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리코르디아>의 트리니타스

「미세리코르디아」

by 우주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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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행해진 일은 언제나 선악을 초월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자신의 저서 「선악의 저편」에서 사랑을 ‘선악’보다 높은 심급으로 보았다. ‘신은 죽었다’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당시 (유럽)사회의 근간이던 가톨릭 가치관을 전복시키고자 한 이 철학자는, 동시에 지독한 사랑꾼(?)이기도 했다. 작가이자 정신분석가 ‘루 살로메’를 한 평생 짝사랑하며 온갖 열병을 앓은 끝에 그는 사랑을 ’주지 않을 수 없어서 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정의 내린다.


<미세리코르디아>(알랭 가로디)의 ‘사랑’은 어떤가. 그것은 불수의적인 작용이자 디제시스의 가장 높은 심급으로 작동하는 무엇이다. 말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할까. 과거 제빵 스승이자 연모의 대상이었던 ‘장 피에르’의 사망 소식을 들은 ‘제레미’는 언젠가 그가 떠나왔던 숲속의 작은 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언뜻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이 마을은 기묘한 신화적 아우라를 풍긴다. 그 아우라의 핵심을 짚어보자면 첫째는 마치 중세를 뚝 떼어온 것 같은 마을의 몽타주고, 둘째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공동체 주민들의 윤리의식이며, 셋째는 공동체 전체에 충만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관능적인 사랑이다(두 번째와 세 번째 조건은 관점에 따라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


여기서 영화를 곧이곧대로 감상하기를 방해하는 것은 두 번째 조건, 즉 대놓고 뒤틀린 윤리의식이다. ‘제레미’는 마을에 돌아온 후 줄곧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뱅상’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후 암매장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제(‘필리프’)는 순전히 저자신의 욕구 때문에 ‘제레미’를 감싸고, ‘장 피에르’의 아내이자 ‘뱅상’의 어머니인 ‘마르틴’은 ‘제레미’를 의심하면서도 받아들이며, 무엇보다 마을의 공권력인 경찰은 이 상황을 태평하게 방관한다(“욕망의 힘이군요”). 이 신묘한 공동체 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화가 은근한 방식으로 [자비(미세리코르디아)-사랑-욕망] 세 개의 개념을 동일 본질으로 받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살해의 죄책감에 절벽 끝에선 ‘제레미’를 만류하며 ‘필리프’는 ‘세상엔 사고와 살인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늘어놓는다. 왜냐면 삶은 본질적으로 유한하고(“아무 때나 끝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도처에 깔린 죽음을 뻔뻔하게 무시한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자 ‘제레미’는 날카로운 질문을 날리는데(“그렇다면, 왜 나를 말리죠?”), ‘필리프’는 “잃고 싶지 않아서”라고 답한다. 이 문답은 사실 <미세리코르디아>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핵심이다. ‘필리프’의 말에 따르면 삶이란 필멸을 향한 질주이며, 위선으로 가득 찬 곳이다. 그러나 자살만은 안된다. 왜냐면, 당신의 손을 붙드는 욕망(“나를 위해 살아줘요”)이 있기 때문이다. 실존의 준거를 욕망이라 역설한 셈이다.


어딘가 불편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사고 실험을 펼쳐보자. 만약 ‘필리프’가 늙은 성직자가 아닌 젊은 이성 직능인이고, ‘욕망’이 아닌 “(이미 영화 내 반복된 바 있는)무상의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일종의 아름다운 사랑고백(<헤어질 결심>(박찬욱)의 그것과 유사한)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인물들의 설정과 개념의 중첩을 비트는 방식으로 본질을 양각한다. 만약 사랑이 생의 뿌리가 될 수 있다면, 그리고 욕망과 사랑과 자비가 구분될 수 없다면, 이 마을은 왜 부정negabis 되어야 하는가?


다시 니체에 따르면, 도덕은 말하자면 지배계층의 규칙일 뿐이며, 중요한 건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로서의 사랑이다. 여기서 사랑이란 당연히 이성애를 뜻하진 않는다. 주어진 것을 향한 긍정으로서의 ‘사랑’만이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든다. 생활인으로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부조리한 필멸의 세상을 살아낸다는 건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가. 혹자는 ‘농부의 아들’로서 ‘빵’과 ‘사랑’을 제공하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 어떤 이(장 피에르)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겠으나, 어떤 이유에서든 ‘그는 죽었다’면, 그 자리를 대체할 누군가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생명력을 잃고 죽어 있는 공동체를 ‘중재’할 그 이름, 새로운 규칙이자 질서, ‘삶의 꼴’을 어쩌면 우린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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