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주관적인 나의 생각들
빨간 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나의 주관적인 의견 혹은 어떠한 개념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 내용이다.
* 제 주관적인 생각을 이름 없이 다른 곳에 옮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생각의 모방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생각의 체득이 아닌 단순한 베끼기의 방식일 뿐입니다. 또한 모든 방식은 제 주관적인 생각이므로 절대적인 법칙처럼 쓴 글이 아닌 것을 명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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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서 출발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단순히 어떤 증세가 있는 환자로 환원시켜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비실제적인 것, 다시 말하면 다루기 힘든 것을 들어야 한다는 원칙 말이다. 이렇게 하여 사례를 들지 않고 오로지 일차 언어의(메타 언어가 아닌) 행위에만 의존하는 ‘극적인’ 방법이 선택 되었다. 연인의 담론을 묘사하는 것은 그 가상으로 대체되었고, 분석이 아닌 언술 행위를 무대에 올려놓기 위하여 이 담론에서는 그 근본 주체인 ‘나’가 복귀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롤랑바르트는 구조주의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시된 것은 하나의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는 심리적인 것이 아닌 구조적인 것이다. 그것은 말(parole)의 자리를 읽게 해준다. 말하지 않는 그 사람 앞에서 혼자 마음속으로 사랑스럽게 말하는 누군가의 자리를.
여기에서 parole(빠롤 혹은 파롤) --> 랑그와 빠롤이라는 개념. 언어활동은 랑그와 파롤이 있는데 랑그는 사회적이고 체계적인 측면이고 파롤은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발화의 실행과 관련된 측면이다.
비실제적인 관념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에 생겨난 아주 독특한 한 가지 환상이 있다. 그것은 일이 잘못되어 갈 때 우리에게 실제적인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환상이다. 그러나 정작 일이 아주 틀어졌을 때 우리에게는 비실제적인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 훨씬 맞는 얘기다. 실제적인 사람은 단순히 일상생활과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방식들에 익숙한 사람을 말한다. 자끄 엘룰의 말을 빌자면, ‘사실’에 집착하는 세상은 항상 현실적이고 적용을 잘 하는 것만을 최고로 친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비인간화의 지름길이다.”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방식들에 익숙하지 않은 것. 다른 방식으로 사고를 비트는 것이 아닐까? 감각과 감정을 일반화 시키지 않고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는 생각들. 어찌 보면 몽상이고 환상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지극한 현실 속에서 머물지 않고 자신의 꿈을 꾸며 이상화 된 생각을 한 사람들.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고 탐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어떠한 것을 단언하거나 판단해버리지 않고 가능성의 여지를 남기는 것들. 편집증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 책은 바로 비실제적인 것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여자는 이렇다, 남자는 이렇다.’ 혹은 감정에 대한 일반화를 범하는 문제에 대하여(전체) 그 문제를 ‘개인’으로 다시 환원시키는 것 같다. 개개인마다 서로 각기의 감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 문제를 복잡하게 풀어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혹은 그 이상의 관계)의 행위 혹은 말들을 일반적이고 특별하지 않은 것들로 치부하거나 판단하곤 한다. 연인에 관한 가볍고 얕은 위로의 책들만 봐도 그렇다.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남자에 대하여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들은 단순한 존재이다.’ 라는 언어를 내세우며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모든 남자가 다 단순할까?’ 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은 ‘그녀, 혹은 그’에 대한 사랑(굉장히 추상적인 개념)에 대하여 분석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해놓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함부로 판단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지극히 공감 가능하고 그것이 공감을 위한 책이 아닌 분석을 위한, 감각과 감정과 사랑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시키고자 노력한 책이라는 느낌이었다. 느낌이라는 감각을 사실이라는 것으로 환원시킨 것이 아니라 ‘느낌’과 ‘감정’을 그대로 구체화시켜 묘사한 느낌이 강하였다.
40p
일생을 통해 나는 수백만의 육체와 만나며, 그 중에서 수백 개의 육체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백 개의 육체 중에서 나는 단지 하나만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보여준다.
그 선택은 그렇게도 엄격하기에 유일한 것만을 취하며, 바로 이 점이 분석적 전이와 사랑의 전이의 다른 점이라고 말해진다. 전자가 보편적이라면 후자는 특이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그리고 얼마나 많은 탐색이) 필요했던가! ~ (중략) 왜 나는 그런 사람을 원하는 걸까? 왜 나는 그를 지속적으로, 초췌하게 원하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것은 그의 전부일까?(실루엣, 형체, 표정)? 아니면 단지 몸의 한 부분일까? 그 경우 내 물신 숭배의 대상은 이 사랑하는 몸의 어떤 것일까? 그 크기는? 어쩌면 아주 하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연유로? 손톱을 자른 모양, 약간 비스듬하게 깨진 이, 흘러내린 머리카락, 말하거나 담배 피우면서 손가락을 벌리는 모양? 육체의 이 모든 주름에 대해 나는 근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근사해란, 그것이 유일하기 때문에 내 욕망이야,란 뜻이다.
나는 육체의 모든 반짝이고(화려하게, 장식적으로 반짝이는 것이 아닌 그 고유의 색을 나타내며 반짝이는 것.) 각진 것에 대하여 ‘근사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그의 눈에 한동안 매료되어 있었고 그는 빛나는 흑빛 머리카락, 각진 어깨와 다리,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근사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 욕망이나 다름없었지만 나는 그를 내 욕망이기에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욕망은 내 사랑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기도 하였다.
55p
이 취소된 대상으로부터 내 욕망을 욕망 그 자체로 옮기기 위해서는, 어느 섬광 같은 순간에 그 사람을 일종의 무기력한, 박제된 사물로 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단지 그 도구에 불과하다.
자신의 모든 상처, 결핍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되며(‘그’라는 대상을 통하여) 그것을 인정하며 욕망을 포기하고 ‘그’라는 대상과 ‘자기 자아’를 포옹한다. 이것은 내가 직접적으로 느꼈던 경험이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라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가질 수 없는 결핍의 어느 공간을 채워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된 ‘소유욕’이었다. 나는 그것을 내다 버릴 수 있을 때 나와 포옹할 수 있었다.
56p
어떤 우발적인 상처가 나를 위협하면, 이내 나는 그 상처를 사랑의 감정의 현란한 추상성 안으로 흡수하여, 부재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을 욕망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킨다.
‘부재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을 욕망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러므로 나는 ‘그’와의 끈을 끊음으로 그의 부재를 희망했다. 하지만 타인의 부재는 강력한 존재의 확신이나 마찬가지이다. (말레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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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포스 ATOPOS.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아토포스’로 인지한다. 이 말은 예측할 수 없는, 끊임없이 독창성으로 인해 분류될 수 없다는 뜻이다.
아토포스라는 개념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개념 중 하나이다. 내가 열렬히 사랑했던 ‘그’와 나의 관계의 마지막에 아토포스가 맹렬히 작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감각을 통하여 아토포스를 느꼈고 그를 통하여 나 자신이 절실하게 죽었던 동시에 다시 살아남을 느꼈다.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시키는 그 사람은 아토포스이다. 나는 그를 분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내 욕망의 특이함에 기적적으로 부응하러 온 유일한, 독특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61p
어느 누구도 그 사람에 대해, 그 사람에 관해 말할 수 없다. ~ (중략) 그 사람은 무어라 특징지을 수 없다(아마도 이것이 아토포스의 진짜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독창성의 진짜 처소는 그 사람도 나 자신도 아닌, 바로 우리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쟁취해야 하는 것은 독창적인 관계이다. 대부분의 상처는 상투적인 것에서 온다. 모든 사람들처럼 사랑해야 하고, 질투해야 하고, 버림받아야 하고, 또 욕구불만을 느껴야 하고 등등. 그러나 독창적인 관계일 때에는 상투적인 것은 모두 흔들리며 초월되고, 철수한다. 그리하여 이를테면 질투 같은 것은 더 이상 설 자리게 없게 된다.
진짜 바로 이것이 우리의 관계였다.(아마 과거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현재 지극히 현실 속에 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질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계는 ‘확실성’이며 ‘독창성’이며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함’이기 때문이다.
2016년의 메시지에서 발췌한 내용 中
여기에서 아토포스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나는 아토포스를 말로 환원할 수 없고 어떤 다른 이와 비교할 수도 없고 정말 아무 장소도 없고 어떠한 걸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석했어. 근데 오빠 만나면서 항상 나는 오빠에 대한 소유욕을 채우려고만 했지 절대로 아토포스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오빠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내가 오빠 앞에서 자발적으로 비참해지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사라지고 싶었고 오빠를 위해 희생하더라도 오빠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는 완전한 헌신적인 느낌(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상하고 포기한 뒤에 온 타자의 선물이다)을 얻었는데 그렇게 하려고 실행에 옮겼으려 했을 때 오히려 오빠가 나에게 선물을 준다는 느낌을 얻었어. 더 이상 오빠에 대하여 내가 특별한 존재여야지, 라는 강박증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느낌이었고 더 이상 오빠한테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도 나 혼자서 우리의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정립하였어. 오빠의 눈에는 내가 또렷하게 있었고 그래서 나는 오빠를 포옹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나 자신을 포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나는 지금까지 나르시시즘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상대를 통해서 나를 확인하고 내가 그래서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 했는데 오빠를 그 때 만나고 나서 그런 것들이 다는 아니어도 서서히 없어진 느낌이었어. 앞으로는 아니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랬어.
68p
중국의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였다.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 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기다림 속에서 끝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내가 ‘이상’으로 생각한 그녀를 가지면 곧 그것은 이상이 아닌 지극히 현실이 되므로. 꿈에서 깨어난 현실은 자신의 기대를 산산 조각낼 수 있다. 차라리 현실이 아닌, 상상 속의 그녀, 이상속의 그녀 자체를 선택하고 그 자신을 바라보며 그러한 행위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을까? 즉 이상 속의 그녀를 사랑하며, 이상속의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즐긴 것이 아닐까?
113p
사랑의 선물은 스스로 찾아지고, 선택되며, 커다란 흥분 속에 구입된다. 오르가슴과도 같은 그런 흥분 속에. 나는 그 물건이 그를 기쁘게 할지, 실망시키지나 않을지, 또는 그 반대로 너무 값지게 보여 내가 걸린 이 덫을, 정신착란을 드러내 보이지나 않을지 하고 열심히 따져 본다.
나는 이 행위를 내가 두 번째 사랑한다고 여겼던 이에게 하였다. 그 사람은 돈이 굉장히 많았으며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왔던 사람 같았다. 그러기에 그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에게 없는 무엇을 찾기란 힘들어 차라리 물질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신적인 무엇인가를 주고 싶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언니와 나누어 가졌던 뭉뚝한 유리조각을 작은 유리병 속에 넣어 내 향기와 함께 주었는데(그 물질은 내 의미부여와 연관이 깊은 것이었다) 그가 그것을 고맙게 받을 것인지 굉장히 많이 따졌던 것 같다. 지금은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러한 행위를 한 것 자체가 나에게 있어 굉장히 의미 있고 현재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지만 과거의 내가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는 사실만으로 나에게 값진 행위였다.
157p
사랑의 증거 : 나는 당신에게 예전에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헌정했던 것처럼 내 상상계를 바친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쩌면 나는 진실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의 위기와 분석 치료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다면, 그것은 환자가 그의 분석자의 장례를 치르는 것처럼 나 또한 사랑하는 이의 장례를 치른다는 점이다. 나는 내 전이를 청산하며, 그렇게 하여 치료와 위기는 다 끝이 난 것처럼 보인다. ~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만약 사랑하는 이에게 상상계를 바친다면, 사랑하는 이는 스스로의 실추라는 우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내 자신의 장례와 함께 그 사람의 이런 우수를 예측하고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난 또 괴로워한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기에.’
장례의 진짜 행위는 사랑하는 이를 상실해서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어느 날인가 관계라는 살갗 위에 마치 확실한 죽음의 징후처럼 다가온 어떤 조그만 흔적을 인지하는 데에 있다. 처음으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한다. 물론 고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황해하지도 않는다.
나는 사랑하는 이의 장례를 치렀다(지극히 주관적인). 나는 항상 ‘그’에게 내 상상계를 글로 통하여 바쳤으며 그는 그것을 보며 고마워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내 상상계를 바치지 않는다. 그로 인한 상상계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에 대한 상상계를 쓰기는 하지만 ‘그’만큼 깊은 감정으로 쓰지는 않는다. ‘그’ 한명 뿐으로도 나의 모든 상상계가 다 소멸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놓아버렸고(고의가 아니게), 그에게 자발적으로 혹은 고의가 아니게 상처를 주더라도 당황해하지 않는다. 더 이상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267p
잡담은 그 사람을 그/ 그녀로 축소시킨다. 그리고 이런 축소가 내게는 참기 어려운 것이다. 그 사람은 내게 그/ 그녀도 아니며, 다만 그 자신의 이름, 고유명사일 뿐이다. 3인칭 대명사는 심술궂은 대명사, 비인칭의 대명사이다. 그것은 부재하고 취소한다. 공동의 담론이 나의 그 사람을 빼앗아, 저기 존재하지 않는 모든 사물에게도 적용되는 그런 보편적인 대체물의 핏기 없는 형체로 되돌려 줄 때, 나는 마치 그 사람이 죽어, 축소되어 언어의 저 거대한 능벽 안 유골단지에 안치된 것처럼 보인다. 내게서 그 사람은 결코 지시물이 될 수 없다. 당신은 결코 당신일 뿐이며, 나는 타인이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것은 ‘양질의 관계’와도 연관돼 보인다. 우리의 특이함을 관례적인 서식에 의해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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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각들이 과거의 어떤 것으로 갔다. 오늘 말이다. ‘사랑의 단상’이라는 책은 내가 오랫동안 읽고 있는 책이다. 아직 다 읽지 못하였다. 그리고 굳이 빠르게 읽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술술 넘겨지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나와 ‘그’의 관계를 완벽하게 분석해 놓은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나와 그의 관계를 명확하게 언어로 풀어놓았고 읽으며 통쾌하기도, 몇 번은 울기도 하였다.
나는 그와의 관계를 확신하지 못하였고 그랬기에 확실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욕망에 그에 대한 상상계를 쓰곤 하였다. 글을 통하여 그와 나의 관계를 설득하고 정리하려 부단히 애썼다. 어찌 보면 편집증적인 내용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와 나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라기 보다는 ‘관계’라는 것을 뛰어 넘은 아토포스적인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 관계를 놓아버렸다. 우리는 관계에 대하여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었다.
이러한 이상계 속에서 내가 떠났더라면? 차라리 선비가 99일 째에 떠난 것처럼 나 또한 그렇게 떠났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나는 지극히 현실에 머물고 있으며 더 이상 깊게 빠지지 않는다. 굉장히 편하지만 가끔 불편했던 과거가 그립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