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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덕하 Jun 11. 2022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바칼로레아 문항 중 발췌


위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물어져야 할 질문이 두 가지 있다. 첫번째로, 진리는 존재하는가? 두번째로, 진리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 않는가?


첫 질문부터 시작하자. 진리는 존재하는가? 진리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서는 전통 서구 철학과, 그에 반기를 든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플라톤이건, 아리스토텔레스건, 로크나 데카르트나 흄이건 모더니즘과 그 이전 철학을 관통하는 단어를 들자면 '이성중심주의'와 '진리에 대한 절대주의'가 될 것이다. 서구 철학의 역사는 어떠한 현상, 사물, 더 나아가 세계를 포섭할 수 있는 인식론적 토대를 가꾸는 것으로 시작했다. 존재와 비존재, 형상과 질료, 유물론과 유심론, 유한자와 무한자 등의 개념들을 도입하며 나아간 서구 철학은 세계를 이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즉 체계화 혹은 범주화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또한 세계를 근본적으로 추동하는 절대 진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저마다의 사변 논리에 근거하여서 각기 다른 형이상학을 주창했다. 근대에 와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사변적 철학과 결별하면서 인간 이성에 한계를 상정했지만, 그 역시도 이성적 범주화를 토대로 인간 인식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전통 철학과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철학은 그 토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종교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자연과학적으로도, 인류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철학은 더 이상 삶을 설명하는 데에 실패했다. 해서 1880년대,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는 서구 철학의 전통에 반발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은 보이는 다른 것에서부터의 의미 부여를 말한다. ‘실체’라든가 ‘본질’은 관점적인 것으로서, 이미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그 바탕에는 ‘그것이 내게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있다."


니체에 따르면, 철학적 전통이 실체라고 여겼던 것, 즉 진리란 허상이다. 전통적 서구 철학에서, 진리는 진술과 사태간의 대응이라고 이해되었다. 하지만 니체는 인식과 관심 사이에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꼬집는다. 진리가 진술과 사태의 대응이라는 문장은 다시 말해, 형이상학이란 개념적 언어로서 한계지어진 기호의 세계라는 뜻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니체에 따르면 우리가 의식할 수 있고 기술할 수 있는 세계는 단지 표면의 세계, 일반화된 세계에 불과하다. 의식되는 모든 것은, 무엇보다도 의식됨으로 인해, 그리고 언어로 기술됨으로 인해, 평면적이고, 주관적이며, 상대적으로 어리석고 일반적인 것이 된다.


더 나아가 니체에 따르면, 이 세계에 오직 존재하는 것은 가시적 세계의 생성과 변화뿐이다.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실체나 진정한 실제, 한때 플라톤이 '이데아'라 불렀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는 세계이며 카오스이다. 이때의 세계는 그 자체가 카오스이기에 어떤 질서와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이제까지 철학 혹은 종교적 세계관으로 제시된 것은 단지 카오스를 회피하려는 인간 욕구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돌아와서, 첫번째 질문에 대하여 니체는 진리는 없다고 말했다. 이때 그가 의미하는 바는 절대 진리란 없으며, 여태껏 철학계가 고수한 진리 개념이란 카오스인 세계를 위조하려는 의지, 다시 말해 권력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번째 질문에 대해 답해 보자. 진리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 않는가? 이 때의 진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리의 상대성에 대한 얘기에서 니체를 빼놓을 수 없었듯이, 진리와 위안의 관계에 대해서는 진리의 계보학을 탐구한 철학자 푸코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니체가 진리에의 의지를 권력에의 의지라고 말했던 것에서 한 세기가 지난 시점에, 푸코는 지성사와 과학사를 사유하면서 진리의 속성에 대해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한다.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정신의학의 지성사를 탐구하면서 담론과 권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광기에 대한 진술은 정신의학의 구조적 공간, 즉 담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때 담론은 진술의 연합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진술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대상들과의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또한 담론이라는 구조가 필수적이게 된다. 그런데 어떠한 담론이 형성되는 동안에는,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하고, 재분배하는 일련의 과정들’ 이 존재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식과 권력이 서로에게 이바지하는 담론의 계보학이다.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지식의 대상을 지정하고 지식의 절차를 지배한다. 이렇게 형성된 지식은 다시 거꾸로 권력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권력에 의해 담론이 형성되었을 때, 담론은 다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지식-권력 복합체라고 부르는데, 이때의 지식은 권력에 의해 조건지어져서 담론을 형성하지만, 담론 속의 지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단순히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로 작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푸코는 근대 인문과학을 생산적 권력의 산물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또다시 신체를 해부학적으로 분석하고 신체 효율성을 증대함으로서 권력에 더욱 공헌하게 한다.


다시 진리의 얘기로 돌아와 보자. 진리가 위안을 주거나 주지 않는 것, 즉 진술로서 기능하는 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정한 담론 내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때 푸코에 따르면 담론이란 권력에 의해 형성되어 지식-권력 복합체를 이루는 것이며, 따라서 니체가 말한 바대로 진리에의 의지란 권력에의 의지와 동어가 된다.


그렇다면 계보학적으로 볼 때에, 어떠한 불편한 진리가 존재하고 그와는 다른 진술로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이 존재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 된다. 급진적으로 서술하면, 기존의 질서 및 권력이 무너지는 것을 불편이라고 하고, 기존의 질서 및 권력의 강화를 위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리는 절대불변하며 보편타당한 형태로 주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형성되고 또한 권력을 강화하는 담론으로서 형성된다. 다시 말해, 진리는 권력에 의해 담론 내 진술로서 생겨나, 카오스인 세계를 위조하고 지식-권력 복합체로서 기능하면서 권력을 강화하는 작동을 한다. 따라서 ‘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라는 위 물음은 성립할 수 없다. 진리는 담론 속에서 작동하며 기존의 질서와 권력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즉, 진리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덧붙이자면, 이러한 서술이 인문학의 범위 내에서만 성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푸코가 담론에 대해 탐구했던 것이 정신의학이었듯이, 자연과학 혹은 사회과학적 연구라 할지라도, 연구의 주제를 설정할 때, 연구대상을 상정할 때, 실험을 설계할 때,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때, 학회에서 채택될 때, 즉 진술이 형성되는 그 어떤 순간에도 지식-권력 복합체는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족.
니체의 진리에 대한 주장은 단순히 한 명의 사상가의 주장이라기보다는, 현대 철학이 맞닥뜨리게 될 필연적인 허무주의였다. 자연과학과 철학은 서로 중대한 영향력을 주고받는데, 현대에 와서 인류는 이성에 대한 여러 도전을 마주한다.

물리학이 거시세계만을 다루었을 때 뉴턴의 고전역학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어떠한 계가 주어지고 물체의 질량, 속도 등 필요한 데이터를 측정하면 그것의 운동량, 에너지, 여타 모든 역학적 데이터를 측정하거나 계산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계의 운동을 공식화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 이 놀랍고도 이성중심적인 발견은 데카르트를 비롯한 합리주의 철학의 근간적 사고방식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분자와 원자, 그보다 작은 입자들의 미시세계가 발견되자 이러한 고전역학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미시세계에서는 어떠한 입자의 위치를 관측하는 순간부터 그것의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관측할 수는 없다. 심지어 입자는 관측하기 전에는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것의 존재 확률이 파동함수로만 나타내질 수 있을 뿐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인간은 예측가능성이 없거니와 정확한 측정조차 불가능한 세계, 미시세계를 맞닥뜨린 것이다.

그렇다면 미시세계가 아닌 쪽은 어땠을까? 예측할 수 있었던 거시세계로 다시 나아가보자. 20세기, 거시세계에서는 우주와 그것을 이루고 있는 네가지 힘이 발견되었고, 인류는 우주의 팽창을 관측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와 암흑 에너지는 어떻게 작용하여 우주의 팽창을 가속화시키는지, 그 팽창이 가속되다가 빅 크런치를 맞을지, 혹은 열 죽음을 맞을지는 알 수 없었다. 현재의 우주가 형태를 지니고 있게 해주는 힉스 장의 퍼텐셜이 왜 가장 안정적인 상태에 있지 않은지, 준안정 상태의 그것이 곧 붕괴하지는 않을지 역시도 알 수 없었다. 미시세계건 거시세계건 이성의 한계는 명확했다.

그렇게 현대에 와서 예측 불가능성의 세계에 인간은 내동댕이쳐졌다. 비단 자연과학뿐 아니라 복잡다단해진 사회와 종교적 무질서 속에서 니체와 같이 절대 진리는 없다는 주장, 진리의 상대주의가 제시된 것은 필연에 가까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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