 안착을 하자
"생활스터디"에서 "신문스터디"로 나아갔다.
이명박라운지(고대에 실제로 있는...)에 9시에 모여 각자 맡은 신문을 1시간 동안 정독하고, 팀원들 앞에 브리핑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주제를 정해 논술문을 써보는 스터디였다.
의지를 굳게 다지며 벌금도 회당 5천 원으로 백수치고는 좀 세게 먹이는 것에 다 같이 동의하며 시작했다.
매일 6시 반에 일어나 대충 씻고, 종이 신문을 한 부 사서 고대행 버스 273번에 타는 게 매일의 일과가 되었다.
여기서 또 소 같은 우직함을 발휘했던 나는 벌금을 한 차례도 내지 않는 독한(?) 모습으로 팀원들에게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좋았던 것은,
당시 눈을 뜨면 누구도 나를 찾는 곳도 없었으며 갈 곳도 없었던 나에게
벌금 5천 원이 내기 아까워서라도 신문 한 부를 들고 마치 직장인처럼 가야 할 곳이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내가 꼭꼭 씹어서 읽고 해석한 내용을 팀원들한테 들려주면 나름 초롱초롱한 눈으로 들어주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친밀도가 나름 진실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한 여름밤의 꿈같지만 다 같이 강릉이 고향인 팀원의 동네로 돈을 모아 1박 2일로 강릉 워크숍을 가기도 했다.
다들 백수였기에 '워크'고 뭐고 없었음에도 진지하게 강릉에 가서 회도 먹고 밤바다를 보며 잡히지 않는 전의를 불태웠다. 그리고 내 기억이 왜곡되지 않았다면 거기서도 초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며 숙취가 깨지 않은 와중에 각자 맡은 신문을 한 부씩 사서 아침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신문 스터디를 속행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들은 실제로 다들 각자 신문기자로 또 피디로 각자의 속도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실제로 지각 한 번 없었던 내가 가장 늦게 피디가 됐던 것 같다.ㅎㅎ
그러니 당장 늦는다고 너무 조바심 내지 마시길...
그렇게 천 원이 채 되지 않으며 석유잉크 냄새 가득한 신문 한 부는
내가 안풀린답시고 주변 사람을 시샘하다 나조차 미워하고 다치게 하는 상황에서 다시 나를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1분 남짓한 뉴스였음에도 신문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뉴스에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이다.
가급적이면 오래 살아남은 것들은 증발하듯 쉬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