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나니 미화되는 스위스 여행 1일차
로잔, 베른, 루체른 한큐에 들르기
베른 아레강. 사진=딱정벌레의도한 건 아닌데 역순으로 여행 후기를 계속 쓰고 있다. 정확히는 역순은 아니지만- 북유럽을 서유럽보다 먼저 다녀왔기 때문. 지금까지 내가 어학연수, 여행, 출장 등을 이유로 방문한 국가는 호주, 홍콩, 마카오, 중국, 베트남, 오키나와(일본이지만 본토와 다르다고 생각),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등 16곳이다. 사진만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뿐 후기를 작성한 적은 별로 없어서 브런치를 운영하는 동안에는 뒤늦은 회고라도 계속 쓰려고 한다.
가장 기억이 생생한 순서대로 쓰다 보니 비교적 최근 몇 년 새 갔던 곳을 중심으로 쓰고 있다. 세 번째 후기는 서유럽 여행이다. 내 생애 가장 많은 나라(?)를 가본 게 2018년이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처음 몇 년은 휴가를 길게 내지 못했다. 연차가 짧기도 했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괜히 눈치가 보여서 길게 낼 엄두를 못 냈다. 평일에 3일 내서 주말에 붙여 쓰는 정도? 그나마 길게 낸 건 4년 차가 됐을 때. 다른 선배들처럼 일주일을 통으로 내서 주말 4일 붙여서 유럽이라도 다녀올 짬이 생긴 건 그때였다.
그 전에는 국내 여행을 가거나 일본처럼 가까운 나라만 갔다.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는 출장을 핑계 삼아 현지를 짬짬이 구경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른 출장에 비하면 그 출장은 생각보다 여유가 많은 출장이었다. CES나 MWC, IFA 같은 데 출장 가는 동기들은 정반대인 시차에 정말 개고생 하다 왔는데- 내가 다녀온 출장은 그런 대규모 행사 취재는 아니라서 그런지 되게 힘든 건 아니었다. 약간 찔린다 싶을 정도. 암튼 그랬는데 유럽을 가본 건 30대가 넘어서였고 시간이 있을 때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가보고자 했다.
로잔. 사진=딱정벌레서유럽에 간 건 2018년 8월 말에서 9월 초였다. 퇴사하고 한 달 지나서였고. 여행 다녀오고 나서 극적인 일이 많았다. 갑자기 이직하게 돼서 10월 초부터 출근했고, 그 사이 집안에 큰일이 있었다. 이직하기에 좋은 시기는 아니었는데 일해보고 싶었던 곳에 채용공고가 떴고 내가 직장이라도 다니는 게 그나마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당장 이직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말도 있었는데 그 상황을 견디는 게 너무 힘들었으나 이직 스트레스가 다른 스트레스를 견디는 데 도움됐다. 다시 돌아가도 그 선택을 할 것이다. 입사 시기는 늦추겠지만.
돌아보면 서유럽 여행은 마냥 즐겁지만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여행하는 동안 좋은 일도 있었지만 불쾌한 일도 있었고. 무엇보다 돌아오고 난 뒤 있었던 큰 일 때문에 내가 거기에서 즐겁게 지낸 시간조차 죄책감이 들었다. '그럴 필요 없다'는 말도 들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할 때, 그 아픔을 곁에서 함께 나누지 못했을 때, 부끄럽다. 그러고서 내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 여행 기억을 되짚는 게 마음이 쉽지 않지만 일단 꺼내보고 좋은 기억만 되새겨보려 한다.
스위스에 여행을 간 건 서유럽 여행 4일차 되는 날이었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로잔까지 갔다. 로잔에는 올림픽 위원회가 있고 역 밖에 나와보니 바로 근처에 건물이 있었다. 내게 로잔은 뮤지션 루시드폴이 유학한 곳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루시드폴이 지금으로 치면 아재 개그를 잘하는 데 스위스에서 공부했다고 '스위스 유머'라는 수식어가 곧잘 붙곤 했다. 누군가는 '스위스 유머로 미화한다'라고 장난조로 문제 제기하기도 했는데 내겐 로잔은 그런 이미지로 남았다.
로잔 첫 이미지는 특별할 게 없었다. 때는 9월 초라서 아직 더울 때인데 체감상 그곳은 서늘하다 싶었다. 스위스에서 갔던 곳들 다 그랬다. 융프라우는 이루 말할 것도 없을 테고. 로잔 날씨는 화창했다. 하늘도 푸르고 구름은 좀 있었지만. 이날 베른과 루체른에 갈 예정이라서 지체 없이 바로 이동했다. 베른에 도착할 때는 날이 흐렸다. 루체른도 그랬다. 비가 왔는지는 모르겠다. 베른에서는 중간중간 날이 맑을 때도 있었는데 일정하지는 않았다. 참고로 베른은 스위스 수도이다.
베른에서는 도보로 아레강을 보고 마르크트 광장을 지나며 시계탑, 베른 연방 궁전을 구경했다. 베른 대성당, 아인슈타인 하우스도 가다가 보고. 그날은 일요일이라서 문 닫은 상점이 많았다. 원래 인구가 적은 지, 도시가 커서 그런지 번화가에 왔는데도 무척 조용하고 한적했다. 물론 관광객은 많았다. 사진을 다시 보니 심심한 그 풍경도 멋졌다 싶지만. 베른 연방 궁전 근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을 풍경도 괜찮았다. 동화책이 나오는 집 같다고 해야 하나. 길가에 트램이 다니는 풍경도 운치 있었고. 아직 문 열지 않은 노천카페도 멋스러웠다.
사진 2번 시계탑, 4번 아인슈타인 하우스, 7번 스위스 연방궁전. 사진=딱정벌레 베른과 루체른에서 인상 깊었던 건- 건물에 그린 그림이었다. 모든 건물이 그런 건 아니고 약국이나 특정 업종 시설이 입주해있는 건물에는 그 가게를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예를 들어, 약국이라면 약국 그림이 그려진 셈. 또 건물마다 창 아래를 꽃으로 장식했는데 그것도 돋보였다. 건물뿐만 아니라 동상 주변에도 꽃 장식이 많았다. 날은 흐린데 선명한 색상의 꽃을 보니 대비가 확실히 되는 느낌도 들었다. 특별한 유흥거리는 없지만 차분하게 돌아보고 걷는 시간이 좋았다.
루체른까지 이동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동차로 1시간 조금 더 걸리니까. 루체른도 특별한 일정이 있지 않았다. 여기서 유명한 게 '빈사의 사자상'인데 그걸 보고 카펠교를 보며 주변을 걷는 정도. 빈사의 사자상은 덴마크 조각가인 베르텔 토르발센이 설계하고 루카스 아호른이 조각했다고 한다. 이 조각상 의미는- 프랑스 대혁명 사진 8월 10일 사건 때 튈트리 궁전을 사수하다 전멸한 라이슬로이퍼 장병을 추모하는 거라고. 루체른 대표 상징물이라서 스타벅스 유아 히어 에디션 루체른 머그에도 그려져 있다.
사진 7번 빈사의 사자상. 사진=딱정벌레멀리서 떨어져서 보기는 했지만 사자를 굉장히 정교하게 묘사했다 싶었다. 쓸쓸한 느낌도 들고. 호랑이는 거세고 무서운 느낌이 드는데- 사자는 나른하고 덩치에 비해 힘이 세 보이지 않는다 싶다. 내 편견이지만. 조각상에 담긴 의미 때문인지 더 비감한 느낌이 들고. 이어서 카펠교로 이동했는데 이는 현존하는 유럽 목조 다리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1333년에 세웠다고 한다. 천장에 판화 작품이 걸려 있다는데 정작 난 그건 잘 보지 않고 다리 건너면서 사진 찍기 바빴다. 다리 위에 깔린 지붕과 바깥에 있는 꽃 장식이 기억에 남는다.
여기는 야경이 좋다고 하는데 오후에 잠깐 머무느라 그건 볼 수 없었다. 대신 카펠교를 건너면서 바라보는 루체른 시내 풍경이 멋져서 그 재미는 쏠쏠했다. 주변에 스타벅스가 있었는데 난 여기서 스위스 머그를 샀다. 시티 머그를 살까 했는데 오슬로 머그처럼 파란색이 주요 색상이라 겹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머그도 예뻤는데- 특히 머그에 그린 빈사의 사자상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데. 스위스 머그는 색상이 다채롭고 물감, 시계 등 스위스 상징물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어서 그때는 그게 더 흡족했다.
유아 히어 에디션 머그가 네 가지 있다. 오슬로, 스위스, 옥스퍼드, 스코틀랜드 버전. 스코틀랜드 버전은 에스프레소 머그라서 작다. 원래 맨체스터 버전도 있었는데 지난해에 실수로 깨서 버렸다. 눈물을 머금고. 사진은 많이 찍어뒀다만. 머그 살 때 기준이 있다면- 사실 요즘은 직구 대행으로 이걸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배송비나 세금이 많이 붙어서 현지에서 사는 게 더 싸다. 물론 나라마다 물가가 달라서 영국 같은데서는 비교적 보통 가격에 살 수 있지만 노르웨이와 스위스에서는 컵이 비싸다. 2만원을 넘어가니.
그래서 그런지 국내에 직구 대행으로 파는 유아 히어 에디션 머그 가운데에는 노르웨이나 스위스 버전은 잘 없었다. 영국, 미국 등 가격대가 그 나라 버전보다 비교적 낮은 건 많은데. 물론 영국도 지역별 머그는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이왕 살 거면 여행 간 지역에서 그 지역 머그를 사는 게 낫다 싶다. 국가 머그는- 너무 광범위하고 뭉뚱그린 느낌이 들고, 지역 머그는 지엽적이면서 지역 특색이 잘 담겼으니까?
루체른 시내를 둘러본 뒤, 숙소로 이동했다. 다음 날 융프라우에 갈 예정이라서 인근 지역으로 갔다. 인터라켄이었나 헷갈린다. 숙소는 산장 같은 곳이었는데 여행 4일간 묵은 숙소 중 가장 편하고 마음에 들었다. 화려하지 않은데 주변이 고요하고 내부가 깔끔했다. 이런 곳에 오래 머물면 좋겠지만 다음 날 새벽 일찍 나가야 했기 때문에 지내는 시간은 짧았다. 숙소에 있다가 밖에 나와서 컵라면 먹는 다른 일행과 짧게 대화하다 다시 들어갔다. 제주도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어두운 시간인데도 교회 건물까지 보고 왔다고 해서 용감하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