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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Dec 25. 2021

예술은 과연 숭고할까?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빈센트 반 고흐, 이상, 쳇 베이커-. 


무언가에 삶을 바친 이들, 그들은 과연 숭고할까?


세상에 모든 것이 그렇듯, 예술에 대한 인식 역시 세월에 따라 변했다. 플라톤이 살아있던 한때 예술은 사회에서 퇴출돼야 할 잉여 생산물의 지위를 가졌다. 후에 지성과 영성, 그리고 귀족들의 상징 혹은 유희로 연명된 그것은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의해 존재의 본질적인 무엇으로 승격한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예술은 대중 엔터테인먼트와 '잘은 모르겠지만 있어 보이는' 것 사이에서, 규정되지 못한 일종의 잠정적인 지위에 안착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그 규정되지 못한 애매모호함 속에서도 모종의 탈세속적인 향취가 배어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술'이라는 단어는 일면 조롱의 한 용법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과하게 까다롭게 디테일을 추구하는 감독을 보고 "예술을 하려는 거야 뭐야" 하는 식이다. 이는 뭐랄까, 예술을 규정하지는 못해도[세속적인 질서와 전제를 벗어나 있는]이라는 함의는 분명히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술과 세속의 대결은 사실상 비(非) 세속과 세속의 대결이라고 읽어도 무방하다. 먹고사는 문제를 벗어난, 혹은 뛰어넘는 삶의 요소가 있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영국의 작가 서머싯 몸의「달과 6펜스」에는 평범한 증권 중개인이었으나 갑자기 예술혼에 눈을 뜬 인물,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가 나온다. 익히 알려진 대로 스트릭랜드는 프랑스의 화가 폴 고갱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며, 고갱 역시 증권 중개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화가가 됐고, 영감을 위해 타히티로 떠났다. 


「달과 6펜스」를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대개 그다지 긍정적이진 않다. 소설 속의 표현에 따르면, 스트릭랜드는 상당히 '불쾌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평균적인 도덕관념에서 볼 때 그는 '불쾌'의 의미 범위보다는 좀 더 극단적으로 반사회적이다.


한 가정의 가장임에도 책임감 없이 가족과 직장을 떠나버리고,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래 놓고는 갑자기 타히티로 떠나질 않나, 여성을 대하는 태도도 물론 엉망진창이다. 스트릭랜드의 모습은 사실 옹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물론, 그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을 것이다.


스트릭랜드의 행동에는 일체의 변명이나 옹호가 필요치 않다. 그는 사회적 관습, 규칙, 도덕관념을 본인의 삶으로 끌어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습과 도덕, 규칙은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환경의 필요에 따라서 가변적으로 변하는 일종의 집단의 암묵적 합의이다. 말하자면 삶을 '어떻게' 영위할 것이냐의 문제지, '왜' 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스트릭랜드에게 그림은 '어떻게'의 층위에 있지 않다. 고흐, 고갱, 스트릭랜드, 그들에게 그림은 삶의 이유지, 다른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닌 것이다. 일종의 소명에 가깝다고 할까? 


고흐가 건강과 명예, 위신과 체통보다 자신의 예술을 우선시했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될까? 누군가 그런 이유로 그를 조롱한다면, 고흐는 도리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스스로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밥이 대수니?"


스트릭랜드의 입장에서, 도덕 규율과 사회적 규칙(가부장제 라던지)은 삶을 어떻게 지속시킬 건지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다. 비록 증권가에 몸을 담을 땐 오직 그에만 골몰하고, 그것이 주는 안온에 젖어 마치 그들이 본질인 양 살아왔지만, 그러나 그가 문득 미술에 대해 눈을 떴을 때 그림 외에 다른 것은 거추장스러운 사슬로 변모한 것이다.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 본질은 자기 충족적이다. 타히티에서 드디어 그림을 완성하고도 스트릭랜드는 그것을 세상에 내보이지 않았다. 


「달과 6펜스」에서 달은 어떤 숭고한 이상과 탈세속적 가치를, 6펜스는 인습적인 모종의 체계를 상징한다. 물론 스트릭랜드에게 런던의 증권가는 6펜스의 세계를, 원시와 야생이 살아 숨 쉬는 타히티는 달의 세계를 표상할 것이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서머싯 몸은 달의 세계의 우위에 대해 성토하지 않았다. 작가 본인도 통속소설과 순수문학 사이를 오간 인물이기도 하고, 실제로 달의 세계가 동전의 세계보다 우위에 있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두 세계가 꼭 극단적인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며, 나름의 균형을 이루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달과 6펜스」에서 읽어야 할 것은 단지, 달과 동전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고뇌도, 결단도, 선택도 우선은 존재를 인정하고 난 이후의 문제이니까.


고흐, 고갱, 스트릭랜드의 삶이 부럽냐고 묻는다면 난 잘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 그들은 바보같이 살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단언컨대, 바보는 당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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