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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이 끌리는 사람

팀 아이텔 그림이 건넨 생각

by 딱정벌레
사진=팀 아이텔

뒷모습에 시선이 가는 사람이 있다. 내가 아끼는 사람일수록 뒷모습에 주목한다. 가깝게는 가족, 이모, 지난 연인이 그랬다. 앞모습에서 느끼기 힘든 인상을 뒷모습에서 발견한다. 뒷모습이 씩씩한 사람도 있지만. 내가 대체로 발견한 인상은 쓸쓸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날 배웅하고 돌아서는 아버지, 지하철 타고 이모집에 가는 어머니, 날 집까지 태워준 뒤, 돌아서는 이모, 아쉬움에 서로 발길을 못 떼다가 겨우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하던 옛 사람. 주로 작별할 때 뒷모습을 보니 그런 느낌을 받는다. 뒷모습을 보는 건 헤어지기 아쉬워서지.

뒷모습은 대체로 거짓말하지 않는다. 앞모습만 보일 때는 연기도 하고, 쇼도 펼친다. 뒷모습은 앞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까 포커페이스 할 필요가 없다. 등을 돌리면 비로소 자유로우니. 뒷모습조차 척하는 이도 있겠지만. 특별히 마음 쓰이는 경우가 아니라면 누군가 뒷모습을 오랫동안 보지 않는다. 그러니 척하는 걸 알아차리기 어렵다. 내 뇌피셜이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 보니 앞모습에서 느끼기 힘든 인상을 뒷모습에서 발견한다. 그 모습은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아서 솔직하다. 뒷모습에서 느낀 고독이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얼마 전(이라기에 몇 주 됐지만) 브런치에서 뒷모습 그림을 주로 그리는 한 화가 이야기를 읽었다. 아트 소믈리에 지니 님이 쓴 글(https://brunch.co.kr/@white-jinny/124)인데 내용이 참 좋았다. 그 전에도 이 작가님 글을 좋아했다. 살뜰히 댓글을 달아주신 적도 있어서 감사하기도 했고. 지니 님이 소개한 화가는 팀 아이텔이라는 독일 화가였다. 지니 님 글도 좋았고 팀 아이텔 그림도 좋았다. 그 글에서 놀라웠던 건 현재 대구 미술관에서 팀 아이텔 전시를 열고 있다는 것. '다음에 대구 가면 꼭 봐야겠다'하고 벼르고 있었다. 지난 주말에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1번 컵스쿠쿠에서 먹은 카야잼 토스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2번 삼성 라이온즈 파크. 3번 대구미술관 가는 길. 사진=딱정벌레

대구 미술관은 본가에서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멀다. 자가용을 타면 10분 안에 갈 수 있다. 버스 타면 한번 갈아타야 한다. 배차 간격이 짧지 않아서 30분은 잡아야 한다. 걸어가면 1시간 넘게 걸리고. 산을 깎아 만든 곳이라서 걸어갈 때 등산하는 느낌이다. 요즘은 미술관도 예약해야만 갈 수 있다. 하루에 네 번, 시간당 50명씩 인원을 제한한다. 인터파크나 전화로 예약할 수 있는데 수요일까지였나 예약이 다 찼더랬다. '10월까지 전시가 열리니 다음에 가야겠다'하고 포기했다.

지난 일요일 기적같이 2시에 딱 한 좌석이 풀렸다. 카페에서 '말테의 수기'를 읽다가 부리나케 예약하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미술관으로 향하는 수성 3번을 기다렸다. 미술관 셔틀버스가 있는데 코로나 19 때문에 한동안 운행이 중단됐다. 버스를 타고 금방 미술관에 도착했다. 날이 무더워서 따가운 한여름 햇살을 받으며 입구까지 가는 길은 녹록지 않았지만. 여기도 입장할 때 QR 코드로 체크인한다. 체온도 아마 측정했던 것 같다. 요즘 어딜 가나 이 절차가 익숙해서 해도 곧잘 까먹는다.

거리두기 전시를 운영하니 장점은 있다. 전시환경이 무척 쾌적하다. 내가 들어갔을 때, 다들 2층에 있는지 1층 전시장에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전세 낸 기분. 대구 미술관은 회화도 전시하지만 1층에는 설치 미술을 많이 전시한다. 아마 공간이 넓어서 그럴 수도 있고. 그러려고 공간을 넓게 조성했을지도 모르지만? 설치 미술을 전시하면 관람객이 사진 찍을 거리도 많다. 행복만큼이나 행복해 보이는 이미지도 중요한 시대. 그 시대에 '나 미술관 다녀왔소'라고 인증하기에도 좋다.

'새로운 연대' 전시작. 사진=딱정벌레

팀 아이텔 전시는 2층에 있었고. 1층에는 '새로운 연대'라는 제목의 기획전이 열렸다. 코로나 19와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동산의료원을 오가며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을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도 전시돼 있었다. 물리적 거리두기를 형상화한 설치 미술도 있고. 맞은편 모니터에는 사람이 나와서 뭐라 뭐라 말하고 있고. 바닥에 센서를 설치해놓고 그 위에 올라가면 화면이 달라지는 작품도 있었다. 예전에 친구가 이걸로 디지털 아트 작품을 졸업작품으로 전시한 적 있었다.

내 기억에 남는 작품은 미술관 주변 미세먼지나 초미세먼지 농도 수치를 화면에 띄우고, 이 데이터가 전송되면 가상현실이 반응해서 화면에 새로운 이미지를 띄운 작품이었다. 김안나 작가의 '숨'이라는 작품이라고. 어떤 작품은 소개 문구가 인상 깊었다. 심윤 작가의 '숲 속의 소파'라는 작품인데. '현대인에게 행복은 기분 좋은 감정이라기보다 행복해 보이는 이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미지 사랑은 대단하다'였다. 김종희 작가의 '편집증 김 씨에게 조각된 대사'도 소개 문구가 좋았다. 언젠가 글로 쓸 생각이다.

이 전시에서 내가 마음에 든 건 '전시 감상 카드'였다. 관객 참여형 전시라고 해야 하나. 전시 작품을 미니 카드로 만들어서 4장 고르게 했다. 그다음 비치된 노트에 '선택한 작품 카드로 나만의 이야기가 담긴 전시를 구성해 보세요'라고 했다. 이걸로 내가 생각하는 새로운 연대가 뭔지 생각해보자는 거였다. 마음에 새긴 작품 카드를 고르고, 내가 선택한 작품 공통점을 핵심 단어로 나열하고, 공통된 단어를 통해 내가 생각하는 새로운 연대가 뭔지, 평범한 일상마저 흔들리는 지금, 우리에게 예술이 필요한 이유를 써보라고 했다. 여운이 남았다.

대구미술관 2층 유리천장, 팀 아이텔 전시. 사진=딱정벌레

팀 아이텔 전시 이야기할 것처럼 시작하더니 다른 이야기나 하고 있다. 시간이 촉박해서 2층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도 운행을 중단해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고대하던 팀 아이텔 전시. 이날 하늘과 햇살이 너무 좋았다. 아트 소믈리에 지니 님도 3 전시실을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나도 그렇다. 여기는 어떻게 찍어도 사진이 다 멋있게 나온다. 특히 여름에 촬영하면 좋다. 전시실은 시원하고 밖은 화창하고. 복도에는 팀 아이템 작품에 영감을 준 사진이나 책이 전시돼 있었다.

팀 아이텔은 20년 경력의 화가다. 리플릿 안내에 따르면, 파리와 베를린에 작업실이 있다고. 철학과 문학을 공부한 다음, 미술을 시작했다고 했다. 부러운 경력이다. 이 사람은 도시 모습을 담은 사진에서 시각적으로 중요한 요소를 찾아낸다고 했다. 이를 캔버스에 재구성한다고.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인상은 사진 같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피사체 색감과 특징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해야 하나. 뒷모습 그림도 많지만 앞모습 그림도 있다. 옆모습 그림도 꽤 있고.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시선이 향하는 이들을 많이 그린 듯했다.

색감은- 하늘은 굉장히 선명한 색으로 표현했고. 나머지(옷, 잔디, 벽 등)는 무채색이 아니지만 어두운 느낌이 나게 채색했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아서 먼지 끼고 배기가스로 뒤덮인(?) 도시 삭막함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나 싶은 생각도 들고(뇌피셜 향연이지만 예술은 수용자 감상도 중요하지 않나, 작가 의도가 잘 전달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용자 해몽도 의미 있는 듯).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성 상실 이야기, 사색의 회화를 감상할 수 있을 거라는데 그림이 꼭 쓸쓸해 보이지만 않았다.

팀 아이텔 전시. 사진=딱정벌레

좋은 그림이 많았다. 내 마음에 든 작품은 도서관인지 박물관인지 어떤 큰 건물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어떤 여성의 뒷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고독해 보이지 않고 씩씩해 보였다. 목적이 있는 발걸음 같다고 해야 하나.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느낌도 들고. 그림 속 배경도 밝았는데 문득 릴레함메르에서 리프트 타고 내려왔을 때 풍경이 생각났다. 릴레함메르 올림픽 경기장이 있던 곳에 스키 점프대만 남아있었다. 거기에는 리프트를 운영하는데 출국 전날 거기서 리프트를 탔다. 끝나가는 휴가와 잠시 잊은 일터 고민이 떠오르던.

팀 아이텔 전시는 둘러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시를 세 번 다시 봤다. 예전에는 전시 볼 때 한 작품을 굉장히 오래 봤다. 내가 보는 눈은 없지만 어떻게 그리고, 채색했고, 어떤 용품을 썼고. 이런 걸 뚫어져라 봤다. 그렇게 보면 전시 관람에 몇 시간은 걸린다. 언제부턴가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전시를 봤다. 9회까지 하는 야구도 보기 부담스럽고. 아무튼 짧게 보는 대신 여러 번 전시를 보는 쪽을 택했다. 고대했던 전시를 봐서 너무 기쁘고 뿌듯했다.

더 놀라운 건 이 전시가 무료라는 것. 대구 미술관은 아무리 유명 화가 전시를 해도 관람료가 너무 싸다. 비싸야 5000~8000원? 시립 미술관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전쟁기념관 같은 데서 가품 전시를 해도 관람료가 1만원 넘는 걸 생각하면 미술관에서 너무 싸게 운영한다는 생각도 든다. 나야 감사하지만 좋은 전시료를 너무 저렴하게 매기면 누군가는 그 작품 가치도 그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퇴장 시간이 다가와서 서둘러 미술관을 나왔다. 기분 좋게 나와 이모 댁에서 떡볶이를 해 먹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내 손등에 입 맞춰주던 외할머니는 이번에 날 기억 못 하셨다. 슬프지 않았다. 저번에도 그런 적 있었고. 다음에는 기억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또 손자, 손녀는 자주 못 보니까 기억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도 이모나 어머니는 기억하셔서 다행이라고 본다. 그날 내가 집에 돌아가고 나서 기억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2월에 태어난 아이, 외삼촌과 생일이 같은 아이"라고.

사진=팀 아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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