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스트림 페스티벌」
“봐봐, 정종(定宗) 이름은 모르잖아.”
개최를 일주일 앞둔 소도시 ‘망진’의 지역축제, ‘정종 문화제’는 군수의 말 한마디에 뜬금없이 ‘연산군 문화제’로 변경된다. 앞선 개최의 흥행실패 원인이 ‘정종’의 인지도 부족 탓이라는 군수의 (다소 뒤늦은)결단 탓이다. 이미 출력된 현수막과 유인물에 새겨진 ‘정종’ 위에 ‘연산군’이라 적힌 스티커를 붙이는 일도, ‘정종’ 정극(正劇)을 선보일 예정이었던 지역 극단에 갑자사화로 새로 쓰인 시나리오를 전달하는 일도(이 단막극은 향후 ‘갑자사화의 형식을 빌린 팬데믹 종식 퍼포먼스’로 또 한번 변경된다), 엉망진창이 된 식순과 콘텐츠 등을 정돈해야 되는 일도 모두 문화기획 스타트업 대표 ‘혜수’의 몫이다.
<익스트림 페스티벌>(김홍기)의 얼개는 대략 그렇다. 갑자기 펑크를 낸 초대가수, 급기야 보이콧을 선언한 지역극단, 자칭 행위예술가인 자신의 아들을 축제에 꽂아 넣으려는 군수, 그 모든 혼란 앞에서 ‘혜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는 계속돼야 한다, 반드시” 라 말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축제를 완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혜수’를 성실하게 따라가며 ‘망진 연산군 문화제’의 시작과 끝을 비춘다. 그러나, 밑도 끝도 없는 ‘혜수’의 생고생(?)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축제는 왜 완수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단지 일이기 때문일까? ‘혜수’가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는 프로이기 때문일까?
맞다. 실제로 극 중에선 여러 인물의 대사를 통해 ‘일’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다만 그뿐만은 아니다. <익스트림 페스티벌> 속에 드러난 긍정의 개념을 비평의 자리에서 살펴보자.
1. 혼돈 – 비(非)축제의 시간
축제(Festival)라는 말은 성일을 뜻하는 라틴어 ‘Festivals’에서 기원했다. 한자를 뜯어보아도 사정은 비슷하다. ‘빌 축(祝)’과 ‘제사 제(祭)’가 합쳐졌으므로 ‘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소원을 빈다’는 의미인 셈인다. 이렇듯 본래 축제는 제의(祭儀)이고, 이는 ‘망진 연산군 문화제’도 예외가 아니다.
영화는 ‘망진 연산군 문화제’ 개최 전날, 아직 미처 연산군이 되지 못한 ‘정종’들을 비추며 시작한다. 대문짝만하게 등장하는 [ D-1 ]이라는 자막 뒤로 현수막을 고쳐 달고 있는 ‘혜수’와 군청 홍보팀장 ‘민성’의 불편한 대화가 오가고, 뒤이어 영화의 중심인물들이 한 명씩 제시된다. <익스트림 페스티벌>의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 나사가 하나씩 빠져 보인다. ‘혜수’의 남자친구이자 애매한 히트작가인 ‘상민’의 사인회에 진짜 독자는 아무도 없고, 지역 극단 ‘망진 레파토리’의 단장은 누군지도 모를 청자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코인 노래방에서 혼자 헤비메탈을 부르는 ‘래오’, 지방의 백수 청년 ‘은채’, 일본의 레전드 록 보컬이었지만 왜인지 망진에 숨어 지내고 있는 ‘센도’, 이들은 모두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해 보인다.
이는 인물과 상황 설정들이 그 자체로 맥락이 없는 탓도 있지만(예를 들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카세트테이프라던가), 이들을 비추는 카메라가 혼란을 의도하는 탓도 있다. 잊을만하면 튀어나오는 핸드헬드 시퀀스와 시도 때도 없이 부서지는 180도 법칙은 ‘망진 연산군 문화제’ 이전의 시간, 말하자면 비(非)축제의 상태를 ‘혼란’으로 정의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때 이 영화의 인물들은 철저하게 혼자다.
수면 밑으로 업(業)에 대한 갈등을 감추고 있는 [혜수 – 민수], (이 때 시점으로 아직 드러나진 않았지만)연적의 관계에 있는 [래오 – 민수], (은채의 일방적인 오해이지만)취업에 대한 입장차가 있는[은채 – 혜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축제남녀(공식적인 지칭이다)]까지. 이뿐만 아니라, 대략 극의 3분의 1지점에 해당하는 ‘망진 레파토리’의 보이콧 씬까지 영화의 중심인물들은 끊임없이 서로 미끄러진다. 서로가 한 말의 의미를 오해하거나(민성 – 사회자), 아예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 듯 차폐되어 있거나(혜수 – 축제남녀),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차마 서로 꺼내지 못하는 상태(래오-혜수)이거나. 즉 이때 ‘혼란’의 실질 형태소는 ‘연결되지 못함’인 셈이다.
이 대혼란의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축제의 시간이 가동되어야 한다. 이들의 이해관계가 중첩되는 하나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 말하는 ‘축제’는 ‘망진 연산군 문화제’의 표면이 아닌 제의로서의 축제다. 이를 위해선 [제의 – 축제]의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그러나 [제의 – 축제]의 조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비축제의 상태에서 인물들이 왜 서로에게 차폐돼 있었는지부터 이야기해 봐야 한다.
2. 그들은 왜 미끄러지는가 – 우상(ideal)의 문제
앞서 언급했듯, <익스트림 페스티벌>의 인물들은 (전반부까지는)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비주얼 록의 전설 ‘센도 아키라’가 약 50만 원가량의 장기자랑 상금을 위해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열창했을 때 대사를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록 마니아로서 ‘센도’를 숭배하던 ‘래오’가 그의 무대에 충격을 받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자, ‘센도’는 “미안하지만, 이것이 네 우상의 현실이야”라고 말한다. 즉, 래오와 센도 사이에는 [우상 ideal / 현실] 대립식이 적용된다(이 글에서 ‘우상 ideal’은 ‘가상 imagine’ 과 동격으로 간주한다).
이 대립식은 <익스트림 페스티벌>의 거의 모든 인물에 적용된다. 일일 아르바이트에 합격한 것뿐이면서 이를 인생역전(?)의 기회라고 여기며 과한 열정을 내뿜는 ‘은채’도, 니어(near) 수도권을 외치며 망진이 연산군의 사냥터였음을 (아무런 근거없이)주장하는 군수도, 오래전 히트작 하나를 빼놓고선 제대로 하는 것 하나 없음에도 끊임없이 일을 벌리는 ‘민수’도, 군청의 갑질을 성토하며 러시아 쉐프킨 출신을 운운하는 ‘망진 레파토리’의 단장도 모두 우상을 꿈꾼다. 그러나 이들의 우상은 헛것이기에(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들의 기대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 연결될 수 없다.
영화의 전반부까지 우상의 함정에서 벗어나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 만한 이들은 유일하게 ‘축제남녀’ 뿐인데, 이들은 마치 다른 인물들과는 다른 층위에서 존재하듯 고고하다. ‘혜수’가 정체와 자격을 물어도 들리지도 않는 듯 대답하지 않고(“기자분들이세요?”, “의사세요?”), ‘조선시대 고문체험’이나 ‘사약 빨리 마시기 대회’ 따위의 말 같지도 않은 콘텐츠들도 어깨춤을 추며 흥겹게 즐긴다. 영화의 중반부 행사가 극단적인 아노미에 빠지자 기절해 버린 ‘혜수’를 구해준 것도 이들이다. 이야기의 흐름과 동떨어져 언뜻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처럼 보이는 이들은 사실 [제의 – 축제]의 조건을 확인하는 핵심적인 열쇠다.
3. [제의 – 축제]의 조건
독일의 철학자 니체에 따르면,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디오니소스 적인 도취(der Dionysische Rausch)다. 그리고 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발견한다. 그는 이 디오니소스 축제 속에서 생명력으로 가득 찬 심미적 세계의 구현을 발견한다. 니체가 생각하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핵심은 수동적인 심미적인 세계를 넘어서는 능동적으로 조형되는 실천적 세계의 장
(場)이다. 언뜻 거리가 좀 있어 보이더라도 일단 이런 바탕 위에서 '망진 연산군 문화제’를 다시 보자.
<익스트림 페스티벌>의 서사구조상 이야기의 장력이 가장 팽팽해지는 지점은 극단 ‘망진 레파토리’가 행사장을 급습하고 보이콧 선언문을 낭독하는 (영화에서 제시하는 타임라인에 의하면) ‘16시 13분’이다. 이때 ‘민수’가 초대 가수 섭외 비용 2,000만 원을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혜수’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화면은 암전된다.
이 암전을 기점으로 ‘망진 연산군 문화제’는 제의로의 전환을 시작한다. 모두가 모두에게 차폐되어 있던 비축제의 시간 속으로 인물들의 ‘능동성’이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암전 후에 가장 먼저 벌어지는 사건은 군수의 아들(자칭 행위예술가) ‘팽선우’의 퍼포먼스 「우리집 고양이 평행주차를 못해」의 공연이 결정된 일이다. 이는 영화 내내 제대로 하는 일이 없던 ‘민수’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결하는 순간이다. 물론 이게 과연 ‘해결’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너는 이게 해결이니?”)가 있겠으나, ‘민수’의 말마따나 적어도 “군수님은 좋아했다”. 이때 화면에 빠르게 지나가는 보도자료 그래픽을 자세히 보면 ‘민수’는 ‘망진 레파토리’의 보이콧 소동을 ‘사전에 조율된 중종반정 퍼포먼스’이자 ‘해외 문화제에서는 자주 선보이는 플래시몹’이라고 둘러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 정도면 제법 그럴 듯하게 사태를 수습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뒤이어 내내 엉뚱한 소리만 하던 ‘은채’도 ‘망진 레파토리’가 떠드렁산의 작은 정자(참고로 영화내 제시되는 ‘망진군’과 입지가 비슷한 양평시에 실제로 ‘떠드렁섬’이 있다)에 모여 있다는 첩보를 제공함으로 사태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렇게 떠드렁산으로 향한 ‘혜수’와 ‘래오’는 ‘망진 레파토리’와 맞닥뜨리고, ‘혜수’의 석고대죄에 그럭저럭 갈등이 봉합되려는 찰나 갑작스러운 ‘래오’의 발언( “그러니까, 결국 지원금 못 받아서 그러셨다는 거네요?”)에 상황은 급격히 악화돼 결국 몸싸움까지 벌어진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제의 – 축제]는 그 옷자락만 보였을 뿐, 제대로 가동되고 있지 못하는 상태다. 떠드렁산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던 동안 이제야 일을 하는 것 같던 ‘민수’와 ‘은채’는 때아닌 면접을 보고 있고(이후 ‘은채’는 인턴이 된다), 무한긍정의 화신처럼 보이던 ‘축제남녀’는 스스로 준비해 온 MR을 틀어주지 않는 주최측에 처음으로 부정성을 내보인다(“아까 다 말씀드렸는데, 진짜 왜그러시지?”). [제의 – 축제]의 조건이 달성되기 위해선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그 문을 열 수 있는 건 이 싸움의 장을 열어젖힌 장본인인 ‘래오’다.
4. 우상의 파괴와 ‘래오’의 예술
사실, ‘래오’는 <익스트림 페스티벌>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다. 다른 인물들에게는 없는 일종의 미스터리가 ‘래오’에게는 있다. 그는 ‘질투는 나의 힘(‘혜수’의 회사)’의 퇴사자이자 극작가다. ‘민수’에 의해 망진으로 소환된 ‘래오’가 ‘혜수’와 처음 마주쳤을 때, 그들 사이에는 5초간의 정적이 흐른다(이 때 360도 회전하는 극단적인 컷 편집이 구사된다). 이 정적은 ‘래오’가 떠드렁산으로 떠나는 ‘혜수’에게 함께 가자고 이야기했을 때 다시 한번 반복된다(이후 이 둘은 과거 내연관계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또, 영화내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질문(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이도 ‘래오’다. ‘래오’의 우상은 ‘혜수(사업확장)’나 ‘군수(명예)’, ‘은채(서울상경)’ 와는 다르게, 말하자면 정신적 차원에 위치해 있다. ‘래오’는 ‘예술’을 하고 싶다. "요즘은 뭐 쓰고 있어요?" "공무원들 비위 맞추는 일은 나 같은 사람이나 하는 일이고, 자기는 예술가가 딱이야. 멋있어"라는 ‘혜수’의 대사로 미루어 보았을 때, ‘래오’와 ‘예술’의 상관관계는 명확하다. 망진에서 우연히 마주친 ‘센도’를 향해 “당신의 목소리가 나를 구원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래오’는 예술적으로 민감한 인간(der künstlerisch erregbare Mensch)이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점은 실상 ‘래오’는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래오’에게 예술은 아직 현실이 아니라 우상 ideal 이기 때문이다.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무언가 도달해야 할 것, 말하자면 ‘래오’에게 예술은 피안(彼岸),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상 Schein이다. 약간의 비약을 허용한다면, ‘래오’는 <버닝>(이창동)의 종수나 <어파이어>(크리스티안 펫졸드)>의 레온, 즉 유서 깊은 ‘쓰지 못하는 작가들’의 연장선이다. 영화에서 ‘래오’가 처음 등장했던 코인 노래방 씬에서 그가 부르고 있던 노래의 가사는 ‘存在の証明(존재의 증명)’ 이다. ‘래오’는 자신의 존재를 예술로서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또 다시 니체에 따르면 ‘예술적으로 민감한 인간’은 이 ‘가상’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통해 삶의 진실을 인지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갈 단초를 발견한다. 즉 ‘래오’는 ‘민수’ / ‘은채’ / ‘군수’ 등과는 달리 우상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구조와 작동방식을 이해하며 더 나아가 ‘능동적인 조형’을 시도함으로 [제의-축제]의 장을 열어야 하는 인물이다. 즉, ‘래오’가 우상의 존재를 알아차릴 때, 그는 비로소 ‘예술가’가 되고 모두를 도취시킬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5. 국립극단과 망진 레파토리 - 비주얼 록과 ‘토요일은 밤이 좋아’
영화에서 ‘래오’의 ‘예술가 되기’는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첫 번째는 앞서 언급했던 떠드렁산의 정자에서다. ‘망진 레파토리’의 지원사업 탈락을 재검토하게 됐다는 ‘혜수’의 말에 극적인 협상이 타결되려는 찰나, ‘래오’는 갑자기 저 혼자 분개하며 “아니 그러니까, 결국 지원금 못받아서 그러셨던 거네요? 아니 선생님, 국립극단에 계시던 분 아니셨어요? 뭐하세요, 여기서?” 라며 산통을 깨버린다.
따지고 보면 이 두 세마디의 말이 ‘래오’의 예술관을 관통하는 전부다. 그의 말이 가진 뉘앙스에 따르면 ‘국립극단’과 ‘지원금/여기(망진)’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 국립극단에 계셨던 분이 ‘그깟’ 지원금에 목메는 건 (그의 표현에 따르면)“나이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래오’의 태도는 명백한 자기모순이다. ‘래오’는 극작가로 일하던 극단에서 상품권을 훔쳐 달아난 상태(코인 노래방씬에서 ‘래오’가 받은 문자내용)다. 지원금에 목맨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비난할 계제가 아니다.
이 자기모순은 싸움이 끝난 직후 ‘혜수’에게 곧바로 지적받게 되는데, "자기들이 뭐를 창작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라고 궁시렁대고 있는 ‘래오’에게 그녀는 “왜 그렇게 화를 내요? 남들이야 나이브하던 말던 자기랑 무슨 상관인데요? 자기 모습 보는 것 같아서 그래요?” 라고 말한다. 물론 ‘래오’는 곧바로 “아니에요, 그런거!” 라며 발끈하지만, ‘혜수’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걸어가 버린다(한편, 이때 ‘복수는 나의 힘’ 본사가 서울이 아닌 망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은채’의 우상도 무너진다).
이 대화 직후, ‘래오’의 두 번째 ‘예술가 되기’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바로 ‘센도’가 강렬한 분장을 한 채 장기자랑 참가 신청을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오랜 우상의 등장에 ‘래오’는 기대감에 벅차 미소를 보이지만, 곧 이어 TPO에 맞게 적절히 개사된 트로트(“망진군을 두고 떠나가지마라 단면읍의 우렁쌈밥~”)가 울려퍼지고, 일본 비주얼 록의 전설 ‘센도’가 “망진군~~ 데끼마쇼!” 따위의 멘트를 부르짖는 모습을 보자 ‘래오’는 온 세상을 잃은 표정을 짓는다(센도는 상금 50만 원 때문에 장기자랑에 참여했다).
이렇듯 ‘예술’을 이상 ideal의 영역으로 여기던 그는 아직 [제의 – 축제]를 가동시키고 ‘디오니소스적인 도취’를 취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선 앞서 언급한 열쇠 ‘축제남녀’와 ‘래오’가 결합해야 한다.
6. 환희 - 축제의 시간
20시 30분, 행위 예술가 ‘팽선우’의 “유물론에 관한 퍼포먼스” 「우리집 고양이 평행주차를 못해」가 공연되고 있을 때, 무대 뒤에선 ‘래오’의 뒤늦은 대답(떠드렁 산에서 ‘혜수’는 ‘래오’에게 이럴 거면 왜 이 먼 곳까지 내려왔냐고 물었다)이 터져나온다. “사랑해요. 보고싶어서 왔어요.” 그 고백을 기점으로 ‘혜수’와 ‘래오’ 사이에 있었던 과거가 드러나게 되는데, 사실 한때 부적절한 내연관계였던 둘은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찜찜한 마무리를 한 상태였다. 앞서 언급했던 두 번의 정적도 그 때문이었던 셈이다. 재밌는 점은, “(사랑은)같이 했는데, 왜 나만 이 꼴이 돼야 하냐”며 “해고당한 후 난 아무것도 못 했는데, 무슨 작가고 예술이냐”고 소리를 지르는 ‘래오’에게 ‘혜수’가 보인 반응이다. ‘혜수’에 따르면 ‘래오’가 해고당한 이유는 그냥 ‘일을 못해서’다. 회사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서 해고당했을 뿐, 내연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뒤이어 그녀는 “너가 왜 글을 못쓰는지 알려줄까? 나는 너무 알 거 같은데. 안 쓰니까. 안 쓰니까 못쓰지.” 라고 일갈한다.
잔인한 옛연인의 말은 ‘래오’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그에게 ‘진실의 장막’을 열어젖힐 기회를 제공한다. 일순간 진실을 목격한 ‘래오’는 눈물을 터뜨리지만, 곧 분노한 ‘민수’와의 몸싸움(‘민수’는 ‘혜수’의 남자친구다)이 벌어진다. 서로 밀고 밀리다 객석까지 밀려나 행사장이 아수라장이 돼버리자, 이를 목격한 ‘축제남녀’는 두 손을 치켜들며 “그렇지! 역시 이 축제라면 뭔가 있을 줄 알았다니까!”라고 환호한다(이 때 ‘축제남녀’가 말한 ‘있을 줄 알았던 것’은 ‘래오’인 셈이다). 이 때 때아닌 난동에 행사장을 떠나던 ‘군수’가 ‘혜수’에게 던진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 짓거리를 왜 한다고 생각해? 저기 도지사가 앉아 있든 대통령이 앉아 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저 애(행위예술가 ‘팽선우’, 군수의 아들)한테는 3년 만의 전시야. 그게 저 아이에게 무슨 의미인지 당신들은 절대로 모를 거야. 당신들은 절대 몰라. 당신들은 예술가가 아니니까. 이 일말의 소명의식도 없는 인간들.”
이 영화에서 가장 미묘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군수’의 이 말은 사실 우상의 몰락에 마침표를 찍는다. ‘팽선우’가 3년 동안 준비한 ‘유물론에 관한 퍼포먼스’ 「우리집 고양이 평행주차를 못해」는 사실 어떤 능동성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객들의 참여를 끌어내지 못함은 물론(“근데 제목이 왜..?””어렵다, 어려워”) 저 자신에게조차 그렇다(‘팽선우’는 군수의 입김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군수’가 언급한 소명은 명백한 오류다. ‘망진 연산군 문화제’가 망가지는 원인을 제공한 건 본인이거니와, 애초에 그녀가 요구한 ‘혜수’의 ‘소명의식’이란 ‘팽선우’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끝끝내 ‘우상’을 버리지 못한 ‘팽선우’와 ‘군수’는 축제의 장을 저 스스로 나가버린다).
오히려,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건 ‘혜수’의 ‘옆모습 보이기’, ‘뒷모습 보이기’ 퍼포먼스다. 전시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유물론을 운운하는 가상으로서의 예술이 아닌 ‘일단 뛰어드는’ 방식의 행위(뭐라도 보여주겠다)가 축제를 완성한 것이다. 뒤이어 축제를 위해 마음을 고쳐먹은 ‘망진 레파토리’가 도착하고, 「갑자사화의 형식을 빌린 팬데믹 종식 퍼포먼스」를 펼쳐 보이기 시작하자 관객들은 열광하기 시작한다.
7. 그리고 환희로서의 삶
무대에 오르기 직전, ‘연산군’(‘망진 레파토리’ 단장)은 ‘래오’를 “어이, 예술가 양반”이라고 부르며 다가온다. ‘래오’는 묻는다.
“선생님, 저는 어떻게 해요?”
“니 일은 똑똑한 니가 알아서 하세요. 왜 나한테 묻고 지X이야.”
이 문답을 통해 비로소 ‘래오’의 ‘예술-되기’는 마무리된다. ‘예술적으로 민감한 인간’으로서 현실에 대한 이중적 감지를 성공하고, 세상을 ‘능동적으로 조형'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순간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때 동시에 ‘혜수’에게 다가온 ‘축제남녀’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는걸요”라고 자조하는 그녀에게 “아..
잘모르셨구나. 원래 지역축제는 그런 것 때문에 오는 건데? 그런 것(엉망진창인 것)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오는 거라고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두가 웃는다. ‘축제남녀’가 말한 운명애(Amor Fati)
적 긍정성은 우상으로서의 삶을 폐기하고 본질적으로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는 그것을 ‘사랑’하겠다는 선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삶은 ‘유물론’ 따위의 있어 보이는 수식을 떨쳐버리고 그 자체로 예술이 된다. 주어진 있는 그대로에 도취하는 것, 이 단계에서 ‘망진 연산군 문화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방점이자 세리머니일 뿐, 총체로서의 삶이 축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나, 이거(축제)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그래”
‘망진 연산군 문화제’가 끝난 후, ‘혜수’는 ‘민수’와의 결별과 선언한다. 이에 울면서 거리를 뛰던 ‘민수’는 일순간 환하게 웃는다(아마 그에게도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은채’는 ‘서울’이라는 이상을 버리고 다시 차근차근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래오’는 처치 곤란한 상품권으로 고뇌하고 있는(인기 상금 50만 원은 현금이 아니라 농수산물 상품권이었다) ‘센도’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제공하며 우상과의 화해를 시도한다. 이때, ‘래오’는 옛 우상 ‘센도’에게, 과거의 철없던 자신에게 일본의 시인 아라키다 모리다케의 하이쿠를 남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심미안의 개안’인 것이다.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그리고 ‘민수’가 떠난 사무실을 재정비하고 있는 ‘혜수’ 위로 또 다시 자막이 깔린다. “밴댕이젓 축제까지 147일” D-1과 D-147 사이의 영원회귀, <익스트림 페스티벌>이 말하는
환희로서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