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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인간만의 전유물일까

잘 말하고, 잘 들으려면

by 딱정벌레
사진=유유

최근 유유 출판사에서 나온 '듣는 법, 말하는 법'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듣는 법, 말하는 법을 다뤘다. 마지막 장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대화의 역할'을 정리했는데 새벽에 읽고 좋았다. 대화는 식사와 수면처럼 지극히 일상적 행위라서. 물론 '대화 잘하는 법'을 다룬 콘텐츠가 많지만- 이를 따로 배우거나 숙고할 일이 많지 않았다.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 어떻게 말을 꺼낼지 또는 인간관계를 다룬 책을 읽을 때 자연스레 접하기는 하지만.

저자는 대화가 인간만의 전유물이라고 본다. "대화는 인간다운 행위이고 인간과 동물, 인간과 기계를 근본적으로 구분 짓는 인간 활동"이라는 것. 데카르트도 이런 인식을 드러냈다고 한다. 여러 동물 가운데 인간만 소통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소통은 정신과 정신이 만나 서로 이해와 생각, 감정과 소원을 나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고. 이 과정에서 의견을 합칠 수 있고 이견을 유지할 수도 있다. 이게 교감인데 다른 동물이 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한다.

정리하면 대화는 교감에 기반한 인간만의 고유한 소통 행위라는 것. 난 여기에 의문이 있다. 난 동물이 말을 못 해도 정말 교감에 따른 소통은 못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동물학자 분석을 봐야겠지만. 비언어 행위로도 교감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의견도 조율하고? 동물마다 다르긴 할 것 같은데- 기계도 마찬가지다. 기계도 인간과 소통한다. 아직 그들이 인간 수준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계산기일 뿐. 기계는 꼼꼼히 학습하고 치밀하게 계산한다. 그렇게 교감을 흉내 내고 인간과 대화한다.

사진=픽사베이

인공지능 비서는 사람 대화방식을 따라 한다. 사람처럼 부가 질문을 던지며 사람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자연어를 주고받고, 더 똑똑한 AI는 공감하는 척이라도 한다. 감성 챗봇처럼. 기계가 실제 교감하는 건 아니고 연기하는 셈이니 이를 대화라고 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만. 동물보다는 최대한 인간끼리 대화에 가깝게 연출하고, 말을 이해했음을 드러내고, 거기에 맞는 답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데- 기계는 교감하지 않아도 사람은 기계와의 대화에서 교감할 수도 있다. 이걸 대화라고 못 볼 이유는 없지 않나 싶다. 대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람끼리 대화할 때도 교감하는 척할 때가 있다. 상대방 말이 공감가지 않지만 그걸 티 내기는 그렇고. 사실 집중하지도 않는데 듣는 척해야 하고. 영혼 없는 리액션이 나오는 지점이다. 또는 사람과 대화하는 데 기계와 대화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자기 할 말만 하거나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교감을 할 여력이 없을 경우. 이런 경우, 사람끼리 소통했다고 해서 그걸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물질을 사고할 수 없다고 봤다고 한다. 사고할 수 있지만 그걸 안 하는 사람도 있다. 사고하지 않는 인간의 영혼 없는 대화는 뭐라고 봐야 할까.

이 부분을 읽으니 기계가 인간 수준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또는 사고하는 척하도록 고도화하는 이들 생각도 궁금해졌다. AI 글을 쓰다 보니 인간과 기계 소통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현재 글을 납품하는 회사에서는 '인간과 기계의 지식 소통을 돕는다'는 의의를 내세운다. 컴퓨터 비전, 자연어 처리, 음성인식 기술을 보면 확실히 그게 와 닿는다. 인간과 기계 소통은 더 늘어나고 있구나. 인간보다 기계와 소통할 일이 더 많겠구나. 소통을 정말 잘해야겠구나. AI가 더 많이, 더 빨리 공부하거나 적은 데이터로도 학습 효율을 높여야겠구나.

사진=픽사베이

인간과 기계 소통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대라는 생각이 드니- 저자가 말한 내용에 딴지 걸고 싶은 생각도 들고? 나도 기술을 잘 아는 건 아니다. 저자가 기술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도 모르겠다. 평소 기계와 어떻게 소통하는지도 모르고. 그러나 기술을 더 들여다보고, 여러 대화 셋을 돌리면 다른 생각도 들지 않을까. 요즘은 자주 하지 않지만- 몇 개월 전에 챗봇 글을 여러 번 쓰다 보니 AI와 자주 대화했다. 대화 주제도 다양했고. 어차피 연기하는 거니 감정 이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만. 계산된 교감은 있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기계와 대화할 수 있다'라고, '이미 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라고 판단했다.

대화가 인간만의 전유물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그 외 내용은 배운 점이 많았다. "교감이 영혼을 결합시켜준다"거나, 부부관계에서 대화 의미나, 토론의 중요성, 대화와 말하기를 다룬 주옥같은 어록이 그랬다. "대화로 정신과 정신이 만나고 지적으로 교감하는 게 가장 고귀한 유형의 우정"이라거나, "공공 토론과 정치 논쟁의 질을 높이려면 전체 시민이 받는 학교 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거나, "토론의 질을 높이려면 시민이 양방향 대화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만큼 말하고 듣는 노력을 키우도록 해야 한다" 등. "정부의 기틀이 되는 기본 정치사상과 원칙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야 한다"라는 말도.

여담이지만 난 살면서 말하기를 체계적으로 배운 경험이 별로 없었다. 어릴 때는 어른들이 하는 말, 오디오북이 컸지만. 웅변학원을 다닌 적도 없다. 말하기를 정규 교과과정에서 배운 건- 초등학교 1학년 때나 대학교 2학년 때 '정치와 수사' 수업을 들을 때였다. 돌아보니 토론 수업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수업에서 비중이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대학에서는 항상 발표하면 질문을 하거나 받고, 특히 보너스 점수를 받으려면 질문을 위한 질문도 하다 보니 질의응답 형식의 토론에는 익숙했던 것 같다. 언론사 입사 스터디할 때, 스터디원끼리 서로 글을 피드백하다 보니 그 과정도 토론과 비슷하고.

사진=픽사베이

토론 면접 준비도 했지만 그건 자주 하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오랜만에(?) 토론 수업이나 토론 스터디를 할 때, 말하고 듣는 교육이 부족했을 때 문제점을 조금씩 경험하는 것 같다. 토론 프로그램을 보거나 인사청문회, 국정감사를 볼 때도 겪는 일인데. 핀트에 어긋나는 말을 할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중간에 자르는 경우도 있다. 일단 화부터 내고 소리 지르는 경우도 없잖아 있고. 굳이 교육하지 않아도 예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의견이 달라도 대화로 서로 이해하고 의견차를 좁혀가는 경험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핵심은 갈등을 조정하는 건데 그런 경험이 많지 않으면 토론이 벽치기 느낌이 들지도.

돌아보면 대학 시절 들은 '정치와 수사' 수업은 좋았다. 말하기 방법을 배운 건 아니고-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실린 페리클레스의 장례 연설이나 키케로 연설을 배우고. 조별 과제로 역대 대통령과 유망 정치인 연설을 토대로 그들의 수사를 분석, 발표했다. 정치인이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말하는 방식과 그 이유를 분석해서 유익했다. 이 책에서는 '토론'에 대한 키케로 어록을 소환해서 반가웠다. "논란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토론이요, 다른 하나는 무력이다. 전자는 인간의 것이되 후자는 짐승의 것이나, 전자가 실패할 때에만 후자에 의지해야 한다."

마키아벨리 어록도 나온다. "싸움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법을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인간의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짐승의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방법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두 번째 방법에 의존해야 한다." 존 로크도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사람 사이의 다툼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법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력에 의한 것이다. 둘 중 하나가 끝나면 반드시 다른 하나가 시작되는 법이다."

사진=픽사베이

이 책에서는 국제무대에서 대화 중요성을 이야기하다가 세 사람의 어록을 언급했다.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었다. 사람이라면 품격을 기대하기 마련이고, 대화가 그 요체라는 의미로 난 이해 했다. 그러나 법=대화=토론으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싶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과정도 대화, 토론을 거치기는 한다. 그러나 집행 주체를 생각하면 특정 집단에 권한이 집중됐다는 점에서 대화와 토론이 그들만의 리그에 그친다는 생각이 든다. 난 정치가 말과 대화, 토론 영역에 가깝다고 봤다.

정치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헌법소원 제기로 사법당국에 맡기는 사례가 종종 있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그랬고. 정치보다 법이 상위에 있다고 보고, 헌법재판소 판단을 더 권위 있게 보는 인식이 반영됐다. 그 배경은 이해하지만- 정치인 특히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자치단체장과 달리 법관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특징이 있다. 정치로, 토론으로 조정해야 할 갈등을, 전 국민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적 사안을 소수 엘리트 법관 판단에 맡기는 게 얼마나 민주적이냐고.

예전에 전공 수업 시간에 그런 주제로 공부를 했다. 전공생의 편향된 생각일 수 있지만 그 생각도 공감이 갔다. 물론 헌법재판관도 자기들끼리 토론하겠지만. 정치에서 대화와 토론으로 조정이 어려우니 법에 판단을 맡기겠지만. 이게 일상화되면 정치에서 대화와 토론으로 접점을 찾아가려는 노력은 약해질 우려는 없지 않을까. 다만 이게 당연시되고 그게 정치 불신이나 혐오로 이어질 가능성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헌법재판소에서 이런 판단을 아예 하면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진=픽사베이

뭐, 그랬다. 그런 기억도 다시 떠올라서 책이 재밌었다. 딱딱한(?) 기술 이야기만 보다가. 20대 시절 공부하고 고민했던 주제를 다시 접하니 반갑기도 하고. 요즘 들어 그런 글을 좀 더 자주 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엔지니어를 위한 인문학'이라는 책과 지인이 이와 관련해서 말씀해주신 내용과도 연결되는데- 기술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데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기술은 공허하다고 할까. 기술이 삶의 편의를 해결해주는 걸 넘어서 인간의 생각과 감정도 고려해서 개발돼야 세상에 의미 있고 필요성도 와 닿겠다 싶었다.

어렵게 활자로 옮겼지만 말 더럽게도 못하네. 그렇다 보니 인문학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기변명'인 사회과학도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상에 익숙한 건 심리학이지만- '사회학'이나 '정치학'을 다시 더 보고 싶었다. 그래서 '사회학 공부의 기초'를 읽었는데 이 책도 너무 좋았다. 나중에 리뷰하겠지만.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콘텐츠를 쓰고 싶어서. 내 안에 인간미(?)는 말라가고 서늘한 쇠붙이가 늘어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듣는 법, 말하는 법'은 이를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런 맥락에서 예상치 못한 유익을 얻었다. 이 책은 리디셀렉트에도 올라왔다. 난 사서 봤는데. 유유 출판사에 좋은 실용서가 많아서 많이 업데이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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