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도훈 Feb 27. 2024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를 통해 바라본 선과 악의 모호성

사회 속에는 다양한 사람이 공존한다. 사람들은 좋은 일, 이를테면 기부, 선행, 봉사 등을 하면 선한 사람이라 말하고 나쁜 일, 즉 누군가를 때리고 욕하고 죽이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정부와 공권력은 법을 잣대로 악하다고 규정된 사람들,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을 처벌하며 교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몇몇 국가에서는 범죄자에게 교화 대신 사형선고를 내리기까지 한다. 한국에서는 지난 몇 개월간 신림동 칼부림 사건, 서현역 칼부림 사건, 신림동 등산로 성폭행 살인 사건 등 흉악한 강력 범죄가 연이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사형제의 부활, 물리적‧화학적 거세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관련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작품 <시계태엽 오렌지(1971)>는 현시대에도 적용되는 유의미한 메시지와 물음을 전한다.

         


Ⅰ. 스탠리 큐브릭과 세 작품

 

저널리스트였던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감독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큐브릭의 작품들은 대개 범죄, 전쟁, 스릴러 장르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는 세계대전이라는 당대의 시대적 배경이 그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일 것이다.

미국인이었던 그는 <스파르타쿠스(1960)>를 제작한 이후, 영국으로 넘어가 남은 여생 동안의 작품 활동을 한다. 당시 1960년대의 세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미소 간의 냉전이 극심한 시기였으며 베트남 전쟁이 진행 중이던 시기였다. 또한 자본주의와 과학 기술의 발전이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1969년, 인류 최초로 지구 이외의 행성에 발자취를 남긴 시기였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성장과 파괴가 공존하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1964)>에서는 미소 간의 핵 전쟁을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다루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서는 인간이 미래에는 인공지능의 통제 아래에 있을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과학기술의 진보가 무조건 긍정적인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제작된 <시계태엽 오렌지(1971)>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국가가 어디까지 억압할 수 있는가에 질문을 던지며, 인간을 기계처럼 교화시키려는 미래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세 작품 모두 인간이 발명하고 발전시킨 기술에 의해 다시 인간이 피해를 보는 근미래의 디스토피아적 공포를 보여주며 진보와 폭력성은 함께 발전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의미한 주제라는 점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사회적 비판의식과 시대적 선구안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Ⅱ. <시계태엽 오렌지>의 배경     


해당 작품은 1962년 앤서니 버지스가 출간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원작 소설의 구조와 줄거리를 따라가지만 다른 결말로 마무리된다. 원작 소설에서는 주인공 알렉스가 도덕적으로 성장한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지만, 큐브릭은 해당 결말을 제외했다. 취향 차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측면에서는 큐브릭 식의 마무리가 효과적이라고 본다. 알렉스가 앞으로 도덕적으로 살아갈지, 혹은 이전과 같이 살아갈지를 관객의 상상에 맡겨두기 때문이다.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제목은 모순되는 두 개의 명사가 합쳐진 형태이다. <왜 시계태엽 바나나가 아니라 시계태엽 오렌지일까?>라는 책에선 작품의 제목에 관한 여러 가지 일화와 추측을 제시한다. 먼저, 시계태엽 오렌지는 앤서니 버지스가 런던 술집에서 들었던 말로, 상충되는 단어가 인상 깊어 사용했다는 의견이 있다. 혹은 말레이시아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그가 인간을 뜻하는 말인 ‘오랑’을 오렌지로 변형시킨 것으로, ‘시계태엽 인간’이라는 의미라고 말한다. 또는 신선한 과일인 오렌지와 기계인 시계태엽을 붙인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어떤 의견이든, <시계태엽 오렌지>는 두 가지의 모순되는 단어를 결합시킴으로써 인간의 기계화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Ⅲ. 아이러니의 미학     


제목에서부터 그렇듯 시계태엽 오렌지는 아이러니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작품이다. 영화 속에는 여러 모순적인 상황, 장면, 연출 등이 존재하는데, 단연 가장 돋보이는 아이러니는 장면과 음악과의 조화다. 잔혹하고 폭력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알렉스는 베토벤에 푹 빠져있으며 ‘환희의 송가’로 알려진 ‘제9번 교향곡 4악장’을 즐겨 듣는다. 그가 베토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그의 대사뿐만 아니라 방 안에 걸려있는 악보와 초상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영화 속에는 웅장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의 환희의 송가 외에도, 밝고 경쾌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이나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1952)>의 OST로 나왔던 행복한 분위기의 ‘Singing in the rain’이 흘러나온다. 밝고 긍정적인 음악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 음악들은 알렉스가 폭력, 강간, 부도덕적인 성행위 등을 할 때 등장한다. 잔혹한 장면들과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의 음악의 결합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지만 상황을 더욱 효과적으로 풍자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대유법적 연출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이전부터 사용했던 연출 방식이기도 하다.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의 마지막 장면이 대표적이다. 미국의 폭격으로 소련의 심판의 무기(둠스데이)가 터지고 지구는 연쇄적으로 폭파하면서 파멸로 향한다. 인류가 멸망하는 순간을 담은 끔찍한 장면이지만 이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희망을 노래하는 Vera Lynn의 “We’ll meet again(언젠가 다시 만나리)”이다. 즉, 영상 속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지만 음악은 다시 만나자는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다. 영상과 음악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함은 핵전쟁의 위험성을 효과적으로 풍자하며 공허함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그의 작품들 속, 특히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대유법적 연출을 많이 사용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인간과 사회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우리 스스로도 알고 있듯 모순된 행동과 생각을 하는 존재다. 또한 사회는 법과 질서, 체계가 모두에게 평등하며 잘 짜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순점들이 자주 포착되기도 한다. 결국 인간과 사회 자체가 모순적이니 작품을 표현하는 데도 모순적인 연출을 사용했을 수 있다. 두 번째로, 변증법을 통한 풍자다. ‘폭력적이고 불쾌한 장면(正)’과 ‘밝고 장엄한 음악(反)’을 통해 해당 장면들을 단순히 불쾌하게 느끼는 것이 아닌, 이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 의문들을 효과적으로 발생(合)’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큐브릭 식 아이러니 연출은 의도하는 바가 관객들에게 적절하게 전달되는 효과를 지닌다.


          

Ⅳ. 선과 악, 그리고 물음     


어떤 영화는 명확한 답과 메시지를 제시하는 반면 어떤 영화는 단지 물음표만을 던지기도 한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후자에 해당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다 보면 ‘국가 권력이 개인을 통제하는 것은 정당한가?’, ‘인간을 교정한다는 건 가능한가?’,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 옹호되어야 하는가?’ 등 수많은 질문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자연스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영화 초반, 알렉스는 그 자체로 악이라고 볼 수 있다.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인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알렉스가 수감되고 루도비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기본적으로 교도관, 의사, 정치인 등은 악과 반대되어 보이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즉 선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여겨지기 쉽다. 특히 주지사가 등장할 때 흘러나오는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은 이러한 느낌을 증대시켜준다. 그러나 알렉스가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환한 미소를 짓는 이들을 보면 그러한 생각에 의문이 생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여도,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실험 약물을 주입하고, 고통을 주며 웃는 이들이 과연 선이라고 확언할 수 있을까?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부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교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공권력, 그리고 범죄자 알렉스. 여기서 선과 악이 누구라고 뚜렷이 말할 수 있는가? 결국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와 치부가 들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루도비코 프로그램을 끝마치고 세상에 나온 알렉스는 가족으로부터 버려지고 공권력에 의해 학대와 조롱을 당한다. 알렉스가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중반부부터 후반부에 이르는 공권력과 사회의 잔행을 보다 보면 악이라는 것이 범죄자라는 특정 인물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침내 선과 악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Ⅴ. 범죄자 처벌에 관한 담론의 방향성    

 

‘혐오 사회’라고 표현한 누군가의 말처럼 현대 사회에는 멸시, 조롱, 선 긋기 등 다른 사람을 향한 적대심이 넘쳐난다. 이러한 태도가 단순히 생각이 아닌 말과 행동으로 옮겨지면, 그로부터 범죄가 발생한다. 당연히 법을 어긴 사람은 처벌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사회적 담론이 이들을 순전히 절대 악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얼마나 나쁘며,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에만 초점 맞춰져서는 안 된다. 영화 속 루도비코 프로그램처럼 자유의지를 뺏어 인간을 기계화시키는 전체주의적인 사고로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가 다시 나치즘이나 파시즘으로 역행할 가능성을 만든다.

따라서 강력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꾸준히 등장하는 담론인 ‘사형제의 부활’은 사실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 사형제의 실효성조차 의문이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고대의 처벌 체계는 현대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 수천 년이 지난 사회라면 그에 걸 맞는 바람직하고 세련된 정책이 필요로 하다. 같은 유형의 범죄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면, 우선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은 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할지가 아니라 무엇이 원인이며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할지다. 그보다도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문제가 발생하기 전, 위험을 감지하고 사회적 보호망과 대책을 확립하는 것이다. 소를 훔쳐간 도둑을 찾아 처벌한다고 해서 다른 도둑이 생겨나지 않을 거라는 건 환상이다. 도둑이 생겨나지 않도록, 적어도 줄어들 수 있도록 제도를 확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특정 뉴스가 이슈화되면 모든 화살이 그곳을 겨누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남들의 말을 쫓는 것보단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과연 화살이 바라보고 있는 저것이 악이 맞는가? 아니, 선과 악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가? 혹시 악을 규정하여 비난하고 있는 내가 악은 아닐까?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1971)>를 통해 개봉한 지 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의 한국 사회와 그 속에 사는 우리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나무가 되고자 하는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