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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Feb 28. 2023

가즈아! 는 어디를 향하는가

장류진「달까지 가자」를 읽고

로또는 비할 바도 아니었다.


최소한 복권은 확률이라는 이해 가능한 질서 속의 요행이었지만,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코인이라는 광풍은 말 그대로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올라도 왜 오르는지 알 수 없고, 떨어져도 왜 떨어지는지 알 수 없다. 오르면 그냥 돈 버는 거고, 떨어지면 그냥 망한다. 사실상 카지노 보다 더한 도박이었던 셈이다.


이런 극강의 불가해성은 역설적이게도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어느 정도 '위로'가 됐던 것 같다. 온갖 욕망의 아수라가 만들어 낸 아사리판을 위로라고 지칭하는 게 이상할 수 있지만, 그것의 본질에는 분명히 위로가 있었다.


만성화된 저성장과 토착화된 양극화 속에서 자라난 밀레니얼 세대의 시대정신은 박탈감과 체념이다. 이는 88만 원 세대의 '분노'와는 또 조금 다른 감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 본체다.


그 지지부진한 나날의 연쇄를 갑자기 부수며 나타난 코인이 이들에게 선물한 것은 효능감이었다. 코인광풍을 분석하는 수많은 글과 말들은 투기성 욕망을 언급하지만, 물론 그 말이 옳지만, 그런 표면적인 욕구의 기저에 위치한 건 자기 효능감이다.


취업시장/주식/부동산 같은 기존 자본주의 게임에는 애초에 이들의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패배감이나 분노는 있을 수 없다. 대결이 성립될 수 없어서 싸워본 적이 없는데 무슨 분노가 있을까? 패배자가 되는 것도 링에 오른 자들의 특권이다.


반면 코인판은 모두에게 공평한 게임이다. 게임을 구성하는 내적 논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스마트폰 하나만 있다면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판 안에서만큼은 외국인 투자자나 세력이나 기관이나 재벌이나 편의점 알바생이나 다 똑같이 가즈아! 를 외치고, 다 똑같이 한강 수온을 체크하는 '코인러'가 되는 셈이다.


일평생 공부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내 친구 A(실존인물)는 코인을 시작하며 그래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가 눈이 빠지게 쳐다보던 것은 합리적인 분석이 될 리가 만무한 디지털 조형물에 불과했지만, 그 순간만큼 A는 이 자본주의 '게임'에 플레이어가 됐다는 감각을 느꼈으리라.


여기까지는 아무래도 좋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다. 결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고 철저히 은폐된 진짜 문제는 저성장이니 양극화니 그런 게 아니다(물론 중요한 문제긴 하지만).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편집증적으로 몰두만 하다 보니, 정작 이 게임의 존재이유를 기억하는 이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이런 맥락 위에서 장류진 작가의 「달까지 가자」를 읽어보자.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흙수저 3인방의 코인 롤러코스터 탑승기, 가즈아!' 정도가 되겠다(물론 실제 작품은 이 로그라인보다 훨씬 풍부하다).


흙수저 3인방은 나름대로 이름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어엿한 직장인이지만, 대체로 답이 없다. 은상언니, 나, 지송의 삶은 참으로 '뭐'가 없다.


많지는 않더라도 밀리지 않고 나오는 월급이 있기에 극단적으로 빈곤하다곤 할 수 없지만, 거기서 끝이다. 삼시 세 끼와 점심시간 커피, 종종 디저트.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미적지근한 성취와 미적지근한 고통. 마치 중금속 중독 같이 진행되는 일상적 절망의 이행 속에서 처음으로 돌파구를 찾아낸 건 '돈 그 자체'를 좋아하던 은상 언니다.


맨 처음 이더리움의 존재를 알아채고 용기 있게 코인판에 뛰어든 은상 언니를 따라 3인방은 모두 코인 롤러코스터에 탑승하고, 오르락내리락 뚱장과 통장과 텅장 사이에서 미끄럼틀을 타게 된다.


코인 특전대의 리더인 은상언니는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그것과 같이 반짝이는 불빛을 집중력 있게 추구하고, 결국 모종의 목표를 달성해 내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러나 책을 덮은 후, 이 신나는 어트랙션 한바탕에서 내린 독자는 무언가 찜찜한 뒷맛을 느낀다. 그래서, 이 3인방이 쟁취해낸 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은상언니가 이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건 맹목성 덕이었다. 돈에 대한 은상언니의 사랑(?)은 지송이나 나와는 결이 다르다.


지송이는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싶어서 돈이 필요하고, 나는 일상의 환경을 개선시키고 싶어서 돈이 필요하지만, 은상 언니는 이유가 없다. 그냥 돈이 좋아서 돈에 집착한다.


작품 속에서는 결과적으로 그 편집증적 맹목성 덕에 소설적인 결말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달까지 가자'는 은상 언니의 외침은 공허하다. 기실 달에는 돌과 먼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종반부, 잠깐이나마 달에 도착한 은상언니가 그곳에서 발견한 건 무엇인가. 자동차 딜러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필요도 없는 벤츠를 수천만 원 주고 사버리는 객기다.


달에 닿고자 하는 은상언니의 맹목성은 코인판과 닮았다. 스스로를 구성하는 내적 논리를 결여하고, 오로지

편집적인 집착만이 있다. 달에 도착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곳엔 아무것도 없는데.


달과 코인이라는 소설의 두 구성요소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와 닮았다. 몸이 소설을 출간했던 게 1919년이었다. 그때로부터 100년이 흘렀는데, 우리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몸이 경탄했던 달은 사라지고, 동전은 달이 되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자고 외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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