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지만 더 이상 볼 수 없는 선생님께
항상 먼저 연락을 주시는 건 선생님이셨다. 역사나 문학에 관한 좋은 글을 발견하시거나 직접 쓰시면 늘 카톡으로 시크하게 공유해주셨다. 대부분 맘 잡고 정독해야 할 만큼 길거나 어려운 글이라, 가끔은 끝까지 읽지 않고 꼼수를 부려 다 읽은 척 짧은 감상평을 답장으로 보내곤 했다. 그 연락이 운을 떼는 핑계가 되어 선생님과 만날 약속을 잡을 수 있어 좋았다. 만나면 늘 맛있는 것을 사주셨다. 쌤 덕분에 양꼬치에 칭따오도 처음 먹어봤으니. 올해 스승의 날 쌤과 전화통화를 하며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만나자는 약속을 했었는데, 코로나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뵙지 못하고 그냥 외국으로 왔다.
지난주 화요일, 쌤은 여느 때처럼 글을 보내주셨다. 한 번도 직접 말씀드린 적은 없었는데, 내가 지금 타지에 혼자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날따라 유달리 '보고 싶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쌤도 보고 싶다고 하시며 '서브웨이 타임'을 제안하셨지만 당장은 내가 외국에 있어 어려우니 1월을 기약하는 답장을 보냈다.
어쩐지 답이 없으셨다. 평소 같았으면 '그려, 건강하고.'라고 짤막하게 답장을 보내주시거나, 당장 전화를 주셔서 만날 날짜를 받아내셨을 텐데. 나는 일주일 동안 답장이 없으신 쌤을 간혹 떠올리면서도 바쁘시겠거니 하며 넘겼다.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이렇게 만나자고 말씀 주시고 그냥 넘어가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일주일 후에 쌤으로부터 카톡이 오자 '그럼 그렇지!'하고 핸드폰을 켰다. 말투가 조금 낯설었다. 나한테 직접 보내신 답장이 아니라, 선생님이 소천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소천'... 선생님 성함 석자 뒤에 붙은 그 단어가 너무 어색해서,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무슨 단어인지 아는데도 아닐 거야 하는 마음으로 단어 뜻을 검색했다. 돌아가셨다니.
선생님은 선생님보다 쌤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하셨다. 국어 선생님이셨던 쌤은, 누군가는 언어파괴라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단어를 줄여말할 수 있다는 건 한국말이 가진 위대함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자주 쓰는 '괜찮다'라는 말도 '관계하지 아니하다'를 줄인 것이라며, '쌤'이라는 단어도 다를 바 없다고 하셨다. 선생님을 친근하게 쌤이라고 부를 수 있어서 얼마나 좋냐고 말씀하시는 그 모습이 어딘가 멋져 보여서, 14살의 나는 그때 이후로 일부러 쌤이라는 호칭을 썼다.
철없었지만, 매일 교무실에 가 쌤의 등 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고 쌤이 뒤돌아보면 검지로 볼을 찌르는 장난을 많이 했다. 3년 간 매번 그랬지만 한 번도 싫어하신 적이 없었다. 매번 당해주시곤 우리 둘 다 깔깔 웃었다. 그러곤 쌤의 옆에 작은 플라스틱 의자를 갖고 와 앉아서, 무슨 담소를 쉬는 시간 내내 나눴는지. 중학생과 기꺼이 친구가 될 만큼 허물없는 분이셨다. 나는 그런 쌤이 참 좋았다.
선생님의 수업시간은 늘 기다려졌다. 수업시간에 <명태>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시며 한 구절, 한 구절 따라 부르게 시키셨다. 그러면서 숙제로는 정지용의 <향수> 노래를 연습해오라고도 하셨다. 이런 선생님이 엉뚱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나도 기꺼이 저 노래들을 외웠다. 아직도 툭 치면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다. 수업시간에 알려주신 북한말 성대모사는 아직도 흉내 내는 것에 재주가 없는 내가 술자리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성대모사다. 선생님 덕분에 중학교 시절부터 국어를 공부가 아닌, 노래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국어 선생님이셨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역사를 연구하셨다. 석굴암과 에밀레종에 대해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눈빛은 늘 반짝반짝 빛났다. 쌤을 알고 지낸 10년 동안 만날 때마다 석굴암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도 매번 내용을 잊어버려서, 다음에 뵈면 또 이야기해주실테니 그때는 꼭 기억해야지- 하고 며칠 전에 생각했다. 학계가 그동안 말해온 것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계시다고 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연구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대립을 잘 이해하진 못했지만 나는 언제나 선생님 편이었다. 쌤의 연구가 더욱더 힘을 얻어서, 언젠가 쌤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석굴암 학자로 인정받고 유명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럴 날이 꼭 올 거라고 믿었다. 나는 선생님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지금도 그렇다.
중학교 때부터 블로그를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아셨는지 쌤의 연구 내용을 올릴 블로그를 만드는 걸 도와달라고 하셨다. 쪼끄만 게 블로그에 당차게 글을 쓰는 게 대단하다고, 엄지를 치켜들며 칭찬해주셨다. 어린 마음에 그 말이 깊이 남아 그 덕분에 아직도 내가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쌤이 내게 남겨주신 게 이렇게나 많구나.
며칠 전 그 날 쌤의 답장을 기다리며, 쌤을 마지막으로 뵌 작년 여름을 생각했다. 선생님 댁에 가서 쌤이 타 주신 아이스커피도 마시고, 테이블이 두 개뿐인 작고 맛있는 한식집에 가서 메뉴도 왕창 시켜먹었었다. 중학교 땐 쌤한테 격 없이 덤벼들기도 했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는 왠지 격식을 차리느라 바빴던 것 같아서 1월에 뵈면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선생님은 늘 친구 같은 걸 더 좋아하셨으니.
나는 너무도 당연히 쌤이 지금처럼 가끔 만나서 어려운 역사 얘기도 해주시고, 언젠가 내 결혼식에도 오셔서 '야, 이년아. 잘 살어.' 하실 줄 알았다. 나는 쌤한테 맛있는 걸 얻어먹기만 했지 딱히 해드린 게 없어서, 나중에 내가 잘 되면 뭐라도 해드리는 날이 올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언젠가 떠나시더라도 최소한 내가 준비할 시간은 있을 줄 알았다. 마지막 말이나, 마지막 사진 같은 것을.
더 이상 무슨 말을 남길 수도 없는 쌤과의 카톡창을 붙들고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다 쌤이랑 양꼬치를 먹은 날 같이 찍은 사진을 찾으려고 미친 듯이 핸드폰과 노트북을 뒤졌지만, 언제 날아가버렸는지 찾지 못했다. 10년을 알고 지냈는데 쌤과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니. 포털사이트 검색에 선생님 성함을 쳐봤다. 사진을 보니 너무도 생생해서 지금이라도 당장 움직이실 것 같았다. 그제서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게 그저 믿기지가 않았다. 어딘가에서 지금도 위풍당당하게 거닐고 계실 것만 같다.
선생님이랑 한 마지막 대화는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 되었지만,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선생님이 너무 보고 싶다. 언젠가 그때 그 교무실에서처럼 다시 마주 앉을 날이 오면, 10년 전 그때처럼 어깨에 검지 손가락을 세운 손을 얹어 선생님을 불러야지. 이번에도 모른 척 당해주실 거죠? 쌤, 제가 서브웨이도 꼭 사갈게요.
나의 생애가 조금이나마 당신의 발자취를 닮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성낙주 선생님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