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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단 한 번 찔린다.

서평 쓰기의 이유

by 밸런스

나는 글을 쓰지 않는다. 문장과 문장을 이을 뿐이다. 잇는 것은, 지연하는 것이다. 끝을 맺지 않는다. 무수한 문장을 만들고, 잇는다. 이래서 얻는 것이 뭐냐고? 시간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만큼 머물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글자만 본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생각하는 것, 질문하는 것, 그게 머무는 것이다. 반 고흐의 그림이 있다. 당신이 공부한다면 반 고흐의 생애를 알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의 그림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알게 될 반 고흐의 생은 그림의 신비를, 아우라를 없앤다. 모든 것은, 그의 삶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왜 나는 그의 밤을 사랑하고, 왜 나는 그의 낮을 힘겨워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 속에 머물 때만이 우리는 잠시나마 예술이라는 나라의 시민권자가 된다. 난 공부하지 않는다. 질문보다 위대한 답을 찾지 않는다. 작품의 신비를, 작품의 아우라를 죽이지 않는다.

윤리, 나는 이게 작품 감상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훼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질문으로 깊숙이 찔러넣는 것. 생각해라. 생각해라. 머물고, 머물러라. 그러면 문이 생길 것이다. 우리는 그 문으로 입장하지 못한다. 열쇠를 찾아 헤매게 되겠지. 우리가 헤매는 동안에만 문은 의미를 지닌다.


나에게 서평은 문학이라는 문의 열쇠 찾기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듯 보인다. 사람들은 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원한다. 열쇠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열쇠를 원한다. 그래서 책에 관해 공부한다. 열쇠를 찾고 문을 연다. 그곳에는 지식과 교훈이 있다. 이걸 가지고 문밖으로 나간 사람은 다시는 문을 쳐다보지 않는다. 얻을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길치고, 센스가 없다. 길을 헤매기를 잘하고, 남이 하지 않을 짓을 잘한다. 나에겐 열쇠가 없다. 심지어 열쇠가 있을 것이리라는 믿음도 크지 않다. 그런데도 열쇠를 찾는, 이 여정은 종교와 비슷하다. 신이 있을까?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분명 존재한다. 회의하나,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서평을 쓸 때 나는 확실한 종교인이고, 예술가고,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이 아이러니가 내가 서평을 쓰는 이유다. 찾을 길 없는 것을 찾는 것. 구차하게 질문에 매달리는 것.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는 것. 내 서평에는 그런 이상한 구석이 있다. 이게 좋아서 읽어주거나 이게 싫어서 안 읽어주겠지만, 난 상관하지 않는다.


믿는다. 어딘가에 함께 헤매줄 사람이 있을 것이리라고. 차마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날카로운 칼로 한번 찔러 넣어본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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