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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정벌레 Jun 27. 2021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뮤지컬 '레드북'이 건넨 어떤 생각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 걸린 뮤지컬 '레드북' 현수막?. 사진=딱정벌레

"선배, 뮤지컬에는 작가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많은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흠. 아무래도 작가들도 등장인물만큼이나 삶이 극적이고 다사다난해서 그렇지 않을까?" 지난달 학보사 선배와 오랜만에 만나서 대화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난 선배 덕분에 뮤지컬에 관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보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배우도 여럿 있고. 작업하다가 쉴 때, 유튜브에서 뮤지컬 클립 영상을 보면서 시름을 달랜다. 뮤지컬에는 음악과 이야기가 있어서 좋다. 음악과 이야기는 누구나 좋아한다. 본능적으로 끌리는 콘텐츠라서 그럴 수도 있고.

뮤지컬 작품을 이것저것 살펴보니 소재가 다양했다. '제눈에 안경'이라고 해야 하나. 내 눈에는 작가 이야기를 다룬 콘텐츠가 눈에 띄었다.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나 '더 픽션'도 작가 이야기라서 좀 더 와닿았다. 그들이 쓰는 글과 내가 쓰는 글은 다르지만. 글 쓰는 직업인으로서 느끼는 고충에는 공통점도 있으니까. 그들 마음가짐에서 배우고 위로받은 것도 많다. 그 외 작품을 볼 때도 오스카 와일드, 메리 셸리 등 작가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접하면 흑백 영화 무더기에서 소수의 컬러 영화를 발견하는 느낌이 들었다.

때로는 진부한 느낌도 없잖았다. '또 작가 이야기야?' 이런 생각이 종종 들기도 했다. 작가 이야기에 저마다 공통점이 있고 결국 뻔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나 작가라는 업에만 공통점이 있을 뿐. 그들이 겪은 일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작가가 업인 사람들 이야기이지만 글 쓰는 이야기만 담은 것도 아닐 테고. 뚜껑도 열어보지 않고, 그들 삶도 잘 모르면서 '고만고만한 비슷한 이야기일 것'이라며 예단하는 것도 내 오만일 수도 있다. 아무튼 '작가 이야기 왜 이렇게 많아?'라는 생각을 하다가 선배와 저런 대화도 나누게 됐다.

레드북 포스터. 출처=아떼오드

돌아보면 작가뿐만 아니라 우리 삶이 다 드라마고 극적인 구석이 있겠다 싶기도 하다. 사연 없는 인생은 없으니까. 뮤지컬 이야기를 쓰는 것도 결국 작가이기 때문에- 작가로서 실존 인물이든 허구 인물이든 작가 삶이 좀 더 자신에게 와닿고, 더 잘 이해해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한편으로는- 결국 나도 저런 생각에서 작가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작품에 좀 더 관심이 많이 가다 보니 유독 작가 이야기가 많은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직종(?)과 비슷한 비중으로 다뤘을 수도 있는데- 내 환경 때문에 눈에 밟힌 거지.

얼마 전 봤던 뮤지컬 '레드북'도 비슷하다. 이 작품도 작가 이야기였다.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나 '더 픽션'과는 성격이 다른 작가 이야기. 야한 소설을 쓰는 여성 작가 '안나'를 다뤘다. 안나는 허구의 인물. 시대 배경은 19세기 영국이며 빅토리아 시대였다. 사회 분위기는 보수적이었고. 지금이야 그런 소설을 공개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 소설로 시작해서 웹툰이나 다양한 콘텐츠로 재생산되는 경우도 많고. 픽션이긴 하지만 그 당시 상황에서 여자가 그런 글을 쓰는 건 사회 통념이 용납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는 안나가 야한 소설을 쓴다는 이유로 궁지에 몰리며 이 통념에 어떻게 맞서는지 보여줬다. 이렇게 쓰면 내용이 사뭇 비장해 보이는데 그렇지는 않다. 굉장히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 내가 본 뮤지컬 중에서 가장 밝은 내용이었다. '전설의 리틀 농구단'이 재밌고 웃기긴 했지만 결국에는 눈물 펑펑 쏟은 감동의 우정물이었고.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도 감동의 우정물이었지만 밝다고 하기에는 좀 그랬고. 그 외에 본 작품도 파탄난 가족, 동료 이야기를 담았다. 화해로 마무리됐지만 찝찝한 내용. 아님 비장하거나.

레드북 관람일 캐스트 현황. 사진=딱정벌레

레드북은 지난 3월 '더픽션' 이후 오랜만에 보는 관극이었다. 난 이 작품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존재를 안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난봄에 캐스팅 소식을 접하고 처음 관심이 생겼다. 차지연, 아이비, 송원근, 서경수 등 유명 배우가 나오는 데다 김세정, 인성 등 유명 아이돌이 출연한다. 라이선스 작품은 아니고 창작 뮤지컬이다. 국내에서 만든 창작 뮤지컬. 근데 시대 배경은 19세기 영국. 그런 작품 많지만. 줄거리를 찾아보고 예전 공연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다가 내용과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6월에 개막이라는데 시작 전부터 무척 기다렸다.

쇼케이스까지 미리 보고 가서 본 작품은 별로 없었다. 유튜브에서 영상을 미리 찾아본 작품도 드물었다. 누가 먼저 예매해줬거나, 내가 좋아하는 배우만 무작정 보고, 줄거리는 대충 훑고 가서 본 경우가 많았다. 레드북은 송원근 배우를 제외하면 내가 작품을 본 적 없던 배우가 주로 출연했다. 송원근 배우가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팬은 아니었고. 그런데도 레드북에 관심이 생긴 건 줄거리 힘이 컸다. 작가 이야기인데 그전에 내가 본 뮤지컬과 달리 여성 작가 이야기라는 점. 주제곡이 너무도 좋다는 점.

물론 나중에 배우 빨(?)도 작용하긴 했다. 그는 바로 '차지연'. 유튜브 알고리즘이 어쩌다 보니 날 차지연 배우로 인도했는데- 차지연 배우가 '레베카'를 부른 영상이 날 압도했다. 댄버스 부인으로 나왔는데- 댄버스 역할을 맡은 배우들 다 너무 훌륭하지만 차댄은 남달랐다. 노래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몸동작을 잘 활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을 쓰는 거나 표정이나. 보는 데 너무 무서워서 정신이 든다고 해야 하나. 배우가 어찌나 팔색조 매력을 갖췄는지 다른 작품에서는 이미지가 정말 다르다. '광화문연가' 월하, '위키드' 엘파바 등.

위키드 OST, 차지연, 'Defying Gravity′. 출처=tvN '더블캐스팅' 유튜브

그래도 좀 센 이미지가 강했는데- 그가 레드북 안나로 출연한다니. 되게 기대되고 궁금했다. 안나가 튀는 이미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차 배우가 맡은 다른 배역, 내가 영상으로 접한 배역과 비교했을 때 결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천생 여자 이미지. 레드북에 나오기 직전까지 드라마 '모범택시'에서 사채업자 역으로 나온 터라- 세고 진중한 이미지인 차 배우가 발랄하고, 능청스러우며, 엉큼한(?) 안나 역을 어떻게 소화할지, 잘 어울릴지 여러 물음표가 떠올랐다. 근데 그 물음표는 의심의 물음표가 아니었다. '어떻게'에 방점을 둔 물음표.

무슨 배역이든 다 잘 소화한다고 알려져서 이것도 잘할 것 같았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고. 지난번에 안나 역을 맡은 유리아 배우가 나오지 않아서 아쉬워하는 이도 많고. 난 영상으로만 유리아 배우를 접했는데 실제로 못 본다니 아쉬웠는데- 차지연 배우야 워낙 대배우고 스타지만 그래도 레드북 터줏대감 부재를 최대한 느끼지 않을 수 있게끔 어떻게 할지 많이 궁금했다. 그래서 쇼케이스에도 관심이 많이 갔는데- 쇼케이스를 보고 '아, 역시'했다. 이어서 든 생각은 '레드북 너무 보고 싶다', '빨리 보고 싶다', '정말 기대돼'였다.

레드북 주제곡이 유명하던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었다. 대학 뮤지컬과 입시곡으로도 많이 부른다고 들었다. 노래도 좋다. 정말 좋다. 멜로디도 좋고. 나도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유리아 버전, 아이비 버전을 돌아가면서 들었다. 이 노래를 부르는 두 배우 이미지에 내가 너무 고정돼서 차지연 배우는 이 곡을 어떻게 소화할지, 이 곡이 잘 어울릴지 잘 모르겠다 싶었다. 잘 부르긴 하겠지만- 그에게 세고 강한 이미지가 있었고, 노래를 들으면서 한이 느껴져서-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도 한스러운 곡 같긴 하다만.

레드북 쇼케이스, 차지연,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출처=MRD마라도 유튜브

그러던 차에 쇼케이스 영상을 보니- 헉. 차지연 배우가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을 불렀다. 무척 기대에 차서 영상을 봤는데- 댓글을 보니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다는 반응이 있긴 했다. 난 어떤 가사에서 고음 처리가 약간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난 그 영상을 보고 '아, 역시' 했는데- 랜선으로만 본 대배우를 향한, 주관적이고 맹목적인 신뢰이긴 하지만- 주인공 감정이 무척 잘 전달됐기 때문이다. 보고 듣는 나도 울컥할 정도로.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자체가 가사부터 워낙 마음을 울리고 감정을 건드리긴 하지만 말이다.

쇼케이스 영상을 보고 느낀 건- 이 배우가 스스로 안나라고 생각하고, 재판정에 서기 전 안나의 마음을 굉장히 잘 이해하며, 감정을 제대로 이입한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자기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부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다른 배우도 마찬가지일 테고, 다들 그런 생각으로 연기하고 노래하겠지만. 뇌피셜이긴 한데- 이번에 두 번째로 안나 역을 맡은 아이비 배우와 달리 차지연 배우는 (김세정 배우도 마찬가지) 안나 역이 이번이 처음이고, 안나 생각이나 마음을 처음 경험하고 느끼는 입장이라 자신에게도 새롭지 않았나 싶었다.

그게 랜선으로 쇼케이스 영상을 보는 내게도 느껴졌는데- 한편으로는 그냥 내가 전에 다른 배우들이 이 노래를 부른 영상을 주로 접하다가 차지연 배우가 부른 영상을 처음 보니 새로워서 괜히 그렇게 느꼈다 싶기도 하다.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써서 그런지 표현이 잘 안 되네. 아무튼 그 영상 보니 레드북이 훨씬 더 보고 싶어 졌고- 비록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공연일지라도 그걸 볼 때마다 계속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마음이 울컥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배우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것 같아서 공감 갔고. 가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네.

난 늘 궁금했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난 늘 기다렸어 날 이해해줄 알아봐 줄 한 사람
사실 다 알고 있는데 답은 내 안에 있는데
자꾸 되물어 봤어 나를 믿을 수 없어
애써 모른 척했어 혼자 자신이 없어
계속 외면해 왔어 나를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살아온 날들과 사랑한 이들이 너무나 소중한 사람
지금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중요한 사람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내가 나라는 이유로 죄가 되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벌을 받는
문제 투성이 세상에 하나의 오답으로 남아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를 지키는 사람

당신과 같은 심장으로 숨을 쉬고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꿈을 꾸는
하지만 결국 당신과 다른
당신이 아닌 사람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나로서 충분해
괜찮아 이젠


혹자는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을 자존감 높여주는 노래 목록에 포함하던데- 이유는 이해하지만 난 그렇게 분류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노래에 울컥하고 위로받는 이유도 '혼자라도 괜찮다'는 생각 때문도 있지만- 그 이유로 이 노래를 좋아하면 스스로 '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느낌이 들어서. 내 부족함은 인정하지만 자존감이 낮은 사람으로 스스로 취급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좋은 노래라고 생각하고 싶어서라고 해야 하나. 이 노래를 큐레이션 하듯 카테고리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참.

돌아보면- 이 노래도 안나가 글 쓰면서 어떤 장벽을 마주하고, 고초를 겪으면서 느낀 심경을 토로했고. 난 안나 같은 고초를 겪은 건 아니지만- 차지연 배우 버전을 들었을 때, 힘든 심경을 집중적으로 겪고 이를 털어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서, 기타 다른 이유로 좀 더 감정 이입하고 울컥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안나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회의를 많이 느꼈고. 한때는 내게 자부심이 된 일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뭐가 현실이고, 뭐가 망상이고, 뭐가 진심인지도 헷갈리는 상황.

노랫말 하나하나가 가슴을 울리는데 역시나 가장 와닿는 건 '나는 나로서 충분해'라는 가사였다. 내가 부정당하는 상황도 아니고, 안나처럼 자신이 쓰는 글이 시대 통념상 죄가 되는 상황도 아니지만. 자학이 너무 심해지고 내가 의미를 두고 노력한 걸 부정하고 비하하기까지 하면 안 된다고. 마음이 버겁다 보니 그럴 위험까지 가서- 다 내 마음가짐 문제라고 생각하고 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싶은데- 지금 생각하면 그 또한 지나간 일이고 좀 더 일찍 마음 정리를 잘했으면 이상한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싶기도 하고 그렇다.

레드북 티켓. 사진=딱정벌레

언제나 그랬듯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빠지는데- 아무튼 그랬다. 근데 쇼케이스를 보고 기대한 건 단지 이 노래 때문만 아니었다. 차지연 배우가 안나를 잘 소화했다 싶었던 게 바이올렛 할머니와의 일화를 떠올리면서 부른 노래 때문이었는데- 이 노래는 되게 밝은 분위기다. 코믹하기도 하고. 차 배우는 그 재미도 십분 잘 살려서 소화했다. 그걸 보니 현장 가서 보고 싶고, 당장 보고 싶고. '차안나 정말 잘할 것 같다' 이 생각도 들고. 뮤지컬 뉴비가 감히 이런 생각하는 것도 송구할 지경이지만.

마침 인터파크에서 인생 주간 할인 행사가 있었는데- 정해진 기간 안에 공연을 R석으로 예매하면 40%가 할인됐다. 자리가 다 차서 예약대기를 걸었는데 한자리가 풀려서 냉큼 예매했고- 난 S석보다 낮은 가격에 R석에 앉아서 레드북을 볼 수 있었다. 내 돈 주고 R석에서 본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인생 주간 할인은 혜택이 쏠쏠해서 그걸로 R석에서 안 보면 손해 보는 기분. 게다가 대극장 공연이라서 S석도 내가 봐온 공연 S석보다 비쌌다. S석조차도 마티네 할인이나 기타 할인으로 보는 나인데-

작업할 때는 생활을 단순화하고 거의 칩거하는데. 요즘은 그게 내게 효과적이지 않고,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너무 단순한 일상을 산다는 생각도 들었고. 시기도 맞아떨어지고 혜택도 맞아떨어져서 예상보다 빠른 시기에 레드북을 봤다. 평일에는 한강을 건너지도 않는데- 대학로는 주말에 어쩌다 가는 정도인데. 평일 저녁 대학로 풍경은 참 반가웠고, 저녁이라서 그런지 여유로웠다.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도 오랜만인데 줄 서서 사진 찍고 수많은 관객 중 한 사람으로 자리에 앉아있는 느낌도 생경했다. 요즘은 영화관도 을씨년스러우니까.

레드북 포토존. 사진=딱정벌레

대극장 공연은 3년 전인가, 4년 전인가 '빌리 엘리어트' 이후로 처음이었다.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봤는데 음향 평가가 좋지 않았다만. 난 막귀라서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볼거리가 많았다. 큰 공연장도, 큰 무대도, 오케스트레이션도, 10명이 훌쩍 넘는 배우들이 나오는 것도, 음악과 이야기뿐만 아니라 춤까지 있는 공연도, 화려한 무대 세트도, 조명도, 역동적인(?) 무대 움직임도, 인터미션도- 내겐 모두 새로웠다. 노래까지 좋고 내용은 재밌으니.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평소 보던 작품보다 러닝타임이 긴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송원근 배우가 처음부터 나오는데-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이후로 그의 공연은 처음 봤다. 지난해에도 여러 작품에 나왔는데. 그의 미성은 OST로도 충분히 접했지만 현장에서 오랜만에 들으니- '와, 이렇게 좋았나' 싶을 정도로 멋졌다. 지금도 계속 귓가에 맴돈다. 깊이 있는 미성이라고 해야 하나. 울림이 큰데 현장에서 들으면 신선한 충격이 느껴질 정도로 인상깊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호소력 있어도 되나 싶었다. 덕분에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OST 가운데 송원근 배우 버전을 다시 듣고 있다.

슈트가 잘 어울리는 배우, 인텔리가 잘 어울리는 배우라고 생각했고- 그런 배역을 많이 맡은 듯했지만. 레드북에서는 코믹한 모습도 많았다. 진지한 허당 이미지. 희미한 기억 속에 있는 드라마 오로라 공주 '나타샤'가 갑자기 떠오르고(관련 있지 않지만)- 송원근 배우와 그의 신사 무리들이 투스텝 하면서 등장하고 퇴장하는 모습이 정말 웃겼다. 중간에 넘어지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게 각본상 있던 건지, 애드리브인지, 실수인지 모르겠다. 아플 것 같은데 근데 그 장면조차 너무 웃겼다.

층마다 엘리베이터를 배우 사진으로 래핑했다. 사진=딱정벌레

아무튼 정신없이 보다가 기다리던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 나왔는데- 쇼케이스와 약간 다른 점도 있었는데 문제는 아니었고. 내가 공연 본 날에는 고음처리에도 문제없이 아주 깔끔하게 잘 부르셨다. 확실히 감정은 현장에서 볼 때 좀 더 잘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영상으로 볼 때보다 배우님이 더 울컥한 느낌도 들었고, 좀 더 감정 이입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같은 연기를 수십 번씩 할 텐데 늘 새로운 느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을 듯한데- 다들 참 대단하다.

벼르고 벼르던 공연을 봐서 그런지, 생리 전 우울증 때문인지 몰라도- 공연 시작하기 전부터 커튼만 봐도 눈물이 났다. 아님 벌써 내가 메노포즈인가. 그래도 유쾌하게 공연을 보고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을 들을 때 다시 울컥하다가- 공연 끝나고 커튼콜 할 때, 오케스트레이션까지 커튼 젖혀서 보여주고, 안나가 책상에 앉아서 뿌듯한 표정으로 레드북을 보는 모습으로 공연이 마무리되는 것까지 보니 또 마음이 울컥했다. 마무리도 안정감을 주고. 신념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주변을 지킨 모습이 대견하다 해야 하나.

이런 반응도 있었다. 안나가 야한 소설을 쓰는 캐릭터가 아니라 다른 글을 쓰는 캐릭터였으면 어땠을까라고. 시대에 저항하는 글? 근데 난 빅토리아 시대에 야한 소설을 써서 어려움을 겪는 여성 작가도 좋았다. 스스로 욕망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고, 유불리를 따지지 않으면서 당당한 모습이 멋있었다. 그것도 시대에 저항하는 모습이고. 지금도 누구나 쉽게 드러내기 힘든 모습이기도 하다. 극 중에서 안나가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을 부른 배경, 상황, 맥락을 고려하면 그게 정말 어려운 결정인 게 실감 나서 더 짠하기도 하고.

레드북 쇼케이스, 차지연, '안나, 이야기를 들려주렴'. 출처=전성우 유튜브

오랜만에 브런치에 쓰는 글이고,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 글을 쓰면서 생각하다 보니 횡설수설한다. 공연을 보고 나오는데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고. 좋은 공연을 보고 선물 받은 느낌도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 좋은 기분이 하루도 안 가긴 했지만- 같은 공연을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이 공연은 똑같은 배우 버전으로 또 보고 싶었다. 차 배우가 7월 말에 일찍 하차하기 때문에- 두 번째 공연에서도 좋은 느낌을 또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힘을 준 공연이다 보니 같은 내용을 또 봐도 기대되기는 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좋은 작품이었다.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을 보면 제인 오스틴이 마치 세포분열한 듯한 작품이 많은 듯하다. 클리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거슬리지 않았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한국에서 썼다고 했을 때도 신기했는데 너무 재밌어서 현지로 수출해도 좋겠다. 현지에서도 코드가 잘 맞다면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 창작뮤지컬을 현지어로 번역해서 해외로 수출하고 그게 인기있으면 되게 뿌듯할 듯. 그래도 국내 뮤지컬 시장이 전세계 4위라던데.

칙칙한 일상에 누구든 단비가 필요하고. 내게는 뮤지컬이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다. 분위기가 밝은 작품을 좀 더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시종일관 밝을 수는 없겠지만- 몇 주 전에 온라인으로 '배니싱'을 봤는데 와닿는 내용도 있었지만 그날 날씨도 안 좋고, 내용도 어두워서 그런지- 여러 가지 이유로 보고 나서 기분이 더 우울했다. 그래도 배니싱은 좋은 작품이고, 배우들 연기도 다 좋았다. 요즘 들어 실감하는 건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 의식주만큼이나 생활 필수재. 가십보다는 공감하고 내가 성숙해질 수 있는 이야기면 더 좋고. 좋은 이야기를 쓰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새삼 감사하다.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아이비 버전. 출처=힐링튭Healing tube 유튜브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유리아 버전. 출처=공연예술 창작산실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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