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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정벌레 May 02. 2021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가 가르쳐준 글쓰는 마음

"네 머릿속에 이야기만 몇천 개야. 왜 없는 이야기를 찾아"

사진=픽사베이

한 달여 전부터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OST를 다시 듣고 있다. 이 작품을 관람한 지 1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OST가 따로 있는 줄 미처 몰랐다. 지난번 공연이 국내 초연 10주년이었던지라 기념으로 앨범을 냈더랬다. 작년에도 브런치에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동안 내용을 많이 잊었다. 구체적인 줄거리도, 대표곡도. 그러다 한 선배의 모바일 메신저 프로필을 계기로 OST 존재를 접했고, 다시 들어보고 싶어서 듣기 시작했다가- 한 달이 지나서도 플레이리스트에 간직하며 사골 우려먹듯 듣고 있다.

보통 새로운 곡에 매료돼서 무한 반복하며 듣다 보면 치사량을 넘어서서 금세 질리기 마련이다. 그러다 오랜만에 다시 들으면 귀에 착 감겨서 미친 듯이 반복하고- 태연의 Time Lapse도 그중 하나이다. 얼마 전 울림 엔터테인먼트의 '울림 더 라이브'에서 러블리즈 케이가 이 노래를 커버했다. 난 태연 버전이 좋지만 케이도 잘 불렀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이곡 감회에 젖어서 요즘 타임 랩스를 자주 듣는다. 이게 오늘 주제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데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OST는 아무리 반복해도 지겹지 않다. 아직까지 듣고 있는 걸 보면.

지난 3월 말이었다. 뮤지컬 '더픽션'에서 커튼콜 촬영을 허용해준 공연이 있었는데- 인스타그램에 영상이 많이 올라왔다. 덕분에 나도 오래간만에 공연 주제곡을 다시 듣고, 유배우도 한번 더 보고. 같은 배역을 연기한 다른 배우들의 공연도 짧게나마 보고. 그러면서 공연의 감동을 되새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다가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음악도 공연 본 지 1년여 만에 다시 듣고 싶었고(OST 존재를 알게 되면서), 그때 그 감흥을 곱씹어보고 싶었다. 노랫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는데 1년 여 전 공연장에서 들었을 때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사진=오디컴퍼니

내가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OST를 정주행 하면서 조금 놀랐던 건- 이 뮤지컬 수록곡은 대부분 '글쓰기를 노래한다'는 점이었다. 내용 특성상 어쩔 수 없기는 하다. 주인공인 톰은 동화 작가이고, 앨빈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준 친구다. 그의 집은 서점을 운영했고.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노출되고, 이야기 힘을 믿으며 성장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내용 곳곳에 글쓰기 이야기가 배치됐고, 노래에도 작가 고충, 글 쓰는 마음을 담은 가사가 많았다. 공연장에서는 그런 노랫말이 귀에 꽂히지 않았는데 OST를 따로 들으니 비로소 귀에 박혔다.

글쓰기 이야기가 이 뮤지컬 노랫말에 담기는 건 당연하지만- 이와 별개로 '글쓰기를 노래한 노래가 있다'는 사실은 독특했다. 세상에 그런 노래가 원래 있었을 수 있지만 난 이런 노래를 처음 접했으니까. 보통 노랫말은 사랑 노래나 상념이나 분노, 사회비판 등이 많은데. 글쓰기만 겨냥해서 가사를 쓴 노래는 드물다는 게 내 편견이었다. 그런 노래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가사를 뮤지컬에서 노래로 접하니 신기했다. 작업 과정에서 공감 가는 내용이 많아 와 닿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일곱 살 때부터 오랜 친구죠
좋은 형제 같은 그런 친구 그랬었죠
아는 걸 써 톰 아는 대로
('Write What You Know' 중에서)

천팔백칠십육 년 자동차도 없고
라디오나 티비 영화 다 없던 때였죠
또 지금은 없는 병들도 많은 때였는데
그때 누가 쓴 이야기를 우린 아직까지 읽어요

천팔백칠십육 년 화장실도 없었고
또 지금과는 엄청나게 달랐었대요
매일매일 새로운 과학 기술이 나와도
그 옛날에 쓰여진 글이 살아 있어요

난 책은 그저 글씨뿐이라고 생각했죠
근데 이 책을 읽을 땐 톰 소여가 보여
한번 나타난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아
긴 세월을 넘어 영원토록 남아있어
언젠간 이런 얘길 쓰는 게 내 꿈이죠

천팔백칠십육 년 작은 촌에 살던
한 사람이 이 모든 모험을 적었죠
그 모험들에 숨을 불어넣어줬기 때문에
칠십육 년은 칠십오 년 보다 더 훨씬 좋았어요
('1876'년 중에서)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프레스콜. 출처=유튜브

'1876년' 가사는 이야기 의미나 가치를 추상적으로 전달하고 있지만- 라디오, TV, 영화처럼 역동적인(?)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적 배경을 밝히면서 그때 최고 엔터테인먼트인 '이야기' 의미를 이야기해서 노랫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특히 '책이 글씨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아있다'는 점, 작가인 톰은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게 꿈'이라는 점, '작가는 이야기로 숨을 불어넣는 사람'이라는 점, '이런 이야기 가치 덕분에 최신 문명이 발달하지 않아도 이야기만으로 그 시절을 충분히 좋았다'는 점.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사람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또 모든 콘텐츠는 말과 글에서 시작하고. 아무리 이를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웹툰 등으로 구현하더라도 텍스트 작업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모르겠다. 그림 그리기와 스토리텔링이 모두 되는 작가라면 동시에 시작할 수 있겠지만. 2019년 3월 애플 서비스 이벤트에서 팀 쿡 기조연설 가운데 'TV+' 발표 내용을 좋아한다. TV 의미를 밝히기도 했지만 그가 이야기 의미도 설명했는데 그게 시간이 지나서 곱씹어봐도 내용이 좋았다.

우린 지난 10년 동안 여러분 아이팟에
바로 내려받을 수 있었던 첫 TV쇼에서
혁신적 TV 경험을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동급 최강의 영화 화질과
오늘날 애플 TV 4K의 사운드 퀄리티를 적용했죠

우린 TV를 사랑해서 이런 일을 했습니다
TV는 엔터테인먼트 그 이상입니다
문화적이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죠
사랑하는 사람과 공유할 수 있고요

예전보다 TV를 보는 경로는
다양하고 선택지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시작할지 잘 모르죠
우리가 애플 TV 앱을 만든 이유입니다

애플 TV 앱 비전은 당신이 좋아하는
쇼, 영화, 스포츠, 뉴스를
모든 기기에서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볼거리를 찾는 시간을 줄이고
즐기는 시간을 더 늘릴 수 있죠
우린 TV 경험에 공헌할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린 창조의 힘을 깊이 믿는데요
우리 상품(TV+)은 사람들이 창의성을 표현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이야기가 세상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TV+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을 촉진할 겁니다
2019년 3월 애플 스페셜 이벤트. 출처=유튜브

팀 쿡은 엔터테인먼트 그 이상 존재로서 TV 의미를 이렇게 밝혔다. '문화적이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 그러나 이를 볼 수 있는 곳은 많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볼거리를 찾고, 즐기는 데 시간을 더 투자할 수 있는 플랫폼을 선보이겠다는 것. 그러면서 TV와 창조, 이야기 연결고리를 짚는데 '이야기를 전달하는 통로'로써 TV 의미를 짚어서 좋았다. 브라운관 시대가 저물고 모바일 시대가 보편이 되면서 TV 의미도 퇴색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만 않다. 하드웨어에서 혁신할 여지도 여전히 있고, OTT를 이용해도 TV로 보면 더 실감 나고.

무엇보다도 '상징'으로써 TV 의미는 여전히 유효한데- 그게 바로 '창의성을 표현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창구'라는 의미다. 그 이야기는 살아숨쉬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이는 시청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거나, 통념을 깨거나,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하고, 성숙해지는 데 영향을 줄 수 있고. 이야기 힘이 이렇게 위대하다. 물론 그게 모두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건 아닐지 모른다. 이야기로 삶이 바뀌더라도 그게 TV에서 본 이야기는 아닐 수 있지만. 이야기가 멀리 왔는데 1876년 가사를 곱씹다 보니 팀 쿡 발언이 떠올랐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OST 가사에서 이야기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고. 노래를 점점 더 듣다 보면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 고충으로 내용이 심화되는데- 같은 성격의 콘텐츠를 만드는 건 아니지만 쓰는 사람으로서 공감 가는 노랫말이 많았다. 이걸 다시 들을 때는 또다시 마감 터널을 걷던 때였다. 디지털 휴먼 작업 이후, 슬럼프가 왔다. 다른 주제를 정했지만 디지털 휴먼보다 시시해 보이고 내용 전개 방향에 고민도 들었다.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우아'할만한 지점을 찾지 못했다. 자신감이 떨어지고.

사진=픽사베이

그때 밤마다 산책하면서 이 OST를 들었다. '기술로서 글쓰기'를 노래하는 이야기나, '곧 다가올 마감이 걱정이 된다'는 톰의 고백 등을 노래로 접했다. 그걸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내가 예술하는 것도 아니고 실용적 글쓰기를 할 뿐인데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뭘 그리 고민하나' 싶었고. '글쓰기는 기술이니 난 공장 인부나 정비공처럼 일정한 패턴대로 글을 고치고, 개선하며 작업하면 될 일'이라고 자신을 다잡아 보고. '나만 어려운 게 아니라 다들 똑같이 어려워해'라고 스스로 위로해보고.

느낌이 온다면 앨빈 시작인 거야 / 아 재미없어
스쳐가는 요만한 아이템 이걸 하나 잡는 거야 / 송이송이 눈 꽃송이
그러다 글 빨이 착착 오르게 되고 / 완전 착착 쌓였어. 위엔 눈가루 덮여 있고
이게 바로 창조의 예술 / 딱 저건데 / 이제 시작이야 / 아 좀! 나가자 나가자

쉿. 자 이때 잡지 못하게 되면 사라져 버려
뭔가 나올 때까지만 좀 기다려 시간을 줘 / 다 녹겠다
딱 꽂혔을 때 가만히 생각을 해봐
뭐라도 적어 놔야 하는데 백지잖아 / 고개 좀 들어 밖을 봐

작가에겐 항상 영감이 필요해
이 시골구석에선 써먹을 게 없어
좋아, 난 밖에서 혼자 우리 전통을 지키겠어
나이 좀 생각해라 / 종이 울릴 때마다 천사의 날개가 돋는다

아이템도 중요하지. 이제 시작일 뿐야
그다음엔 아웃 라인이 너무 중요해
여기서 바로 일류와 이류가 정해져
이때부턴 펜과 종이가 유일한 친구 / 난 천사 만들고 있지롱!

구성, 빈틈없는 글의 구성
줄거리 깎아 내고 반전을 넣고
그래도 한참 남았어

인내, 인내심 없으면 안 돼
여기부턴 예술보다는 기술이야
계속 수정해야만 해

기술, 머리를 채워야만 해
뭐 하나 잊지 않고 기억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나를 괴롭혀
결국 이야기는 과학이야

나 봐봐 톰! 나 좀 봐봐! 바지에 눈 들어갔다
눈송이 같아 앨빈. 손에 잡을 수 없어
바로 사라져 버려, 인생처럼

비켜라, 나 나간다! / 종이 울릴 때마다- / 닥치라! / 야호!
느낌이 딱 왔어 앨빈, 시작된 거야
이쪽에다 만들어 눈이 아름답잖아
곧 사라져 간다 해도 완벽한 천사로
좋아 그래 나쁘지 않아 이젠 비켜봐

이런 거 좀 해줘야 글 빨 오르는 거야
이게 바로 창조의 예술 나란히 보여
이제 시작됐어('Here's Where It Begins' 중에서)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OST 'Here's Where It Begins'. 출처=유튜브

이 노래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괜찮았다. 두 친구 우정도 여전할 때였고, 아이템을 잡아서 구성을 짜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업을 시작할 때 설렘이 느껴진달까. 마감 수렁에 빠지기 전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꼭 그렇지도 않지만). 내가 이 노랫말에서 배운 건- 인내심과 계속 수정하는 기술, 이야기는 과학이라는 점이었다. 글 쓰면서 어려울 때가 바로 이 지점에 있을 때인데. 인내하면 계속 수정해야 하는 걸 알지만 알아서 때로는 못하겠고, 하기 귀찮고, 미루고 싶고,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다.

문제는 그게 작업을 하면 할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그럴 때가 있다는 거다. 방법을 아는데 그 과정이 힘들고 버거우니까 또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 이게 트라우마는 아닌데 정신적 외상이 있을 때 그것과 관련된 모든 걸 피하고 싶을 때처럼? 글 쓰는 건, 콘텐츠를 만드는 건 스스로 소모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격한 작업을 하다 보면 뇌가 털리는 기분이 들고 넉다운 상태가 된다. 사실 정신력뿐만 아니라 체력으로 글 쓰는 거니까.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게 일상이면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난 언제나 이게 어렵다. 잘 못하기도 하고.

인내하기도 싫고, 수정하는 것도 마음 무거운데- 내가 하는 건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 필요한 일이고, 마술을 부리는 게 아니라 과학적인(?) 과정을 거치는 일인 만큼 순리대로, 원래 밟아야 할 절차를 충실히 밟는 수밖에 없다. 글은 엉덩이 힘으로 써야 하고, 글이 잘 안 풀린다는 핑계로 쉬고 딴짓할 수 있지만 그게 너무 길어지면 해야 할 일만 유예할 뿐이고. 일을 진척시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그 시간을 줄이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그 자리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고. 승부사 기질이 필요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건 전투 같다.

내기 싸우는 곳. 사진=딱정벌레

뼈를 때리는 노랫말이었다. 그리고 그 노랫말을 들으면 전의를 되살리지만- 언제나 '이 글을 완성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주제넘게 기술 콘텐츠를 쓰니까. 그렇게 전문적인 내용을 쓰는 것도 아니지만. 늘 두려움을 기본으로 깔고, 이게 완성도 높은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길 바라며 작업에 임하지만. 완성되기 전까지는 항상 걱정스럽다. 언제나 최악을 상상하는 버릇이 있고, 자신을 믿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다 늘 나쁜 결과를 예상하고 대비하는 게 더 익숙해진 까닭도 있고. 그래서 'I Like It Here' 가사가 와 닿았다.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
지금 할 것도 많고 바빠 죽겠는데
그래도 나는 우리의 시간이 필요했어
좀 복잡해 결정할 게 너무 많고
다가올 마감이 걱정도 되고
머리는 터지고 이건 아닌 거 같아
('I Like It Here' 중에서)

톰은 승승장구했다. 동화 작가로 성공했고, 유명 잡지사 기자 여자 친구와 약혼했다. 그 앞에 장밋빛 미래만 펼쳐질 것 같았지만 그 속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글쓰기가 생업이고, 생활인 그에게 늘 재미있는 글, 좋은 글을 써내야 한다는 건 잔인한 현실이었고. 어른의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미래는 불확실하고, 앞으로도 지금 같은 성공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걱정스러울 테고. 공허하고 불안한 마음 한 구석. 어린 시절 그 이야기에 영감을 주던 친구와 관계도 소원해지고(정확히는 그의 마음이 먼저 멀어졌을 테지만).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하이라이트 영상 모음. 출처=유튜브

이건 여담이지만- 지금 글쓰기를 노래한 가사를 이야기하다 보니 톰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앨빈 마음은 더 쓰라렸다. 그는 톰 이야기에 영감을 준 존재였지만 가업을 이어받아 서점에서 책을 팔며 톰의 그림자로 살았다. 글을 잘 써서 주목받고 출세한 건 톰이었다. 그가 작가로 성장한 건 톰의 노력 덕분이겠지만 온전히 톰의 개인기로만 성공한 건 아니었다. 이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인데- 삶은 레퍼런스의 레퍼런스이고, 우리는 거인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처럼 누군가의 콘텐츠, 아이디어에 빚지고 살아가니까.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노랫말을 보다 보면 앨빈의 상대적 박탈감이 엿보인다. 물론 그는 친구 톰의 성공과 성장을 축하해주고, 자랑스러워했다. 톰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둘 관계는 멀어졌다. 톰은 그에게 자기가 있는 도시로 초대도 했지만 귀찮고 부담스럽다고 느껴져서 갑자기 오지말라고 했고. 앨빈은 예전 같지 않은 절친과의 관계에 서운함을 느꼈다. 이것도 살면서 누구나 겪는 감정인 것 같다. 친하다고 생각했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친분 정도가 다르거나, 친했지만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한때는 내게 대단한 존재고 고마웠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내 인간관계 외연을 넓히면서 그 특별했던 존재가 시시해지고. 유치하다 느껴지고. 내 수준에 안 맞다는 생각도 들고. 자연스럽게 멀어지지만 실은 그러길 바라고 있고. 그걸 느끼는 상대방은- 못내 아쉽고, 서운하고. 내가 그에게 마음 썼던 게 다 무용해진 것 같고. 내가 좋아서 한 일이지만 어느 순간 후회되고. 상대방은 내 마음에는 관심도 없고 필요할 때만 활용하려는 것 같고. 난 물음표를, 상대방은 마침표를 주로 찍는. 자기 볼일만 보고 날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 같다 싶은.

사진=픽사베이

그걸 일방에게 탓하기 어려운 게- 관계는 상호보완적이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서운함을 안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난 내가 많은 걸 희생하고, 배려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을 수도 있고. 반대로 자기만 많은 걸 베풀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그를 먼저 서운하게 해 놓고 내 눈에 들보를 못 봤을 수 있지. 또 그가 아니라도 다른 인간관계에서 내가 누군가를 아쉽게 해 놓고 내가 누릴 건 다 누리고 살았을지도 모르고. 세상에 영원한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는 게 아닐까. 다들 상처를 주고받으며 사니까.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흘렀는데- 어쨌든 앨빈에게 감정 이입하면 그를 서운하게 한 톰이 얄밉지만- 톰에게 감정 이입하면 복잡한 머릿속과 벅찬 현실이 이해가 된다.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자부심이 되고, 마음에 여유를 주기보다 넘어야 할 장벽처럼 보이고- 넘지 못할까 봐 두렵고- 만회할 기회가 있는데도 지금 아니면 끝일 거 같고, 나에 대한 가치판단이 이걸로 인해 사형선고처럼 내려지는 건 아닐까, 그렇게 일희일비하고. 연락하는 사람들이 귀찮고, 때로는 가족조차 부담스럽고. 톰에게 공감하면서 한편으로는 위로도 됐던 것 같다.

난 톰처럼 자괴와 공감, 위로를 오가며 방황하다가 이 노래에서 어수선한 마음을 정돈했다. 'This Is It + Angels In The Snow'인데-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OST 마지막 곡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 'Butterfly'도 대표곡이지만 마지막을 장식하는 'This Is It~'이 주제의식에 맞닿는 곡으로 취급되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 뮤지컬에서도 이 노래 부를 때 무대 세트가 멋진데- 두 주인공이 종이를 휘날리는 장면이 있다. 하늘에서 눈 내리는 모습 같은데 환희도 느껴지고, 두 사람이 천진난만했던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도 들었다.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OST 'This Is It+Angels In The Snow'. 출처=유튜브
네 머릿속에 이야기가 몇 천 개야 톰. 왜 없는 이야기를 찾아?
이게 다야 이게 전부야 참 아름답지 않니
여기 봐 톰. 영원토록 그 폭포가 보여. 골인

아홉 살의 그림. 사춘기의 사진. 네가 소중히 간직한 이야기
잘 둘러봐. 네가 찾던 이야기. 잘 봐. 전부 여기 있잖아

그래, 알아. 뭔가 아쉽지. 정답을 바랬겠지
이게 다야. 근데 이제 좀 시원하지 않니
흘러간 틈새에 놓친 순간 속에 커다란 비밀이 있는 게 아냐
야 괜찮아. 네가 필요한 건 톰. 잘 봐. 전부 여기 있잖아

대따 많아. 네 얘기, 내 얘기
우리 둘 다 나오는 얘기
하나하나 골라서 적는 거야

이야길 적어. 아는 걸 써
둘러봐 우리의 평생의 이야기
이젠 숨 불어넣어줘

우리 이야기. 우리 이야기
살아나게. 살아나게
우리의 수많은 기억과 추억에
새 생명을 주는 거야
수천의 순간. 수천의 순간. 이야기로

지워지지 않고. 영원토록
웃음과 눈물로. 톰과 조지 함께
그려줘

너와 나 톰. 이게 전부야
참 즐거웠던 시간
근데 잘 봐 톰
사실은 이게 끝이 아니야

호수의 돌멩이 치는 물결같이
멈추지 않고 시간 너머 남아
네 몫이야
내 삶의 이야긴 다 네 것
둘러봐 톰 니꺼야

너와 나. 사랑과 인생 다
둘러봐. 전부야

그 날만은 믿었죠. 겨울 하늘의 마법 같은
우리 천사의 숨소리를. 흠. 이거 좋은데?

쌍둥이 천사 둘을 탄생시켰죠
아름다운 날개를 꿈꾸며
하루 종일 밖에서 겨울들을 보냈죠
드디어 완성됐을 땐 행복했죠

산 너머 해가 지고. 이게 다야, 톰?
산 너머 해가 지고 바지 속까지 다 젖도록
천사들의 춤 기다렸죠

찬 바람에 눈송이 흩날리고
나무 사이로 노랫소리 들릴 때
천사들의 영혼 깨어나
조각조각마다 살아나

마법처럼 눈 위로 떠 올랐죠
수천의 천사가 살아나서
수천 개의 이야기로
하나의 노랠 불렀죠

곧 바람에 눈 흩뿌려지고
우리 천사들도

크리스마스이브엔
크리스마스이브엔
하얀 눈밭에 누워
하얀 눈밭에 누워
천사들과 이별을 나눴죠
이별했죠

하지만 난 믿어요
계절은 변해 간대도
내가 부를 때면 살아나겠죠
부르면 내 곁에 네 곁에

겨울 햇빛처럼
나를 감싸는 마법처럼
그 어린 시절
바로 그때처럼
우릴 닮은 천사
모두 다
('This Is It + Angels In The Snow' 중에서)

This Is It은 가사를 곱씹을 때마다 늘 뭉클하다. 귀로 들을 때나, 눈으로 활자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갈 때나. 항상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울컥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게 내게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뭐가 잘 안 풀릴 때 극적인 해답이나 탈출구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 쉽지만- 생각보다 그런 건 없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조건 안에서 할 수 있는 것, 가능한 것. 그걸 찾아서 적용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흘러간 틈새에 놓친 순간 속에 커다란 비밀이 있는 게 아냐'라는 노랫말이 유독 그런 의미를 환기했다.

이와 별개로 가사도 무척 시적이었다. 아마 영어 가사를 번역했을 수도 있는데 원래 가사는 잘 모르지만 우리말로 가사를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문장도, 의미도 너무 아름답고. 앨빈처럼 가사가 어둠을 환히 밝혀주는 느낌. '호수의 돌멩이 치는 물결같이. 멈추지 않고 시간 너머 남아', '찬 바람에 눈송이 흩날리고. 나무 사이로 노랫소리 들릴 때. 천사들의 영혼 깨어나. 조각조각마다 살아나. 마법처럼 눈 위로 떠 올랐죠. 수천의 천사가 살아나서. 수천 개의 이야기로 하나의 노랠 불렀죠' 이 가사가 특히 그랬다.

극이 마무리되는 상황도 벅차게 했는데- 이 작품은 앨빈이 죽은 이후 상황을 역순으로 되짚는다. 두 주인공이 이 노래를 같이 부르는 상황은 앨빈이 세상에 없는 가운데 상상처럼 화해가 이뤄지는 모습이랄까. 톰과 앨빈 사이가 소원해진 상태에서 앨빈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톰은 두 사람 약속대로 송덕문을 써야 하는데 글이 잘 안 풀렸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 앨빈은 톰을 예전처럼 격려해준다. 쓸 거리가 많다며 둘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거창한 거 쓰지 않아도 된다, 네가 아는 거, 우리끼리 있었던 수많은 일 중에 쓰면 된다고.

사진=픽사베이

상상일 수도, 영화 '사랑과 영혼'과 비슷한 상황일 수도 있지만- 둘이 무대 위에서 종이를 휘날리며 탄성을 지르는 모습이 돈독했던 어린 시절 모습을 연상시켰고, 동심을 되찾는 느낌도 들었다. 톰에게 많이 서운했을 앨빈이 늘 그랬듯 톰이 용기를 갖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모습에서- 왠지 앨빈이 나도 격려해주고 용기를 주는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착각도 느꼈다. 난 소설 쓰는 건 아니지만 내가 글 쓰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 해답은 그리 엄청난 것도 아니고. 내가 이 수렁을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도 어디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해보고.

이 노래 들을 때마다 형언하기 힘든 감흥을 느껴서 이 글에 그걸 표현하기 쉽지 않다. 뭐라 말해도 항상 부족한 느낌. 내 심정은 이 노래 들을 때마다 펑펑 흘리는 눈물에 그대로 담긴 듯하다. 그게 슬퍼서 우는 건 아니고. 격려받은 느낌이 들고, 그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기 때문인 것 같다. '야, 괜찮아' 이 가사도 너무 좋고. 동어반복, 중언부언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노래는 가사뿐만 아니라 곡도 좋다.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를 대표하는 곡이라고 할 만한 듯. 다 듣고 나면 맺힌 게 뚫리는 느낌이 든다.

이곡이 끝나고 나면- 톰이 송덕문을 완성해서 이를 읽는 장면이 등장한다. 작품을 시작할 때처럼 버벅거리고, 글을 쓰다가 종이를 찢어 버리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톰 역을 맡은 배우마다 개성을 살려 표현하는데 같은 대사라도 느낌이 다르다. 강필석 배우 버전은 이제는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담담하게 앨빈을 떠올리는 이미지고. 조성윤 배우 버전도. 송원근 배우 버전은 아직도 앨빈을 생각하면 목이 메고 그리운 톰 감정을 여실히 표현한 듯했다. 난 송원근-정동화 버전으로 이 작품을 관람해서 아직 이쪽이 더 끌린다.

사진=딱정벌레

두서없이 또 길게 적었다. 다시 터널을 통과해야 돼서. 연속으로 통과해야 하는데 그중에는 가보지 않은 터널도 있어서. 마음은 복잡하고 일은 많이 진척시키지 못해서 조급하고. 당장 터널을 잘 통과하는 것도, 그밖에 일도 걱정스럽고. 앨빈 격려가 다시 간절한 순간이 왔다. 그럴 여유가 없어야 하는데 마음에는 잡념이 들고 지질한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마음에 어떤 자리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림자가 어설프게 남아있고, 난 섀도 파이팅을 하면서 자신을 소모하고 있다. 네가 감히 한가롭구나.

지난봄부터 막막할 때마다 이 노래가 내 손을 잡고 내가 터널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앨빈 덕분에 내 세상도 더 밝아지는 기분이고. 실존하지 않지만 내 친구 같은 느낌이고. 이번에도 앨빈 격려로, 톰 마음가짐으로 인내하며 묵묵히 걸어가 보자고.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을 앞두고 이렇게 마음을 정돈해보고 싶었다. 이상한 이유로 힘들어하는 것도 그만하고. 집착과 미련도 끊고 싶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잘 안 되는 일.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 그러기 싫어하는 마음. 이제 정말 흘려보내면 좋겠다.

죽으면 좋은 얘기만 해주네
그게 송덕문이라는 거야
네가 내꺼 써 줄래? 나도 네꺼 써 줄게
그게 가능해?
그럼 남은 사람이 하기, 약속?
약속하면 가도 돼?

좋아 약속
약속, 도장, 복사

오늘 우린 앨빈 켈비의 생애를 기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앨빈 얘기 하나 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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