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계절

by 딱정벌레
대구 중앙도서관의 쿨링 포그 시스템. 사진=딱정벌레

매년 여름이 다가오는 방식이 달라진다. 어떨 때는 4월 말부터 무덥다가 어떨 때는 6월 초부터 한여름 찜통더위가 찾아오니 말이다. 어떻게 오든 여름은 언제나 좋다. 내가 극서지 사람이라서 어지간한 더위에 내성이 강하기 때문은 아니다(물론 나도 아직 더위가, 여름이 힘들다). 물론 여름철 특유의 풍경이 좋다. 코로나 때문에 요원해진 록 페스티벌, 쿨링 포그 시스템, 도로에 스프링클러 터지듯 뿜는 물줄기. 작년에는 스마트 천막도 봤다. 온도와 바람을 감지해 더울 때는 이를 펴고, 그렇지 않을 때는 접는 방식.

갑작스럽게 무더위가 찾아왔지만 난 아무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옷장에 여름 옷은 저 구석에 구겨진 채 처박혀 있었고, 아직도 못 찾은 반바지가 두벌이나 있다. 4월이었나, 5월이었나 갑자기 추워지고 바람이 세게 불어서 밤에 겨울 코트를 입고 털모자를 쓴 채 나간 적도 있다. 에어컨 청소도 해두지 않았다.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생각만 하다 지난주 그냥 보냈다. 그러나 주말에 결국 필터를 떼어내 씻고 먼지를 닦았다. 전년보다 먼지는 적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옷장에 처박힌 여름 옷도 다시 꺼냈다. 여름에도 블라우스를 많이 입다 보니 다려야 할 것 투성이지만. 그래도 아직 못 찾은 여름 옷이 있다. 원피스, 반바지 등. 근데 집에 없는 것 같다. 내가 그걸 들고 어디 나가지도 않은 듯한데 왜 없지. 원피스는 무려 8년 됐지만 내가 아끼던 옷이라서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비슷한 스타일의 옷 입기 지겨울 때 그거 입으면 좋아서 아무튼 기다리고 있다. 이밖에 이불을 세탁하고, 늘 정기적으로 하던 청소와 설거지, 분리수거를 끝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오랜만에 잉글리시 로즈향 디퓨저도 샀다.

웹툰 '유미의 세포들' 반반한 라면. 사진=신세계 TV쇼핑

오래간만에 장을 볼 때도 여름을 준비하는 자세로 임했다. 농심 '둥지냉면', 탄산수, 탄산음료, 생수를 샀다. 생수야 늘 사는 거지만 둥지냉면은 달랐다. 농심 사람들이 해장을 둥지냉면으로 한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얼핏 들은 적 있다. 아침에 출근하면 회사에서 그걸 끓여서 먹는 사람도 있다고. 식품회사다운 풍경이다. 비빔면도 사려고 했는데 재고가 없었나. 아무튼 다음 기회로 미뤘다. 냉면에 넣어 먹으려고 계란도 샀다. 캡슐 커피만 마시기는 지겨워서 오랜만에 다시 커피를 내려마시려고 필터 종이도 다시 구매했고.

평소 고대하던 웹툰 '유미의 세포들' IP를 활용한 '반반한 라면'도 주문했다. 오뚜기와 신세계 TV쇼핑이 같이 만들었는데 김치맛, 치즈맛 라면이 각 10개 일반 라면의 절반 크기로 포장됐다. 각자 양에 맞춰서 반개 넣어 밥과 먹어도 되고. 양이 많은 사람은 3개를 넣어 삶아 먹어도 된다. 그러면 1.5개가 되는 거니까. 배송과정에서 물류 힘에 놀랐다. 주말에 주문했는데 월요일에 도착했다. 쿠팡도 아닌데 말이야. 홈쇼핑 물류 역량을 새삼 실감했다. CJ대한통운에서 보내주는 거지만 빨리 보내게끔 시스템을 구축한 듯하다.

아쉽게도 지난 금요일 샀던 수국은 금세 죽고 말았다. 우리 집이 그렇게 건조했나. 자주 물 갈아주고, 분무도 해줬는데 하루를 못 갔다. 저번에는 큰맘 먹고 산 작약이 꽃봉오리를 피우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내가 잘못 보관했다. 물을 뿌리면 안 되는데. 작약 1송이가 비싼데 그때는 때마침 비교적 낮은 가격에 샀다. 1송이에 2900원. 다른 데서 사면 1송이가 5000원대에 달하는데 그때 정말 '횡재했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뭐하나. 내가 제대로 못 키웠는데. 그 뒤로 작약을 보면 마음이 쓰리다. 다시 사서 '이번에 잘 키워봐야지' 하기도 조심스럽다. 또 내가 죽일까봐. 우리 집이 좋은 생육 환경이 아닐까봐. 스파티필름은 잘 자라는데 너흰 왜.

이 와중에 고개를 축 늘어뜨린 스파티필름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물 줄게. 스파티필름은 참 키우기 무난한 식물이다. 딱 저런 타이밍에 물을 주면 된다. 너무 자주 물을 먹일 필요는 없다. 햇빛도 안 쬐도 된다. 관엽 식물이지만 이따금씩 꽃도 핀다. 그러나 꽃이 안 핀다고 해서 걱정할 건 없다. 화분이 좁아서 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꽃이 피는 경우도 있고. 사무실에 뒀던 스파티필름이 그랬다. 집에 있던 스파티필름은 꽃이 피지 않았다. 그래서 걱정했는데 그럴 일이 아니었다. 내게 이 식물을 추천한 예전 출입처 분도 그랬다. "집에 있는 애는 살만한가 보네요" 그런 의미였나 보다.

오설록에서 산 제주 영귤차. 사진=딱정벌레

지난 주말 홍차를 내려 마시다 차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말 이모 댁에 다녀오는 길에 강남역 오설록에서 제주 영귤차를 샀다. 집에 와서 찬물에 티백을 넣고 우려 마시는데 물맛이 좋았다. 서너 번은 물을 더 부어 마신 것 같다. 샤워하고 시원한 영귤차를 마시며 라디오를 틀고 책을 읽으니 비로소 평안했다. 그날 이모, 이종사촌 언니들과의 대화는 좋았다. 난 최근 스트레스받았던 일을 이야기했고, 이모와 언니들은 귀를 기울여줬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난 고마우면서 조심스럽다. 다른 사람을 내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만들까봐.

여러 이야기 중 이날 이종사촌 언니 1이 해준 이야기가 계속 기억에 남았다. 이 언니는 마취과 의사인데 자신이 들어가는 수술방에서는 환자 혈압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평소 그의 원칙이다. 만약 들쭉날쭉하면 옷을 벗겼다, 입혔다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고. 그 과정에서 간호사들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많이 하는데 결국 수간호사가 찾아와서 한마디 했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간호사들 힘든데 이러면 그만둘 수 있다고. 계속 그러면 과장님에게 이야기하겠다. 언니는 그러시라고 했다고 한다. 자신은 환자를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니까.

물론 언니도 고민은 든다고 했다. 적당히 규칙을 어기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두루뭉술하게 지내는 게 관계에 좋기도 하고, 사람들도 그런 사람을 편안해하니까. 자신에게도 허물이 있을 수 있으니까. 정답은 따로 있지 않겠지만 언니의 프로정신이 일단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걸 당당하게 밝히며 윗사람에게 누가 경고를 날리는 걸 개의치 않아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걸 굽히지 않는 모습이 본받을만했다. 수간호사 입장에서는 그게 불필요해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두 사람 다 사리사욕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논쟁한 거라 누굴 뭐라 하기도 그렇다.

언니가 이 말을 꺼낸 의도는 다르겠지만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굽히지 않고 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도 비판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는 거다. 거기에 오류는 없는지. 흠결은 없는지. 잘못된 가치를 옳다고 생각하고 고치지도 않은 채 살아가면 그건 더 심각하니까.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무오류성에 대한 확신'이니까. 그런 검증과정을 거쳐서 100% 확신이 있다면 추구할 일이고. 한편으로는 그러면 내 신념은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조각 난 가치관이 떠오르지만 체계화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그걸 명문화해 내 뇌리에 깊이 각인하고, 그걸 공표하는 순간 부담스럽다. 더 이상 출구는 없고, 난 그걸 지키며 살아야 하니까.

어제 저녁 산책길. 촬영=딱정벌레

최근 '좋아진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자주라고 해봐야 두세 명이지만. 오랜만에 간 병원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최근 스트레스를 받은 일을 털어놓았다.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시원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죠?" 그 말을 듣고 내가 빵 터졌더니 선생님도 같이 웃었다. 그래, 내가 뭘 믿겠어. 그렇게 지난 일이 됐고 더는 그게 내게 어떤 영향도 주지 않을 뿐이다. 이모와 언니들을 만나서도 감정을 쏟아냈지만 이모는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좋아 보인다. 자신감도 있어 보이고"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지난 겨울 내 상태를 생각해보면 나도 변화가 느껴진다.

'난 이 정도가 딱 좋다'는 생각이 든 건 3월 무렵이었다. 여전히 무서운 건 있었지만. 내가 내 마음의 평온을 찾는 데 4개월이 걸렸다. 그 이상으로 넘어가려면 변화가 필요했던 것 같고. 어쨌든 내 상태가 내가 봐도 괜찮을 정도로 좋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이지 말자고 생각했다. 언젠가 다시 달려야 할 수 있는데, 근데 오랜만에 달렸는데 오래 못 달릴 수도 있는데 그에 대비해서 자신을 잘 돌보자고. 사실 온전히 혼자일 때 가장 안전한 기분이 든다. 사람을 싫어하지 않지만 난 홀로일 때 힘을 가장 얻으니까. 물론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힘이 나긴 하지만 그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른 듯하다. 개인적으로 자리를 크게 만들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거나 과시하려는 이들이 불편하다. 그게 내게 영향을 안 주면 상관없는데 그 무리에 날 넣으려 할 때 거부감이 많이 든다. 그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만.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무더웠지만 어제부터는 덜한 것 같다. 산책하면서 바람이 서늘하다 못해 거세게 불어서 캉캉치마가 격하게 휘날렸다. 어제 노을 좋다고 소문났던데 그것도 못 봤다. 어쨌든 다시 찾아온 여름이 반갑다. 한창인 느낌이 좋고, 전성기 기분이 들어서 여름은 더워도 좋다. 땀 흘리면 씻으면 되고. 여름에만 입을 수 있는 옷도 마음에 든다. 여름용 음악도. 여름에 즐겨먹는 먹거리도. 특히 쥬시에서 수박 큐브 주스를 오랜만에 마시면서 이 계절이 더욱 실감 났다. 여름엔 좀 더 즐겁고 행복한 기억이 많다. 언론사 시험을 준비할 때는 공채가 하반기에 있다보니 여름이 특히 열공하는 기간이었다. 빠른 곳은 여름부터 채용을 시작하기도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하반기를 기대하며 실력을 쌓는 기간. 이밖에 복날 핑계로 맛있는 걸 먹는 것도 좋고. 여름철 녹음이 우거진 숲을 거닐면 눈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이 계절에 소쇄원을 다녀오고 싶은데 요즘 2차 폭발 징후가 나타나서 움직이기 조심스럽다. 매인 일도 있고. 글 하나 털면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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