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글을 읽은 독자라면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기대감의 리듬이든, 기대감 다발이든 비유야 좋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기대감을 말하는가? 세상에 기대감의 숫자가 한 두 가지도 아니고. 맞다. 그런 불만의 근원에는 기대감이란 말에도 어떤 구체적인 사례들을 모아서 만든 총론에 불과하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그래서 각론이 필요하다. 그리고 각론에 접근하는 방식은 매우 세부적인 예시로 시작하려고 한다. 왜냐고? 나도 위선을 벗어던지기 위해서다. 나 역시 세상의 모든 영화를 재밌게 보지 않는다. 내가 즐기는 장르는 정해져 있고, 내가 즐기지 못하는 장르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나는 내가 즐기고, 내가 그 요소들을 잘 말할 수 있는 장르와 관련이 있는 작품들로 각론을 시작하려고 한다. 귀신의 집에서 한 번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 귀신의 집의 재미를 설명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이건 모든 작법서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다. 작법을 알기 위해선 적어도 장르적으로 그 작법들이 쪼개져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발라드 작곡가가 힙합의 샘플링을 안다 해도, 그것을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들처럼 만들고 그 음악의 매력을 설파하긴 어려운 법이다.
대신 시작은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이 아는 영화로 시작한다. 그들이 각<기생충>은 장르물일까, 예술영화일까?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소비자의 몫이다. 각자 알아서 받아들인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기생충>이 상업영화냐, 예술영화냐의 문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럼 뭐가 중요하냐고?
영화는 무수히 많은 시퀀스로 이뤄져 있다. 우리는 <기생충>의 시퀀스를 곱씹어 봐야 한다.
<기생충>의 시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현대 영화가 사람들의 관심도를 묶어두기 위해서 플래쉬포워드 같은 기법과 오프닝 시퀀스를 중시하긴 하지만, 인물 소개는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필수요소라고 할 수 있다. <기생충>은 그런 면에서 인물 소개가 독특한데, 우선 <기생충>의 인물 소개가 독특하게 느껴지는 첫 번째 이유는 개별 인물들을 소개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생충>의 오프닝 시퀀스를 기억하는가? 기우(최우식 분)와 기정(박소담 분)이 애타게 와이파이를 찾다가 반지하 화장실 변기 근처에 쪼그려 앉았던 그 장면 말이다. 거기서 인터넷마저 깔 힘이 없어 대책이 뭐냐고 묻는 충숙(장혜진 분)과 충숙의 잔소리를 피해 빵 쪼가리를 씹으며 곱등이를 내쫓는 기택(송강호 분)은 모두 한꺼번에 소개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인물 소개가 당혹스러운 이유는 두 가지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첫째로 이 인물들은 아이콘은 고사하고 장르적 컨벤션 안에 머무는 캐릭터들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일상에서 볼 법한 가난한 가족이다. 그런데 불일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둘째, <기생충>의 캐릭터 소개는 예술영화가 추구하는 리얼리즘에도 관심이 없다. 어느 커뮤니티에서는 '실제 가난한 가족들은 절대 가족과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씁쓸한 코멘트가 밈처럼 퍼진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엔 봉준호 역시 그런 리얼리즘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는 이 비장르적 캐릭터를 가지고 다른 리얼리티를 형성하려고 하는데, 그건 장르와 리얼리즘이 묘하게 섞이며 만들어낸 리얼리티다. 반지하 화장실에서 와이파이를 찾는 남매 따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간단한 일상 속에 있어 보이는 이 인물들은 사실 그 자체로 불균질한 '캐릭터'다. 이 캐릭터들은 현실에도, 장르에도 완전히 몸을 맡기지 않은 캐릭터이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이 인물 소개를 볼 때 예술영화(여기서는 주로 리얼리즘을 지칭한다)의 기대감을 가지고 왔든, 상업적 장르영화의 기대감을 가지고 왔든 관객은 예상 밖의 소개를 받는다. 그래서 주도권은 쉽사리 작가에게 넘어간다. 이후 피자 가게 시퀀스에서 이 가난한 가족이 필요하고 원하는 바는 일자리임이 간단히 소개되면서 당혹스러울 정도로 짧은 호흡의 인물 소개가 끝난다. 피자가게 알바비를 받아 맥주 한 잔을 걸치는 가족들이 나올 즈음은 영화가 5분 정도 진행된 시간이다. 이후 기우의 동창인 민혁이 기우에게 구라 좀 치자며 과외를 넘기는 시퀀스가 또 5분여 진행되면 본격적으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리얼리티로 들어간다. 그건 일상에서 볼 법한(일상의 인물이 아니라) 범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작가의 예상 밖 인물 제시를 파악하기 바빴던 관객은 "어라?"하는 느낌을 받는다. 동네 슈퍼에 앉아 소주나 홀짝이는 저 친구가 무려 '사기'를 치겠다고? 다시 한 번 관객은 작가에게 멱살을 잡힌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상당히 빠른 호흡으로 기정의 수준급 포토샵 실력으로 졸업증명서가 위조되고, 기우의 부모 기택과 충숙은 기우의 사기 면접을 응원한다.
이 당혹스러운 그림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봉준호의 머리 속에는 뭐가 들어 있었길래? <기생충>이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수상을 휩쓸기 전인 한국 개봉 당시 인터넷에서 <기생충>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 즈음부터 그들은 가난을 희화화하는 느낌을 받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진중한 리얼리즘 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지점부터 봉준호가 하이스트 무비를 그리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가족이 IT 스타트업으로 성공한 부자집을 터는 이야기 말이다.(하이스트 무비는 케이퍼 무비라고도 불리는 범죄 하위 장르다.) 이후 전개되는 기정, 기택, 충숙의 침투 과정은 하이스트 영화에서 등장하는 한탕 털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관객은 그 속도감에 있어서 가속도를 느끼게 되는데, 실제로 편집상으로도 기우>기정>기택>충숙 순으로 분량 면에서 호흡 조절을 한다. 실제로 충숙의 침투 시퀀스는 음악 몽타주로 그 속도감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게 부자집 털이를 하는 가난한 가족의 소동극(실제로 하이스트 물 같다고 바로 언급하면서 그런 장르적 기대감을 가질 관객은 극히 소수일 것이다)이구나 파악하고 받아들일 즈음이 소위 '믿음의 벨트'가 광광 울리며 <기생충>만의 장르 리듬을 뽐내는 타이밍이다.
하이스트 무비를 볼 때 관객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답답한 현실을 역전시킬 한탕이 기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작전을 수행하는 속도감과 치밀함이다. 관객은 여기서 대리 만족을 느낀다.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은 재벌이나 성공한 사업가가 아니다. 그 비율로 본다면 최소한 중산층과 서민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 관객은 현실 속에서 재화의 불균형을 지겹도록 체감하며 산다. 그렇다고 세상을 바꿀 힘이 있겠는가? 우리는 평범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선에서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대중의 심리 속에서 은밀한 욕망과 기대감을 끌고 가는 장르가 하이스트 영화다. 그래서 애초에 하이스트 무비의 전형적인 캐릭터는 평범한 일상 밖 범죄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관객은 맘 편하게 한탕 벌이를 응원한다. 이번엔 어떤 방식으로 은행을 털까? 어떤 사기로 놀라움을 줄까? 이 은밀한 욕망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야말로 모순이다. <기생충>의 전반부는 정확히 이 장르적 전형성(공식과 컨벤션, 아이콘)을 교란시킨다. 리듬으로 보자면 아예 하이스트 무비이지 않게끔 기대감을 다른 곳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일상적 캐릭터들이 궁극적으로 하는 행동은 하이스트 장르에서 볼 법한 사기와 일자리 강탈을 시도한다. 관객은 이제 마음 놓고 주인공을 응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래 범죄의 영역에 속한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적 캐릭터라고 착각하게끔 디자인된(어쩌면 교란된) 봉준호의 리얼리티 속 캐릭터를 볼 때 관객은 "저렇게까지 하다 큰일 나는 것 아닌가"하는 조마조마한 감정이 스며든다. 이 정도 되면 '독화력' 글에서 내가 언급했던 피드백을 들으면 봉준호 감독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 예상된다. “훅업(관객을 사로잡는 초반 설정을 부르는 용어)이 약해요. 고작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집안이 힘들다는 이유로 사기를 치는 주인공에게 관객이 몰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피드백 말이다. 애초에 그렇게 디자인된 새로운 세대의 GPU칩을 들이미는데, 왜 칩이 전 세대 같지 않아요, 하는 꼴의 피드백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이런 장르적 교란을 포착할 수 있는가?
- 다음 글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