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코만(Kikkoman)’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간장 양조업체다. 창업 100년이 넘는 이 회사는 일본 간장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걸쳐 24개가 넘는 나라에 현지법인을 세운 글로벌 기업이다. 올해 3월 기준 연간 매출액이 4680억엔(약 4조6000억원)에 달한다.
그런데 기코만의 성공을 이끈 아이콘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빨간 뚜껑을 단 투명한 눈물방울 모양의 간장 용기다. 1961년 출시된 이래 4억병 이상 팔린 이 식탁용 간장 용기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고 디자인을 유지해 왔다. 단순하고 기능적이며 눈에 잘 띄는 디자인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이 병은 말 그대로 “간장을 부엌에서 식탁으로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간장 용기를 디자인한 사람은 도쿄와 일본 북부를 연결하는 코마치 신칸센 등을 디자인한 에쿠안 겐지(榮久庵憲司)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간장을 붓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100개 이상의 원형을 만들어 시행착오를 거쳤다. 상징적인 면과 기능적인 면 모두를 잡은 이 디자인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컬렉션에도 포함될 정도로 단순한 간장을 넘어 간장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차별화된 스타일의 본보기가 되었다.
오늘날 수많은 브랜드가 기코만의 식탁용 간장병처럼 차별적인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소비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불변의 원칙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브랜드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와 철학을 디자인에 접목하기도 하고, 또 다른 브랜드는 최신의 유행을 닥치는 대로 차용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방법도 수많은 경쟁 제품이 넘쳐 흐르는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하나의 좋은 수단이 될 순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오랜 시간 갈고닦아 모방할 수 없는 가치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누텔라(nutella).’ 헤이즐넛과 코코아 등 총 일곱 가지 원료를 더해 만든 중독성 강한 악마의 맛, 바삭한 토스트 위에 발라 먹으면 영혼을 일깨우는 맛,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세대를 아우르는 맛. 누텔라를 표현하는 흔한 수사들이다. ‘페레로 로쉐’나 ‘킨더’ 등 초콜릿과 각종 제과류를 제조·판매하는 글로벌 기업 페레로 그룹이 소유하고 있는 유명한 코코아 스프레드 브랜드가 바로 이 누텔라다.
1946년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 알바에서 작은 제과점을 운영하던 피에트로 페레로는 누텔라의 전신인 ‘잔두야’를 탄생시켰다. 잔두야는 잘라서 빵에 발라 먹을 수 있도록 식빵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당시 지역에서 유명했던 축제의 마스코트 가운데 하나를 본떠 출시했다. 영양 성분도 초콜릿과 거의 비슷했고, 맛 또한 좋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코코아 물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아주 극소량의 코코아를 헤이즐넛, 설탕과 함께 배합한 잔두야는 인기가 좋았다. 그해 5월 피에트로 페레로는 동생 지오반니 페레로와 함께 공장을 세우면서 공식적으로 회사를 출범시켰다.
전신인 잔두야를 바탕으로 빵에 바르는 크림 형태로 진화시킨 시도는 3년 뒤 시작됐다. 더운 여름, 페레로의 직원들은 고형이었던 잔두야가 열기에 녹아내리는 것을 막으려 심혈을 기울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다 결국 녹아내린 잔두야를 그냥 빵에 발라 먹으면 안 될까 하고 발상을 전환했다. 이후 창업자의 아들인 미켈레 페레로가 미국 음식 전문지에서 알게 된 레시피를 통해 레시틴을 추가로 첨가하면서 부드러운 크림 형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크림 형태로 만든 제품은 ‘수페르크레마’라는 이름을 달고 처음부터 가정에서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용기에 담아 판매됐다.
수페르크레마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경쟁자들도 많아졌다. 1957년 페레로는 또 한 번 중요한 판단을 내렸다. 바로 코코아의 대용물이 아니라 진짜 코코아와 코코아버터를 더 많이 사용해 제품의 품질을 향상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소비자와의 소통을 위해 브랜드 이름을 짓는 일부터 로고와 패키지 디자인까지 감각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 결과 마침내 1964년 누텔라라는 새로운 브랜드가 세상에 나왔다. 수페르크레마를 대체한 이 브랜드 이름은 헤이즐넛을 뜻하는 영어 ‘너트(Nut)’에 ‘엘라(Ella)’라는 여성 이름을 접미사로 붙여 만들었다. 브랜드 이름이 정해지자 페레로는 곧바로 로고 및 패키지 디자인에 착수했다. 의뢰를 받은 전문 디자이너들은 로고에 쓸 서체로 ‘헬베티카’ 미디엄 폰트를 선택했고, 잘 구운 빵에 선명한 갈색의 누텔라 크림이 발린 그림을 넣었다. 현재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은 라벨 디자인이 만들어진 것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용기 디자인에도 변화를 줬다. 누텔라는 초기 14가지 유형의 서로 다른 용기에 담아 팔리면서 한동안 다양한 용기 덕에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제품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판단 아래 숟가락이나 나이프로 크림을 퍼내기 좋은 각도까지 고려해 주둥이가 넓은 ‘펠리칸 자(Pelikan Jar)’라는 용기를 개발하고 표준화했다. 사실 출시 초반에는 펠리칸 자의 인기가 그다지 좋지 못했으나 오늘날에 와선 펠리칸 자 용기에 담긴 누텔라 자체가 상징적인 아이콘이 되었을 정도로 소비자들의 뇌리에 깊이 자리 잡았다.
이들의 성공은 세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먼저 소비자는 잘 구운 빵 위에 선명한 갈색 누텔라 크림을 바른 그림과 함께 한 번도 변하지 않는 믿음직한 로고 디자인을 보며 기대를 품게 된다. 그러고 나서 펠리칸 자라고 부르는 용기가 주는 상징적 경험, 즉 흰색 뚜껑을 열면 모습이 드러나는 금박의 덮개를 뜯고 크림을 떠서 갓 구운 빵에 발라먹는 즐거운 상상이 실현되기에 이른다. 마침내 헤이즐넛과 코코아의 맛을 그대로 살리면서 7가지 원료를 배합해 독특한 질감과 더욱 진한 풍미를 살린 이 크림의 맛을 느끼면 로고와 용기 그리고 제품의 맛까지 한꺼번에 각인된다.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상징적인 아이콘이자 차별적인 스타일의 대표적 사례로 자리 잡은 누텔라의 이 모든 점이 창업 후 20년 만에 나왔다는 것이다. 누텔라는 브랜드의 성공이 단순히 스토리텔링이나 유행에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모방할 수 없는 가치를 독창적이면서도 지속적인 디자인과 결합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뒤따를 때, 비로소 브랜드는 한 단계 더 높은 명성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