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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파도의 표면을 타다 보면 멀미를 하기 쉽지만, 그 안에 있는 바다 전체가 되면 고요해진다. 삶이 예정대로 흐르리라는 것을 안다면 심각한 문제는 하나도 없이, 그저 오늘 하루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텅 비어버린 삶이라는 도화지 위에 2달 간격으로 자국을 남겼더니, 그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겼다. 예전과 같았다면 절망하고 불안해했을 법도 하지만 나는 그 빈 공간 사이에서 마치 마지막 순간 놀 것처럼 자유롭게 놀러 다니고 있다. 아무런 대책은 없지만 행복한 건 사실이다.
세상에 우연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든 깨달음은 한순간 피었다가 지는 것이어서, 아주 비어있을 때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신뢰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진리이기 때문이다.
길에서 몇 번씩 마주했던 작가님이 있었는데, 그분의 작업실에서 연 조촐한 파티에서 한 분을 알게 되었다. 눈 색이 신기했고 예쁘신 분이었다. 맑은 연갈색과 회색, 초록색이 섞인 눈이 신기해서 빤히 쳐다보았다.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낚시 매니아여서 한 번 낚시하러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 예쁜 눈을 하고 계신 분 또한 취미가 낚시여서 같이 낚시를 하러 가기로 했다. 전날 너무나 에너지 소모가 많은 영화를 보았기에 피곤하고 살짝은 불안정한 아침이었지만, 왠지 꼭 나가야 할 것 같아서 그분과 함께 차를 타고 동해안까지 갔다.
어떠한 목적지를 정하고 그 목적지만을 바라고 여행을 한다면, 순간순간 피었다 지는 아름다움을 관찰하기 힘들다. 그것을 알게 된 후 매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더욱 풍성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 같다. 이 여행도 그랬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살짝 불편한 분위기였지만, 밖의 풍경과 오디오에서 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sigarettes after sex/의 노래, 그리고 이태원에서의 기억들, 그리고 태백산맥의 웅장함과 소박한 시골 풍경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차를 굉장히 빨리 몰았기에 긴장도 되었지만, 어느 책에서 보았듯, 긴장을 풀어서 사고를 모면했다는 내용이 기억이 나서 긴장을 많이 풀었다. 어느 상황이든 긴장해서 좋을 건 없다.
행복했다. 그리고 삶에 참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꽤나 거친 암벽들, 그리고 바다 냄새, 녹음하고 싶었지만 그저 그 순간 만에 충실하자고 느껴 녹음하지 않았던 바닷소리, 내음새.
계속해서 낚싯대를 멀리 던지는 연습을 했지만 물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사실 물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어서 실망도 없었다. 바다를 만지고, 소라 속 생명을 느끼고, 바다의 흐름을 관찰하는 노닥거리가 나를 기쁘고 행복하게 해 주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것이면 아주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곳에 항상 같이 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경험을 주는 삶에게 감사하다. 그분이 계속 나를 배려해주는 세심함에 고맙다고 생각했다.
다시 올라가는 차 안에서는 아침때보다는 훨씬 더 편안했다. 나는 말장난 치는 걸 아주 좋아하는데, 실없는 말 개그를 몇 번 해서 재미있었다. 사람이 언제나 진지하고 심각하면 삶의 진면모를 잃기 마련이다. 가끔은(혹은 아주 자주) 실없는 이야기나 헛소리도 해 가면서 장난스럽게 사는 게 좋다. 어차피 심각할 문제는 없으니.
나는 평범한 인간인데, 대화를 해 가면서 나를 좋게 봐주는 분들께는 항상 감사하다. 하지만 나는 슬플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다. 모든 지혜를 다 가지고 있거나 혹은 강철 멘탈도 아니다. 가끔은 부서지기도 하고 연약하기도 하여 울기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한다. 그래도 삶이 나를 지탱해준다는 느낌은 항상 지니고 있어서 꽤 빨리 회복되고 다시 단단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대하는 방식을 배운다. 그분께도 물어보았다. 어떻게 고통을 대하는지 말이다.
어차피 겪을 것, 빨리 고통을 해치워버린다거나 혹은 고통을 즐기는 것, 그것이 그분의 해답이었다. 신기하게도 자신의 삶에 만족하거나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딜 가서든 적응력이 뛰어나고 고통에 대처하는 능력이 대범하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욕심이 많지 않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그들을 본받아 다시 내가 원하는 길로 걸어 나선다. 오직 그 길이 나 스스로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끌려서 마주치게 된 것인지, 이것저것 삶에 대하여, 아니면 실없는 이야기들. 재미있었다. 누군가를 만날 때 나는 항상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대하려고 한다. 그것이 내가 삶에게 줄 수 있는 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만남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연에게 마지막 순간 보는 인연이듯 정성껏 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 같은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선물이다.
그리고 모든 만남은 나에게 확신을 준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다는 확신.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행복하다. 이 광활한 자유와, 이 사랑들. 어차피 지나갈 것이고 어차피 사라져 버릴 형상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삶’이라는 꿈이 참 행복하고 감사하다.
영화 <올란도>의 마지막 대사처럼,
“현재에 있기 위해서 마침내 나는 자유롭다. 마침내 과거와 나를 유혹하는 미래로부터 자유롭게 위해. 내가 가노라 내가 가노라.”
누군가가 과거와 미래를 준다고 나를 유혹할 때, 나는 대답할 것이다.
“나는 현재로서 충분하다. 과거와 미래는 당신이 가졌으면 한다. 나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만을 소유하고 싶다.”
온전히 순간만을 살 때, 현재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계획을 짜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