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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 Apr 24. 2024

고맙다 운명아

무럭무럭 자라나자.


오늘은 나의 극도로 무서운 순간을 마주했다.

나는 자기주장이 강한 편인데 간혹 내가 마주하지 못하거나 혹은 힘들어 하는 특정 영역이 있다. 그 속에서 내가 작아진다.

그런데 그냥 나는 오늘 마음속으로 모든 감정을 바라보면서,

나 안 무서워. 진짜야. 하고 말했다. 그런데 진짜 안 무서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누군가가 나를 지켜줄 것만 같았다.


삶은 이상하게도 이원성의 원리에 따라서 돌아간다. 그러므로 좋고 나쁘고는 객관적으로 그 상황을 바라볼 수 있을 때에야 판단이 가능한 것 같다. 하지만 그마저도 주관적이기에 어느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방향이 달라진다.


요즘에 현존하면서 느끼는 건 단지 내가 지금 이 순간 살아가고 살아있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이 축복이라는 걸 깨달으려고 하고 있다.

무언갈 더 많이 가지려고 하지 않고 너무 서두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게도 아닌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한다.

아까 서래마을을 지나가면서 자연의 새 소리를 들으면서 오랜만에 자연에서 쉬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연을 가면 나의 박자가 돌아온다.


셰익스피어의 시를 읽으면서 너무 아름다워서 그것 가지고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언가에 몰두해서 하는 행위가 좋고, 많은 것들을 의도해가면서 진행해야 하지만 실은 의도 없이 순수하게 하는 것이 가끔씩, 혹은 매번 더 크고 자연스러운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다.

의도는 작위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매 순간 의도를 안 하고 싶지만 인간이라서 어쩔 수 없다.


모든 건 다 똑같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되어진 무언가에서부터 아무것도 없이 끝이 난다.

종결이 나면 모든 것들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찰나의 행복감을 지속시키고 싶어서 두려움을 안은 채로 더 소유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사회에 만연하다.

하지만 내일 당장이라도 죽을 각오를 하고 살면 그 사람은 사랑을 위하여 산다.

이전에는 이러한 카르페디엠 마음가짐으로 살면서 조금 무모했다면,

이제는 미래를 내다보고 안정감있게 미래를 준비해가면서도 동시에 내일 당장 죽을 각오를 하면서 사는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소멸이 두렵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그렇기에 그냥 여전히 무언가를 사랑하는 건 정말 좋다.

찰나의 감정이나 찰나의 도파민, 찰나의 감흥, 찰나의 아픔, 찰나의 무언가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치 않는 무언가를 항상 바라고 갈망했던 것 같은데 사실 없다.

그래서 나는 찰나의 외부사항들에 대하여 너무 커다란 신경을 쓰는 대신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똑같이 내 상황이나 내 삶 자체를 영위해 나가고자 하고 있다.

그래서 주체적으로 규칙적이고 주체적으로 부지런하다. 누군가가 시켜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냥 스스로 그림그리고 스스로 공부한다.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먹고싶은 건강한 걸 먹는다. 그게 전부다.

이렇게 지루할 법한 인생도 사실 소소하게나마 혹은 정말 크게 행복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여러가지 감정을 다 갖는다.

그렇지만 쉽게 무너지진 않는다.

나는 나약한 법을 아는 사람이다. 내가 굽어질 때에는 굽어버리고, 아플 땐 울어버린다. 포기하고 싶을 때에는 최선을 다 한다음에 모든 걸 내려놓고,

두려울 때는 두려워한다.

나는 스스로 기만하지 않는 인간이다. 그리고 남도 속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실은 언제나 밝혀진다. 나는 그것이 드러나기 전에 그냥 스스로 진실을 밝힌다.

그러므로 난 정말 멋진 사람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져도 멋지고 바보같아도 멋진 사람이다.


나는 정말 많은 것들을 사랑했고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건 그냥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고 말한다.

나는 정말 많은 것들에 의하여 아파보았고 그것이 부끄러운 형태가 아니라 그 당시의 불안정했던 나 자신도 인정하고 용서한다.

나는 정말 많은 것들에 행복해했고 그것들이 남들이 보았을 때 멋져보이거나 근사한 것이 아니어도 나는 그러한 사소한 것들에 의해서 행복했다고 당당히 말한다.

나는 별것도 아닌 것들에 의해서 죽고싶어했고 그 감정들이 수년 간 지속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단단함의 기본 토대가 되어서 지금의 나를 감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삶에게 감사를 표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하여 못나보이는 나로 스스로를 만들기도 하였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하여 정말 수많은 것들과 수많은 이름표들을 포기했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것들이 사회적으로

많이 인정하는 대기업, 회사 등이라고 하고, 그것들을 포기했다는 것이 바보같은 짓이라고 누군가는 손가락질 해도 그것이 나 스스로를 위한 행동이라고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더 잘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온전히 느낀다고 말한다.

잘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건 디폴드값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거다. 개인의 한계는 그걸 뛰어넘고 그걸 포기하고 그걸 포기함으로 못함을 선택하고 스스로 느꼈을 때의 감각에 대하여 긍정하는 게 진짜 예술이고 창작이다.

모든 창작 행위는 그 사람의 순수한 의도와 진실된 마음이 담기면 멋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 하더라도 그런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멋지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서 솔직히 한국사회가 싫고 힘들고 어렵다. 모든 걸 잘 해야한다는

기준으로 잡혀있는 건 도태된 생각인 것 같기 때문이다. 한 가지 행위보다 한 가지 아이디어가 더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여전히 잘 하다가도 그런 것들에 눈물짓기도 하다.

나, 잘 하는 게 맞는건가, 여전히 알 수 없는 세상의 한 가운데에 서서 인생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찰하다가도

아무래도 아무것도 모르겠다 싶으면 여전히 철없는 아이처럼 희희덕거리면서 헛소리나 짓껄이며 친구들이랑 논다. 노는 게 제일 좋아.(ㅋ)


여하튼 난 진지한 인간도 좋고 바람빠진 인간도 좋고 완벽주의도 좋고 러프한 것도 좋다.

누군가랑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게 더 좋다.

그건 변할 수 없는 진정한 무엇이고 진짜 단단한 무엇이라고 느껴진다. 그래서 운명을 믿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싫으면 운명에게 말한다.

저 싫어요 안 할래요.

공손하게 이야기 하면 운명은 나의 말을 들어주고 수용해준다. 운명은 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안 들어준다. 운명도 가끔씩 빡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 안 한다고 공손하게 운명에게 말 하고,

한국에서 살지 않겠다고 운명에게 말했다.

그래서 운명은 무엇을 나에게 이루어질 지에 대하여 곰곰이 바라보고 지켜보고 내맡기고 있는 중이다.

사실 운명이 내 삶을 더 잘 알고 나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에 잠자코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제일 편하긴 하다.

고마워 나의 운명!! 나의 삶!!

나 정말 잘 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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