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

by hari

1.


작업을 하기 시작하면 하루종일 작업 생각만 하기 쉽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혼자만의 생각이 부단해지면 깊이 빠지기 쉽다. 멈추고 다시 위로 올라가기.

처음에는 사람의 이미지를 넣다가 나중에는 풍경의 이미지를 참고하다가 또 나중에는 과연 그것이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과거와 잘 맞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붓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차분함과 과격함을 같이 가지고 있었고 과격함 속에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물감을 던졌고 나이프로 긁어내었고 붓으로 휘갈겼다. 내가 원하는 표현이었다. 통쾌했다.

과거 생각을 하면서 그리지 않았다. 거의 무의식으로 그리다가 물감을 던지는 과정에서 감정이 북받쳤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가끔 이유없이 이러한 감정도 느끼기도 하는구나.

2.


그저께인가? 요즘에는 과거를 정리하고 그저 그렇게 보는 연습을 많이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이상화하고 있던 기억을 제거하고 싶었다. 이상화하고 있는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타인과 관련된) 다른 타인을 만날 때 힘이 든다. 끊임없이 이상화된 과거의 타인과 새로운 타인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연락했다. 잘 지내고 있냐고 잘 지내라고 보냈다. 당연히 연락오지 않을 것을 알고 보냈다. 연락이 오지 않았고 내 마음속 이상화 시키기 놀이는 거의 부숴진 것 같았다. 마음이 놓였다.


3.


많은 걸 모르고 있었던 날들이 제일 깔끔하고 말끔한 것 같다.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면 여러 가지 이유가 나타나고 그것들을 연결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그리고 많은 걸 알아버리면 대범한 행동이 힘들어진다. 나는 사실 섬세하기도 하지만 폭발적인 화나 대범함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요즘에는 대범함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나 자신이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에 집중하다기 보다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기를 원하는 게 아직도 남아있다. 그 타인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 혼자 좋아하며 아파하기 싫어서 중간에 내가 감정을 도려내고 도망가곤 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 며칠 뒤 괜찮아졌다.

그런데 며칠 전에 계속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감정을 도려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프나 나중에 아프나 아픈 건 동일하고 후회 남느니 차라리 내 본능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건 아니건 그저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끝날 때 까지 '자발적으로' 질질 끌든 찌질하게 굴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그 사람의 감정까지 이해하고 생각하기에는 나 자체도 많이 복잡했다. 그저 나에게 최선을 다하기. 내 감정에 본능적으로 충실하기. 그때부터 그냥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건 나를 생각하건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먼저 줏대있이 행동해야하는 건 첫 번 째로 내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이 어떻게 하건 내 감정을 줏대없이 활용하지 말기. 내가 좋아할 사람은 내가 정하고 끝낼지 안 끝낼지 선택 또한 나 자신이 하는 것. 타인에게 떠넘기거나 싹둑 잘라서 도망가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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