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나의 주관적인 생각들
빨간 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나의 주관적인 의견 혹은 어떠한 개념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 내용이다.
* 제 주관적인 생각을 이름 없이 다른 곳에 옮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생각의 모방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생각의 체득이 아닌 단순한 베끼기의 방식일 뿐입니다. 또한 모든 방식은 제 주관적인 생각이므로 절대적인 법칙처럼 쓴 글이 아닌 것을 명시합니다.
15p
베이컨은 형태들의 배치를 생각한 다음에 그 형태들이 스스로 형성되는 것을 관찰한다. 그리고 그런 우연에 의한 형태가 매우 정확하면서도 동시에 모호해야 한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래야만 이미지가 더욱 생생해진다고 믿었다.
나 또한 이런 방식을 추구한다. 그러기에 그림을 그릴 때 정확한 스케치를 생략한다(가끔은 스케치를 하지만 간략한 덩어리만 잡는 식으로 그리곤 한다). 나는 ‘온전히’ 우연만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의 일과로 예를 든다면, 나는 큰 덩어리만 계획할 뿐, 그 덩어리가 어떻게 나아갈 지는 우연과 즉흥에 맡긴다. 내 그림 또한 그렇게 되길 바란다. 여러 우연들이 반복된다면 정확하지만 모호한 이미지가 나온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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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나는 베이컨이 자기 그림을 ‘명랑한 절망감’과 관련이 있다고 한 말에 다시한번 공감한다. 명랑한 절망감, 그리고 하나 더! 베이컨은 타인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그린다. 베이컨은 오로지 그 자신을 흥분시키기 위해서만 그린다. 그것이 베이컨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파워의 실체다.
명랑한 절망감이라는 단어가 좋다. 그것은 마치 블랙유머와 비슷한 뉘앙스를 지닌 것 같다. 나는 블랙 유머를 즐긴다.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시절을 유희화 하고 그것을 즐긴다. 또한 내 작품들의 주제와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더럽게 직시하며 그것을 조롱하듯(하지만 가장 솔직한 방식으로) 말하고 그리는 걸 즐긴다.
31p
나는 이곳의 무질서함 속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무질서가 내게 이미지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죠. 어쨌든 나는 무질서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내가 여기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옮긴다면 일주일 만에 그곳의 모든 것들이 무질서해질 겁니다. 나는 깔끔한 것을 좋아하고 접시 등의 물건들이 지저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무질서한 분위기는 좋아합니다.
이전의 나는 무질서를 좋아했다. 무질서야말로 나의 진정한 ‘자유’였다. 나는 나의 무질서 속에서 남이 알지 못하는 질서를 확립하곤 하였다. 하지만 타인이 내 삶, 내 공간에 들어온 이후로 강박적으로 질서의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었다. 그곳은 내 공간이자 내 공간이 아닌 모순적인 공간이 되었다. 또한 그곳의 질서를 더욱 더 추구할수록 또 다른 질서의 욕망이 생기곤 하였다. 즉 질서의 욕망으로 인한 무질서의 공간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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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 때로 음악을 틀기도 했지만 나는 음악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나는 여기에 그냥 홀로 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어쨌든 나는 일종의 몽롱한 상태에서 작업을 합니다. 하지만 작품이 모호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리고 내가 구체화하려는 감각과 감정, 생각이 모호한 상태에서 작업을 합니다.
내 방식과 비슷하다. 몽롱한 상상계에 있을 때 나는 비로소 비실제적인 인물이 된 것 같다. 편협한 생각일 수도 있으나, 자신이 예술가라 생각한다면 ‘비실제적인’ 사고를 어느 정도 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이상을 그리라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빠져나오거나 그것을 직시하거나 현실 이면의 다른 곳을 보거나 현실을 공격하거나 등등.. 예술이라는 것에는 여러 방식과 다양한 사고의 방식이 있다.
43p
궁극적으로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내 작품을 구입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개개인의 방식인 것 같다. 나는 어떠한 그림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하는 것을 그리 하고 싶지는 않다(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 혹은 비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지만 말이다).
어떤 이는 삽화의 방식을 빌려 자기 자신 혹은 이야기를 그림을 통해 설명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림을 통하여 ‘무엇’을 ‘실행’한다. 그 ‘무엇’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을 수 있다. 너무 추상적인 개념이기에 ‘그림’으로 실행하는 것일 수 있다.
63p
실베스터 : 어떤 특정한 순간이나 장면이 당신의 마음속에 고정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까?
이 질문을 보고 떠올랐던 장면이 있다. 그것은 어떤 이가 담배를 물고 정신이 아픈 아저씨에게 그 담배를 내뿜으며 말했던 장면이었다. “우산 5개 있어요.” 그 말과 그 말을 하면서 지었던 표정이 인상 깊다. 전에 글로 쓰기도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제목은 ‘부드러운 냉소, 혹은 냉소의 부드러움’이다.
오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창백한 색에 잔잔하고 차분한 분홍빛이 감돌았지만 연약하지는 않았다. 휘청휘청 연약하게 걸었지만 누구도 만만하게 그것을 건들이지는 못할 이미지였다. 평소 내가 생각한 보랏빛이나 푸른빛의 이미지와는 상이했지만 분위기는 비슷했다. 잔잔하게 겉도는 것들이 더욱 강한 힘을 지닌 것 같다.
그것은 ‘냉소’라는 것과 관련된 것 같았다. 냉소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 쌀쌀한 태도로 비웃음. 또는 그런 웃음.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포괄적으로 담아내지는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그 이미지는 ‘쌀쌀한 태도’까지는 맞고 ‘비웃음’과는 조금은 달랐다. 비웃는다는 표현 대신 조금 더 부드러운 기운이었다.
‘부드럽다.’ 라는 단어가 요즘의 키워드 중 하나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부드러움은 뿌옇고 광택이 없는 은은한 느낌인데 그것은 차가움과 따뜻함의 이분법적인 의미로 나누기에는 무리가 있다. 두 개의 특성이 다 들어가 있거나 혹은 두 개의 특성이 다 제거되어 있는 기운일 수도 있겠다.
부드러움과 냉소-어떻게 보면 차갑게 느껴지겠지?-가 결합 되면? 아주 독특한 결합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결합될 수 있다는 걸 느낀 건 바로 엊그제였다. 그 이미지와 분위기는 너무나 독특하여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사랑의 기운도, 섹슈얼한 느낌도 아니었다. 소유적인 욕망도 아니었으며 멋있는 감각도 아니었다. 비가 온 축축한 땅 위에 있는 눈빛이었다. 상대를 노려보았지만 거만하지 않았고 어리거나 성숙한 느낌도 아니었다. 그것은 가시적인 이미지로는 검정색이었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로는 잔잔한 회색에 가까웠다. 그것은 상대를 내리 깔아 보지만 입은 아주 미세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말을 수용하는 것 같으면서도 지능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무시보다는 무덤덤하게 반응한다는 말이 더 낫겠다.
게으르지만 절대로 느리게 걷지 않았고 성숙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하여 어리지도 않았다. 차가웠지만 상대의 말을 잊지는 않았고 놀리는 것 같지만 가식적이지 않았다.
분명히 냉소적인 이미지였지만 아주 부드러워 마치 그 부드러움의 모순적인 눈빛이 꿈 속 한 장면처럼 지나간 것 같았다. 그 장면을 영화로 만들었다면 하루 종일 틀어놓고 보았을 것 같다. 잔잔하지만 충격적인 장면을 본 듯. 그것이 나를 향한 눈빛이었다면 아주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모순적인 여러 가지 것들이 한꺼번에 와글와글 차분하고 침착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63p
실베스터 : 문 열쇠를 발로 돌리는 형상은 어떻게 그리게 되었습니까?
(중략)
베이컨 : 네, 맞습니다.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는 초현실주의로부터 유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경우처럼 열쇠를 손으로 돌릴 때보다 발로 돌릴 때가 왠지 더 직접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이것은 “나는. 지금. 열쇠를. 돌리고. 있어!” 라고 고함치는 것 같다. (이미지 첨부하기) ‘일반적으로’ 열쇠를 ‘손’으로 돌리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으로 열쇠를 돌리는 이미지에 익숙하다. 하지만 열쇠를 발로 돌린다면? 마치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효과’(거리감의 도구, 영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서 나왔던 방식)처럼. 이 이미지는 발로 열쇠를 돌린다는 낯설게 하기 효과를 통하여 ‘내가 지금 열쇠를 돌리고 있어’라고 고함치는 것 같다. 그러기에 더욱 더 직접적인 방식 아닐까?
67p
베이컨 : 그림에 시를 사용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나는 또한 윌리엄 예이츠의 많은 시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내가 예이츠에게 크게 감탄하는 한 가지는 그가 스스로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 (중략) ~
그들은 비록 쓸데없어 보인다 해도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삶을 생동감 있게 만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저 그런 특별한 방식으로 삶을 개방합니다.
윌리엄 예이츠 :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시와 노래, 꿈을 죽이지는 못한다. <켈트의 여명>
한 사람이 보고 들은 일들이 인생이라는 옷감의 실이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뒤엉킨 기억의 실타래에서 그 실을 조심스럽게 풀어낸다면, 어느 누구나 그에 가장 어울리는 믿음의 옷을 짤 수 있다. 나 역시 여느 사람들처럼 내 믿음의 옷을 짰다. 그러나 나는 그 옷을 입고 계속 따뜻하도록 노력할 것이며, 그 옷이 내게 어울리지 않도록 만족할 것이다. 희망과 기억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의 이름은 예술이다. ‘예술’은 인간들이 두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에 그들 믿음의 옷을 내걸어 전쟁의 깃발로 삼는 곳, 그 황량한 벌판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놓았다.
오, 희망과 기억의 사랑스런 딸이여, 잠시 동안 나와 함께 있기를!
79p
베이컨 : 당신은 모를 겁니다. 작업 중에 경험하는 절망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물감을 집어 들고 삽화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시도하게 만드는지를요. 이미지의 의도적인 표현을 깨뜨리기 위해 나는 헝겊으로 작품 곳곳을 닦아 내거나 붓을 사용하거나 뭐든 손에 들고 문질러 대거나 테레빈유나 물감을 작품에 던집니다. 그러면 이미지는 자발적으로 나의 구조가 아닌 자체적인 구조 안에서 발전하게 됩니다. 그 뒤에 내가 원하는 바에 대한 감각이 작동하기 시작하고 캔버스에 남겨진 우연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것들로부터 의도적인 이미지의 경우보다 한층 더 유기적인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실베스터 : 결정적인 때에는 아주 미친 듯이 작업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베이컨 : 그렇습니다.
실베스터 : 그렇다면 이완은 핵심적인 감각이 작동하기 시작한 다음에 오겠군요?
베이컨 : 확실히 자신의 감각 안에 있는 이미지, 즉 정신적인 이미지와는 무관한 자신의 존재 구조 안에 자리 잡은 감각적인 이미지가 우연을 통해 형성되기 시작할 때 긴장을 더 내려놓게 됩니다.
감각적인 ‘결’에 대하여 말하는 것 같다. 우연들이 착착 맞아 떨어지기 시작할 때. (하지만 ‘정확함’ 혹은 ‘자연스러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결이다.)
87p
베이컨 : 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내게 있어 이미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다룰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는데, 나는 결코 다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이미지의 폭발적인 증가’에 대하여 생각하곤 한다. sns를 통한 폭발적인 이미지의 증가. ‘이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말이다. 그것 말고 다른 방식의 이미지 또한 우리가 나타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만의 이미지’ 말이다. ‘아토포스적인 이미지’ 말이다.
107p
실베스터 : 물감을 통해 발생하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물감이 낳는 일종의 모호함을 말하는 건가요?
베이컨 : 거기에는 암시도 있습니다. 일전에 절망에 빠져 어떤 사람의 머리를 그리고 있었을 때 나는 아주 큰 붓과 많은 양의 물감을 사용하여 매우 자유롭게 채색했습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였죠. 그런데 갑자기 이미지가 분명해졌고, 정확히 내가 기록하고자 하는 이미지와 같아졌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떠한 의도를 지닌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았고 삽화적인 그림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특별한 작업 방식이 왜 삽화보다 더 통렬한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분석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림이 온전히 자기만의 삶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은 덫을 놓아 잡고자 하는 이미지처럼 독립적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자력으로 살기 때문에 이미지의 본질을 보다 통렬하게 전달합니다. 따라서 미술가가 감각의 밸브를 열어 보는 이를 보다 맹렬하게 삶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이렇게 그려야 겠다!’ 라고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 있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억지스러운 방식인 것 같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리는 것이 나의 감각, 감정 등을 자유로이 풀어주는 것이고 그것들을 아주 자유롭게 내 손에 각인시켜 물감을 섞고 채색하고 지워내고..
결과를 보면 나의 그날의 일기를 보듯, 내 삶을 보듯 나와 나의 감정이 분리된 듯 그 작품에 나오곤 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설명’ 혹은 ‘이야기’로 말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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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결코 같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그런 일은 유화 물감에서만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유화 물감은 너무나 섬세해서 한 가지 색이나 소량의 물감만으로도 이미지를 전혀 다른 것으로 탈바꿈시켜서 함축하는 의미를 완전히 바꾸기 때문입니다.
실베스터 : 잃어버린 것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다른 것을 얻을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왜 계속해서 그리기보다는 파괴해 버리는 겁니까? 다른 캔버스 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베이컨 : 왜냐하면 때로 우연이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캔버스가 완전히 막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물감이 있게 됩니다. 단순한 기술적인 문제입니다만, 너무 많은 물감이 있게 되면 진행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실베스터 : 물감의 특별한 질감 때문입니까?
베이컨 : 나는 두껍게 채색한 물감과 얇게 채색한 물감 사이를 오가면서 작업합니다. 그림의 어떤 부분은 아주 얇지만 어떤 부분은 아주 두껍습니다. 그림이 막히면 삽화적인 방식으로 물감을 칠하기 시작합니다.
실베스터 : 그 이유는 뭔가요?
베이컨 :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물감과 삽화를 통해 전달하는 물감의 차이를 분석할 수 있습니까? 말로 설명하기에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그것은 본능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 어떤 물감은 신경계로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어떤 물감은 뇌를 통한 긴 판단 과정을 거쳐 이야기를 전달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매우 비밀스럽고 어렵습니다.
나는 우연의 방식으로 화판 위에 색을 칠한 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채색된 것들을 ‘처음의 것’이라 칭한 뒤 다시 새롭게 그 위에 작업을 한다. 그러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 방식대로 그린 것이 더 좋긴 하다. 내 의도와 맞아 떨어져 좋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질펀하고 복잡한 느낌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115p
실베스터 : 당신은 스케치나 드로잉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작품을 위해 습작을 하지도 않지요?
베이컨 : 종종 그래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하지는 않습니다. 내 작품과 같은 경우에는 그런 방식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거든요. 실질적으로 질감과 색채, 물감이 움직이는 모든 자취가 매우 우연적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스케치를 그리건 간에 작품이 진행될 방식에 대한 뼈대 정도만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겁니다.
나 또한 그렇다. 내 그림을 계획(스케치나 에스키스)에 맡기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 삶의 방식과도 연관되어 있다. ‘계획’이라는 것은 미래와 연관되어 있다. 나는 미래에 대하여 깊게 논하고 싶지 않다. 현재라는 우연에 맡겨 방향성이라는 것만을 설정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한 삶의 방식이 더욱 ‘즐겁다!’
129p
베이컨 : 나는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다는 벨라스케스 자신이 당시의 왕실과 특정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믿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훌륭한 미술가는 그와 같은 상황을 무시하라는 압력을 받을 것입니다. 영상 필름을 통해 기록이 가능하기에 그는 자신의 활동 중 기록의 측면은 다른 것이 장악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자신이 몰두하는 바는 이미지를 통해 감각을 열어 주는 것뿐이라는 점도 압니다. 또한 나는 이제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고 우연이고 전적으로 무상한 존재이며 이유 없이 삶이라는 게임을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벨라스케스가 그림을 그릴 때에도,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릴 때에도 삶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간에 그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한 종교적인 가능성에 의해 얼마간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종교적 가능성이 완전히 무효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 방식에 따라 잠시나마 스스로를 기만하며 즐겁게 만들려 노력함으로써, 그리고 의사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연장함으로써 매우 긍정적인 것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제 모든 예술은 사람들이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게 하는 게임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술은 항상 그러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전적으로 게임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뀌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흥미로운 것은 미술가에게 미술이 훨씬 더 어려워질 거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그는 그 게임을 정말로 심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p147
베이컨 :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은 겉으로 보이는 외관을 크게 넘어서서 대상을 일그러뜨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왜곡은 다시 외관의 기록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실베스터 : 그림은 대상 인물을 다시 상기시키는 방식에 가깝다는, 그러니까 그리는 과정은 기억해 내는 과정과 가깝다는 뜻입니까?
베이컨 : 네 맞습니다. 이런 작업이 진행되는 방식은 대단히 인위적인데, 내 경우에는 눈앞에 존재하는 모델이 외관을 상기시킬 수 있는 그 인위성을 방해합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실재를 왜곡(과정) --> 이것을 기억하는 과정이 바로 그림이다!
실재(대상)를 왜곡(과정, 행위) --> 이러한 과정, 왜곡을 기억하는 과정이 바로 그림이다, 라는 것이다.
p 151
베이컨 : 아마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점을 전적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어느 누가 이미지에 깊은 상처를 내지 않고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을 사실로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가끔 이미지는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곤 한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실베스터 : 당신은 하나의 이미지에서 다양한 수준의 감각을 기록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당신이 그 사람에 대한 애정과 적대감을 동시에 표현할 수도 있다고, 즉 당신이 만드는 것이 애무이면서 동시에 폭력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베이컨 : 그건 너무 논리적인 생각입니다. 나는 작업이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습니다. 나의 작업은 보다 깊숙한 것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이미지를 내게 보다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는가? 이것이 전부입니다.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방식으로는 ‘낯설게 하기 효과’가 있다.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괴기스럽게 변형할수록 우리가 보는 것과 멀고, 낯설어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현실을 아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p 161
실베스터 : 방에 사람이 홀로 있는 그림에 대해서는 상당히 공포스럽다고 할 만한 미실 공포증과 불안의 느낌이 있다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불안감을 의식합니까?
베이컨 : 나는 그 점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 그림들 중 상당수가 늘 불안한 상태에 있었던 어떤 사람을 그린 것입니다. 그림을 통해 그것이 전달되었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이미지를 포착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이 매우 예민해져서 거의 히스테리 상태에 있었는데, 어쩌면 이것이 그림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항상 가능한 한 직접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무언가가 직접적으로 다가오면 사람들은 공포스럽다고 느낍니다. 너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때때로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거든요. 사람들은 사실 또는 진실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불쾌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에 내가 쓴 설명을 아주 구체적으로 쓴 구절인 것 같다. 내 의견 또한 이와 같다.
p171
베이컨 : 나는 잘 정돈된 이미지를 원하지만 그것이 우연히 발생하기를 바랍니다.
억지로 발생한 것들은 잘 정돈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자연스러운 인위성을 추구하는 것 같다. 인위적인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실베스터 : 하지만 당신은 우연이 너무 쉽게 생겨나는 것을 바라지 않을 만큼 절제합니다.
베이컨 : 나는 작업이 수월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우연을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우연은 그런 것입니다. 우연을 명령한다면 그저 또 다른 종류의 삽화를 부과하게 될 뿐이니까요.
p174
실베스터 : 삽화적인 형태와 비삽화적인 형태의 차이점을 정의 내릴 수 있습니까?
베이컨 : 삽화적인 형태는 사고력을 통해 형태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즉각적으로 말해 주는 반면 비삽화적인 형태는 먼저 감각에 호소하고 그 다음에 서서히 사실을 향해 다시 흘러간다는 것이 그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건 사실 자체가 얼마만큼 모호한지, 외관이 얼마만큼 모호한지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므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형태를 기록하는 것이 그 기록의 모호함을 통해 사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나는 이런 것을 그릴 것이다!’라고 호소하는 것은 비삽화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삽화적인 것일 수 있다.
*
나는 아직도 이 책을 읽고 있다. 어려운 개념 혹은 어려운 사고들이 많지만 죽죽 읽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추상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구체화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가장 좋았던 구절 혹은 내용은 예이츠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와 베이컨은 아주 다른 사람이지만 공통분모가 분명히 있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무질서 속의 질서였다.
나는 무질서를 추구하는 동시에 질서 또한 추구한다. 가끔은 그 방식에 대하여 헷갈리거나 혼동되기도 한다. 나는 분명 질서를 추구하는데 흐트러진 무질서의 방식을 하고 싶다는 생각 또한 많다. 이것은 동시에 행할 수 있다. 무질서 속에 질서를 잡거나, 질서 속에서 무질서를 잡거나. 이 두 가지 방식(혹은 이외에도 많은 여러 가지 방식)은 동시에 행할 수 있다.
정돈이라는 것도 그렇다. 정돈한다고 하여 완벽한 정돈은 있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정돈이 심화될수록 더욱 큰 정돈의 욕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무질서의 상태로 공간을 남겨둔다면 그 것의 정돈을 확립시킬 수 있다. 항상 놓았던 곳에 붓을 놓는다거나, 항상 어떠한 곳에 양말을 집어던진다거나.. 내가 놓는 물건의 위치는 비슷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헝클어진, 정돈되지 않은 위치에 던져놓아도 질서는 생긴다. 또한 자유라는 것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자유에게는 질서와 무질서가 둘 다 필요하다. 질서라는 것을 먼저 확립한 다음 무질서를 말하는 것 같다. 질서 속의 무질서 말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유인 것 같다(여기에서 무질서라는 단어의 개념이 자유의 개념을 다 설명하기엔 힘들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