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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Apr 08. 2022

안녕? 측백나무야.

드루이드를 꿈꾸는 자의 편지

 

 다들 잘 지내고 있?

 별 일 없?

 혹시 아프거나 곤란한 일은 없었니?


 며칠 전 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산불이 났어. 8헥타르, 2만 4천2백 평에 달하는 면적이 피해를 입었다고 하더구나. 산불이 난 곳은 좋아하는 등산로 인근이라 걱정이 더욱 되었어. 매캐한 연기 냄새가 산바람을 타고 내가 있는 오피스텔까지 나는 거 있지. 뉴스를 보니 전국 곳곳에서 산불이 났다고 하더라. 눈앞에서 무섭도록 벌겋게 불타오르는 산을 보니 마음이 무너져 내렸어.

 이젠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고 시커먼 잿더미가 되어버린 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나무와 꽃들 그리고 그 안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동물들과 곤충들의 터전이었는데.

 

 거긴 괜찮?


 우리가 처음 만 날을 기억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 식목일이었던 것 같아. 엄마는 묘목상에서 너와 네 형제들을 데려왔지.  너희들은 밝은 녹색의 푸르름과 싱그러움을 용맹하게 뽐내고 있더구나. 작고 납작한 잎은 비늘처럼 나란히 포개어져 있었지. 앞 뒤 구분이 없는 잎사귀는 끝부분으로 갈수록 금빛이 감돌았어. 몸집은 작았지만 잎사귀의 금빛 때문에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 아름다운 너였단다. 둥글게 정갈한 무새를 한 것 또한 마음에 들었어.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너의 냄새였어. 은은하게 날리는 너만의 독특한 향이 참 묘했거든. 그래서  나는 너를 만날 때마다 손인사하는 버릇이 생겼지. 너와 맞잡은 손을 코로 가져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어. 그러면 네가 다름 아닌 너라는 것을 냄새로 확실히 알 수 있었거든.

 

 사실 네가 자리 잡고 있는 그곳은 어렸던 내가 종종 놀러 가던 곳이었어. 학교에서 소풍으로 말이야. 거기서 여느 소풍처럼 친구들과  도시락을 나눠 먹고 보물 찾기를 하곤 했지. 근데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지 않니. 소풍장소가 공동묘지라니. 뭐, 장소 섭외를 해야 하는 선생님 입장에서는 '반씨 묘'가 잔디가 있어서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적당한 장소일 거라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지. 또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그곳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데도 문제없는 거리였으니까.

 소풍 온 것에 신이 난 친구들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틀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지. 잔디를 뜯으면서 장난도 치고 말이야. 하긴, 아홉 살 아이들이 뭘 알았겠어. 그런데 그때의 나는, 왠지 모르지만 렇게 하면 안 될 것 같더라고. 그렇다고 무덤 위에서 마구 뛰어노는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어. 그저 멀리서 멍청하게 지켜보았지.

 누가 알았겠어. 몇 년 뒤, 그 한편에 아버지를 모시게 될 줄을 말이야.  


 맞아. 그곳은 내 조상님들이 모셔져 있는 곳이었어.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봉분이 나란히 있고, 그 윗줄에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의 봉분이 있어. 그리고  많은 집안 어르신들이 항렬에 맞춰 순서대로 모셔져 있지.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너무 이르게 조상님들 곁으로 가신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 모두 정정하게 살아 계셨었거든.  그곳에 묻힌 조상님들 사이에서 항렬이 가장 낮은 아버지는 공동묘지 가장 아래쪽에 모셔지게 됐어.

 홀로 외떨어진 아버지의 봉분은 너무도 쓸쓸해 보였어. 다른 봉분들과 나란히 있지 못해서인지 몰라도 휑한 적막감마저 들었지. 그래서 엄마는 너를 그곳에 데려오고 싶어했는지도 몰라. 싱그러운 에너지를 가득 머금은 네가 아버지 곁에 있으면 참 좋겠다고 말이야.  


아버지의 봉분 주변이 썰렁하다. 나무 한 그루 없어 적막감마저 든다

  

 그리고 식목일이었어. 엄마와 나, 동생들은 함께 땅을 팠지. 네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말이야. 토닥토닥 흙을 덮어주고 준비해 간 물도 잊지 않고 주었. 그렇게 너는 우리 가족과 함께하기 시작한 거야.

넌 어땠어? 너를 맞이한 우리 가족은 어떤 모습이었니? 난 말이야. 너와 네 형제들이 아버지 봉분 앞을 도열해 있으니까 마치 왕릉을 수호하는 동물상 혹은 수호상마냥 든든하더라. 그래서 매년 식목일마다 네 형제들을 새롭게 맞이했지.


 그렇게 아버지 봉분 주변으로 심은 어린 측백나무가 스무 그루나 되었지. 나의 조상들은 예로부터 너희를 두고 신선이 되는 나무라고 생각했데. 왕족의 묘지 앞에 심을 만큼 귀하게 여겼다고 하더구나. 너의 독특한 향이 멧돼지나 고라니 같은 야생동물이 싫어하는 냄새라 산짐승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런 거 보면 너는 우리 아버지의 봉분을 지켜주는 존재임이 틀림없어.

  

 최초의 식물세포는 동물세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해. 약 5억 년 전, 너희들의 아주 먼 조상은 동물과 다른 생활양식을 선택하면서 적응해 나가야 했어. 동물처럼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살아가는 고착 생활을 택하면서 나름의 생존 방식을 발달시켜 왔지.

 광합성을 위해 빛을 감지하여 성장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최근에 내가 알게 된 너희들의 은밀하고 위대한 능력들은 정말 놀라웠어.

 곤충의 공격을 받으면 화학적 억제물질을 분비하여 쫓아내고, 토양 속 무기염류와 화학적 농도를 구별하여 가장 알맞은 형태로 정교하게 뿌리는 뻗어나간다고 하더구나. 더욱 놀라운 건 식물 간의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경쟁자와 동반자를 인식해 내서 서로 전략적으로 행동한다는 거야.

 식물이 인간처럼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식물도 오감은 물론이고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와 진동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하지. 그 밖에도  중력, 기온, 습도, 전기장, 압력, 독성물질 같은 것들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게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이 되었다고 하더라. 너희들의 신비한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어.


 측백나무는 무덤 속 시신에 생기는 벌레를 죽이는 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래서 선조들은 산소에 측백나무를 많이 심었데.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라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너의 기적적인 능력을 고려해 보면 분명 틀린 말은 아닐 거야.


 아둔한 몇몇의 인간들은 식물 움직이지도 않고 지각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 오기도 했어. 단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의 환자를 '식물인간'이라고 하거나 일하지 않는 국회를 두고 '식물국회'와 같은 표현들이 그렇지. 하지만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식물도 감정과 지능을 보유한 존재임을 꾸준히 주장하고 있어. 다만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에 눈치채기 어려웠을 뿐이라는 거야.

 스위스에서는 그동안 축적된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인간의 이해관계에서 독립된 식물의 권리를 인정"하며 식물의 존엄성을 공식화하는 법을 발의하기도 했데. 식물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유전자를 조작하면 안 된다는 일종의 '식물보호법'이지. 물론 이 법제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식물도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의미 있는 행동인 것 같아.


 측백나무야.  

 너와 우리 가족에게 큰 시련이 찾아온 적이 있었지. 15년 전이었나? 작은 아버지가 벌초를 하다가 그만, 너희들을 베어버리고 만거야. 여름 장맛비를 맞고 무성히 난 잡초와 덩쿨들이 너를 휘감아 버리는 바람에 작은 아버지는 너를 알아보지 못하셨나 봐. 너는 아직, 키가 작은 어린 나무였잖니.

 식물은 신경이 없어서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지만 벌초사건은 결코 너에게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을 거야. 바로 옆에서 네 형제들이 예초기에 쓸려나가는 장면을 지켜보아야 했으니까.

 우리 가족이 심은 스무 그루 측백나무 대부분이 초록별로 갔어. 겨우 일곱 그루만 살아남았지. 다치고 상처 입은 너를 본 엄마는 당신의 팔이 잘려나간 것만 같이 아프고 속상한 마음에 엉엉 울었다고 했어. 다행히 너는 쓰러지지 않고 힘을 내더니 기어이 새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으며 매년 조금씩 자라나 주더라.


막내동생보다 키가 작았던 어린 측백나무 네 그루


 네가 나만큼 키가 커졌을 때, 할아버지도 조상님들 곁으로 가셨지. 할버지를 산소에 모시는 날, 우리 가족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어. 오랜 의논 끝에 아버지 봉분을 정리하기로 했지.

네 덕분인 걸까. 땅 속에서 계시다가 20년 만에 햇살을  아버지는 깨끗하게 육탈되어 있었어. 묘지개장 작업을 맡아주신 분께서  유골이 아주 좋은 모습이었다고 말씀해 주셨지. 그 말을 들으니 안도가 되더구나. 사실 개장하는 내내 꽤 긴장하고 있었거든.

 화장한 아버지의 유해 자연장으로 마지막 순간을 보내드리기로 했어. 그렇게 아버지는 다시 네 곁으로 가신거야. 무릇 인간이란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며, 땅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하지. 그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넌, 자연의 일부이자 동시에 우리 가족의 일부인 거야.


 이 순간, 나는 알아. 나도 언젠가 네 곁에 머물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오늘,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어. 엄마한테 네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보고 싶다고 부탁을 했지. 여전히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더구나. 이제 제법 몸집도 커져서 듬직해 보여. 다만 한쪽에서 넝쿨이 네 몸을 얼기설기 기어 올라타는 게 마음에 걸렸어.

 인간군상 사이에서도 제 힘으로 일어서지 아니하고 타인의 실력이나 운에 기댈 요행만 피우는 자들이 있어. 식물 세계에서는 저 놈들이 그런 기회주의자들인 거 같아서 얄미운 마음마저 들더구나.   


 하지만 너는 여전히 그곳에서 진한 향기를 솔솔 풍기며 네 자릴 지켜내겠지. 올해 가을에는 어김없이 구슬같은 열매를 맺을 테고.  


 나무야 나무야 측백나무야.


 우리 곁에 와줘서 고마워.

 아버지 곁을 지켜줘서 고마워.

 늘 푸르게 있어줘서 고마워.


키도 크고 덩치도 제법 커졌다.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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