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진행이 훌륭한 음악을 만들지 않는다
“차기작은 어떤 작품입니까?” 유명 앵커가 묻는다. “서울에서 일어나는 호러물을 쓰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웨스턴을 쓰고 있습니다.” 촉망받는 감독이 대답한다. 여기서 ‘호러’, ‘웨스턴’이 우리가 부르는 장르라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대체 장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대로 답하기가 쉽지 않다. 호러는 '공포'라는 감정을 기준으로 분류된 반면, 웨스턴은 '서부 개척시대'라는 소재로 분류된다. 부르는 기준조차 일관성이 없다. 부르는 이름의 기준조차도 일관성이 없는 여러 분류를 묶어서 우리는 장르라고 부른다. 학술적으로 장르가 어려운 분야인 이유는 이런 복잡성과 다양성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만났던 감독 중 한 명은 범죄물이 장르냐고 되묻기도 할 정도로 산업 내에서도 장르에 대한 기준은 제각각이다(그 감독의 기준은 묻지 않았으나 질문의 의도는 범죄물을 장르로 볼 수 없다는 게 분명했다. 물론 나는 그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빈번하게 쓰는 말이 장르지만, 정작 장르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스스로의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한때 장르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했던 방식은 장르의 3요소를 소환하는 것이었다(물론 지금도 장르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꼭 이해해야 하는 방식이다). 장르의 3요소는 흔히 장르의 공식, 관습, 아이콘으로 분류한다. 특정 장르에는 그 장르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공식이 있는데, 예를 들어 경찰물의 공식은 '영웅적 경찰이 사건을 맡아 장애물을 극복하고 악당을 검거한다'는 구조다.. 이런 영화들에는 관습적으로 표현되는 설정이나 표현 방식이 있는데 보통 그것을 장르의 관습이라 부른다. 검거한 범인이 거대한 악당을 쫓기 위해 단서를 제공하는 표현같은 것들이 경찰물의 관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장르의 역사 속에서 관객들이 즐기다 못해 지겨워진 관습적 표현들이 흔히 우리가 ‘클리셰’라고 부르는 것이 되곤 한다. 한편 누적된 장르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캐릭터가 탄생하는데, 그게 바로 장르의 아이콘이다. 90년대 경찰물의 아이콘이 <투캅스>의 안성기와 박중훈이었다면, 2000년대에 <공공의 적> 설경구를 지나 우리는 <베테랑>의 영웅적 서민경찰 황정민과 <범죄도시> 속에서 범죄자를 맨 손으로 때려잡는 마동석 같은 아이콘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캐릭터의 이름보다 배우의 이름을 사용한 이유는 관객이 사랑한 아이콘은 배역인 동시에 그 배역을 소화한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이콘은 스타시스템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 장르의 본질은 따로 있다. 물론 장르의 공식, 관습, 아이콘은 장르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래도 본질에 가 닿지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도대체 장르가 뭔데? 차기작을 묻는 앵커의 물음과 장르의 3요소 속에는 본질적인 뭔가가 숨겨 있다.
우리는 장르를 생각할 때 자꾸만 진공 상태의 개념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핵심은 장르는 단 한 번도 진공 상태인 적이 없다. 앵커가 유망한 감독에게 차기작을 물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건 ‘관객’이 그 감독에게 갖는 ‘기대감’ 때문이다. ‘봉준호가 만드는 로맨스’ 어떤가? 이 표현은 그 자체로 상당한 기대감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 봉준호 로맨스를 만들었다고? “봉준호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이 말의 뉘앙스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장르의 공식이란 무리한 말이 왜 생겼겠는가?(공식이란 말은 분명 무리한 말이다.) 그건 관객이 일련의 비슷한 진행 과정을 갖는 이야기에 열광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관습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에는 애초에 ‘오랫 동안 지켜 내려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다. 장르의 아이콘은 곧잘 스타가 된다. 그 사람을 보려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관객은 엄청나게 많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마동석’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모든 것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장르의 실체는 관객이 가지는 ‘기대감의 다발’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캐릭터를 보면 생기는 예상과 기대가 있다. 편견 없는 사람도 사람을 스테레오타입으로 구분하고, 그 사람의 다른 면모를 보면서 예상과 기대를 벗어나는 재미를 느낀다. 그런 순수한 기대감의 단위 만큼이나 영화와 드라마의 역사를 통해 누적되어 온 기대감의 묶음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걸 ‘장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분류의 기준이 소재이든, 인간이 가지는 감정이든 그건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이것이다. 관객에게 비슷한 흐름의 공통된 기대감이 생기면, 콘텐츠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장르라고 불러왔다. 비유하자면 장르는 대중음악의 코드 진행이다. 그리고 더 작은 단위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캐릭터, 사건 등—은 멜로디가 될 수 있는 개별 음정이다. 본질은 기대감이다. 기대감의 다발이 관객과 관계가 생겨서 장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지, 결국 장르 안에는 하나 하나의 기대감이 묶여 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음악의 코드진행이 창작일 수는 없듯이 장르의 공식이나 관습, 아이콘적 캐릭터를 제시하는 것 자체가 창작이 될 수는 없다. 그건 표절도 아니다. 음악의 샘플링 기법처럼 단위를 쪼개 개런티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면 장르는 공유재 자산이다. 그러므로 시나리오를 쓰고 읽는 기준이 장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업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쓰고 읽는 독화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 산업적 관점에서 투자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장르 이해와 대중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장르 이해에 그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건 결국 애초에 이야기의 기대감이라는 기초 단위이지만, 콘텐츠의 역사를 통해 일정 정도 묶음이 되어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안에 요소들을 가지고 어떤 변주를 주고, 어떤 멜로디와 조합했는가를 읽는 능력까지 나아가야 창작과 기획의 관점에서 독화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당신이 프로듀서라면, 뻔한 코드진행 속에서 작곡자만의 멜로디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작가나 감독이라면, 뻔해 보이는 코드진행에 어떤 변주를 줄 수 있는까? 내가 쓰는 시나리오 속 특별한 멜로디는 무엇일까? 자문해야 한다. 어쩌면 비슷한 코드 진행이 나오는 곡이면 이 곡이나 저 곡이나 똑같네 라며 상투적인 감각으로 시나리오를 보고 있지는 않나? 어차피 똑같은 코드진행인데 대충 공식 대로 얼버무리면 되지 않겠냐며 클리셰를 덕지덕지 쓰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비극은 없어야 한다. 그런 태도가 정말 위험한 것은 서서히 창작자와 기획자를 잠식시킬 뿐만 아니라, 산업 자체를 잠식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상업영화, 상업드라마라는 틀 안에서 장르물을 쓴다는 것은 기대감의 다발을 가지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재구성한 기대감의 다발과 작가만의 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건 결국 관객이 가지는 기대감의 자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 다발을 어떻게 다시 디자인할 것인가? 나만이 들려줄 수 있는 멜로디는 무엇인가? 시나리오의 한 요소, 한 요소를 그런 순수한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아마추어를 벗어나 제대로 시나리오를 쓰고 읽을 줄 아는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