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걸려온 전화는 전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선배 K였다. 퇴사는 했지만 여전히 안부를 묻는 사이였기에 으레 그런 전화이겠거니 하고 받았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전개됐다.
“내가 이번 주말에 연극공연 하는데 보러 올래?”
“네?! 아니, 같이 연극 보러 가자는 게 아니라, 선배가 공연을 한다고요?! ”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내가 아는 선배 K는 직장인이었고 이십 대 자녀를 둔 가장이자 엄마였다. 그보다 같이 일했던 수년 동안 연극에 관심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게다가 선배 K는 말할 때 발음하는 데 있어서 자신없어 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어쨌건 그런 선배 K가 연극 공연을 한다니. 과연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이건 반전영화, 아니 반전연극일 테니.
내 심장의 절반은 호기심으로 채우고 나머지 절반은 응원하는 마음으로 꽉꽉 채운 채 공연장을 찾았다. 2021년 10월 주말 저녁. 장소는 위례 스토리박스 야외공연장이었다. 배우가 무대에 등장하기 전 배경음악과 함께 고요한 긴장감이 흘렀다. 늦가을이라 생각보다 저녁 바람이 쌀쌀했다. 날씨 때문인지 객석에서 지켜보는 내가 긴장해서 인지 구분할 순 없었지만 손과 심장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선배 K는 몰라보게 살이 빠져 이전에 봤을 때보다 더욱 어려 보였다. 자신감 가득한 표정과 말투, 역동적인 몸짓으로 열연하는 모습은 놀랍고도 멋있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야, 정말 사람 일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더니, 선배 K가 진짜 연극을 하네.
연극 배우는 나에게 로망 같은 것이었다. 내가 어릴 적, 아빠 일을 도와주시던 C삼촌이 계셨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 C삼촌을 보러 간다고 하시며 나를 어느 공연장으로 이끌었다. 아마도 그때가 내 인생 첫 연극관람이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아빠 가게에서 매일 인사하던 C삼촌을 공연장에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삼촌은 언제 오는 거야?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고’
사실 C삼촌은 연극배우였다. 게다가 그날 내가 본 연극의 주인공이었다. 수염으로 분장한 C삼촌의 모습을 내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 뿐. 넓은 무대를 힘 있는 목소리와 열정적인 몸짓으로 가득 채운 C삼촌은 평소에 내가 알던 삼촌이 아니었다. 어떤 내용의 연극이었는지 기억할 순 없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떨림과 전율은 여전히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C삼촌은 직장을 다니면서 취미로 연극배우 활동을 하셨던 것 같다. 나에게 있어 C삼촌은 그저 아빠 가게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연극배우로 새롭게 다가왔다.
초등학교 1학년 교실 벽면에는 학생들의 얼굴 사진과 이름, 그리고 장래희망이 함께 써 붙어있었다. 내 사진과 함께 적힌 장래희망은 ‘탤런트’. 어린 나는 연극배우라는 직업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그렇게 썼던 것 같다.
고등학교 연극부 동아리에 들어갔다. 1학년 여름방학 내내 연극 <안티고네>를 연습했다. 배역은 안티고네 공주의 나이 많은 시녀 역할이었다. 비록 조연이었지만 시녀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여 연습했다. 친구들이 나를 못 알아볼 정도로 말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무대에서 공연이 끝날 때까지 친구들은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때 내 심장은 무대 위의 눈부신 조명보다 더 뜨겁고, 관객들의 박수 소리보다 더 힘차게 뛰었다.
하지만 엄마는 연극에 빠져 있는 나를 영 못마땅하게 여겼다. 내가 연극을 그만두길 원하셨다. 결국엔 C삼촌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연극배우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배고픈지 가까이에서 지켜보셨기 때문이겠지.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연극은 내 삶에서 멀어져 갔다.
연극 잘 보고 갔니? 그러지 말고 우리 극단에 한번 와보는 건 어때? 나도 직장 다니면서 취미로 연극하고 있는데 너무 재밌어.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뜻밖의 선배 K의 초대에 기분 좋은 떨림이 시작되었다. 내 삶에서 멀어졌던 연극을 다시 만날 기회가 온 걸까. 20년이나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연극배우를 꿈꾸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