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으로 음악을 완성시키다 1/2
이 글은 [이해의 시각예술, 공감의 청각 예술]과 이어지는, 본문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이 전의 글에선 시각예술과 청각 예술에 대한 특징을 굉장히 주관적이고, 인과적이며 일반화된 시각으로 이야기를 했었다. 간단하게 쓰고 싶긴 했지만 능력은 안되고, 성격상 간단히가 잘 안 되는 스타일이라 서론 치고는 이야기가 긴 편이다. 구태여 읽어야 하나 싶은 마음은 알지만, 훑어라도 본 후 이 글을 읽는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링크를 남겨둔다.
https://brunch.co.kr/@qmlamlf/13
이번 글도 나의 주관적이고 일반화된 생각이 듬뿍 들어가 있다. 그러니 부탁하건대 이 글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단 스스로의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시각에서 읽어주길 바란다. 행여 내가 쓴 내용 중 잘못되거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길.
음악은 무엇인가
이전의 포스팅에선 예술을 크게 시각예술과 청각 예술로 구분 지을 수 있다고 했다. 시각예술은 크게 회화, 조각, 건축으로 나눌 수 있으며 청각 예술은 음악을 의미한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청각 예술 = 음악 이 아니라, 청각 예술 안에 음악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언제, 어디서든 음악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청각 예술이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이 글의 첫 부분은 음악의 개념을 좀 더 명확히 하면서 시작해보려고 한다.
음악이란 무엇일까, 음악은 사전적으로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영역의 소리들을 일정한 법칙과 형식으로 종합해 사상과 감정을 담아내는 행위"로 정의된다. 여기서 '일정한 법칙과 형식'은 '화성학을 바탕으로'라는 문장으로 바꿀 수 있다.
화성학은 언어의 문법과 같다. 아니 애초에 음악과 언어 자체가 상호 불가분의 관계다. 언어의 자음과 모음이 모여 단어를, 단어가 모여 문장을, 문장이 모여 글을 만들듯, 음악 또한 서로 다른 음들이 모여 화음을 만들고, 그 화음을 바탕으로 멜로디를 만든다. 그리고 그 멜로디들이 모여 음악을 만든다. 단어가 문장이 될 수 있도록 규칙과 체계를 정립해놓은 것이 문법인 것처럼 독립적인 성질을 가진 화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구성, 연결, 조직들에 대한 규칙을 찾아내고, 그 규칙들을 체계화시키고 이론화시킨 학문이 바로 화성학이다.
화성학은 모든 음악의 근간에 깔려있는 학문이다. 좋은 글은 문법이 잘 지켜져 있는 것처럼, 듣기 좋은 음악 또한 화성학의 틀을 벗어나면 안 된다.
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아니, 본능에 가까운 것 같다.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이론을 배우며 형식과 틀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를 듣겠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화성학이 정해놓은 형식과 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지는 것만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없지만, 행동심리학에선 이러한 행동특성을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말한다. 즉,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최초 습득한 정보에 몰입하여,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지 못하거나 부분적으로만 수용하는 행동 특성
그렇다면 우린 왜 화성학이라는 학문의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말아야만 하는 것일까, 근본적으로 화성학이라는 학문이 완성될 수 없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화성학은 어렵게 말하자면 독립적인 화음의 성질을 분명히 하고 그 화음들의 연결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고, 쉽게 말하자면 소리의 조화(調和)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화로움은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내용이 일의적으로 규정될 수 없고 규정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화성학은 기존의 형식과 틀에서 벗어난 방식과 표현을 통해 계속해서 개선되고 수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 20세기 초, 흔히 클래식으로 알려진 바로크, 고전파, 낭만파 음악에서 현대의 실용음악으로 음악의 중심이 이동한 것은 사회, 역사적 요인도 분명히 있지만 새로운 화성의 표현방법이 등장했음이기도 하다. 기원후 600년, 그레고리안 성가에서 발전하여 사조의 흐름에 따라 멜로디 자체에 심오한 의미를 담아내려고 했던 과거의 고풍스러운 음악들과는 달리, 1910년대 백인들의 차별과 억압 속에서 고통받던 흑인들에 의해 탄생한 저열한 음악이었던 재즈는 전통 화성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지만 전통 화성학이 금지하는 병행, 은복, 성부 침해를 과감히 허용하는 등 확장음에 대한 해결에서 클래식 화성학과는 다른 접근으로 음악의 표현방법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으며, 아프리카의 전통 리듬을 가져와 결합하는 등 과거와는 다른 다채로운 표현력을 바탕으로 현대 대중음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한 가지 당부할 점은, 그 형식과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화성학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재즈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흑인과, 외형은 같지만 신분상의 이점을 통해 유럽의 수준 높은 음악이론을 배울 수 있었던 크레올 사이에서 음악적 소통이 이뤄졌기에 음악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재즈 화성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크레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 참조)
현대음악이 첫 모습을 드러낸 1917년도부터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 대중음악과 대중음악사에 족적을 남긴 뮤지션들은 안주하기보단 끊임없는 변화를 선택해왔다. 고인물은 썩는다는 말처럼 모든 건 변화 없이는 도태되고 잊혀지기 마련이며, 음악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전 세계의 수준 높은 음악이 동시다발적으로 공유되며 대중들의 귀가 빠르게 고급화되고 있는 지금, 레퍼런스라는 명목 하에 다른 창작물의 아이디어를 베껴오거나 살짝만 변형하여 그대로 가져다 쓰는 유사 카피캣 곡이 너무나도 많은 지금, 대중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익숙한 음악이 아닌 색다른 음악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음악은 현재 사전상 "일정한 법칙과 형식". 즉 화성학을 바탕으로 사상과 감정을 담아내는 행위로 정의되고 있지만, 청각 예술은 개인의 경험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제각기 다른 형태로 해석되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음악에 대한 정의도 대중들에 시선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든, 언제든 새로이 정립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음악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은 기존의 법칙과 형식에서 벗어남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게 내가 이 글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이며, 내가 음악을 접근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다른 예술가들은 음악을 어떻게 접근할까, 음악을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선 아티스트마다 제각기 다른 방식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이야기들을 인용하여 앞으로의 글들을 써 내려가 볼까 한다.
Fine 19.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