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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부슬 May 14. 2021

설거지 노동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설거지는 얼마나 지루한 노동인가. 먹기를 관두지 않는 한 설거지는 언제나 밀려 들어온다. 지금은 아이가 자라 젖병 설거지로부터 해방되어 상황이 좀 나아졌지만, 19개월 된 아이는 이제 우리 집 식탁에서 어엿한 한 입, '식구 1인'의 몫을 한다. 아이의 식사를 귀찮다고 건너뛰거나 대충 군것질로 때우거나 하는 식으로 어미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을 할 수는 없으니 하루 세 번 설거지는 꾸준히 쌓인다. 게다가 맛 좋은 요리는 식기와 조리도구에 기름기를 남기기에, 만족도가 높은 식사 이후에 맞닥뜨리는 설거지는 가혹하게도 더욱 큰 힘과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설거지의 지루함과 고단함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형태의 방도를 꾀할 수 있다. (식기세척기를 장만하는 것이 궁극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하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1) 설거지 자체를 향유한다. 그릇들이 음식 찌꺼기와 기름기를 벗고 원래의 빛깔과 광택을 되찾는 과정, 부들부들한 거품의 감촉, 그릇의 굴곡, 미끌거리던 손끝이 뽀득해지는 기분, 식기 건조대 위에 그릇을 정갈하게 올려둘 때의 쾌감. 이 모든 과정에 세밀하게 나의 감각을 집중한다면 설거지 속에서 어떤 희열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현재를 살라'는 현대 사회의 캐치프레이즈와 공명하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2) 설거지 속도를 향상하는 기술을 연마한다. 생활의 달인 추앙적 방식이다. 끊임없는 설거지를 마주하는 가사노동자에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며, 아마 많은 이들이 이미 자신만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3)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는 타인을 곁에 두고 설거지를 한다. 일종의 '뇌 속이기'인데, 손과 발이 설거지에 묶여 괴로워하고 있을 때, 뇌를 다른 세계로 데려감으로써 뇌가 고통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것을 제한한다



한 회차의 설거지에 1), 2), 3) 모두를 지향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으나 역시나 나는 3)이 가장 마음에 든다. 1)의 방식은 지속 가능성이 낮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매일 하루 세 번씩 펼쳐지는 설거지를 매번 향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2)는 일손이 재빠르지 않은 나에겐 오랜 시간이 필요한 방식이다. 설거지 경력에 큰 차이가 없는 나와 남편의 설거지 속도를 비교해 보자면, 동일한 양의 설거지를 완료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적게는 1.5배, 많게는 3배까지도 차이가 난다. 나의 설거지 빈도가 훨씬 높은데도 불구하고 나의 손은 쉬이 빨라지지 않는다. 이런 나에게는 3)이 가장 적절하지 않겠는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으나 나는 이미 3)을 실천하고 있다. 나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는 타인이란 유튜브나 팟캐스트나 혹은 라디오 속에 있고, 나는 이어폰을 끼고 그들을 만난다. 설거지 노동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어폰이다.


내 설거지의 동반자


동물행동학 분야의 저명한 권위자, 에드워드 윌슨 최근 저작 <창의성의 기원>내용 중 일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다 떨고, 이야기하는 인간 형질'은 수렵 채집으로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던 최초의 호모 속 무리로부터 기원했다. 이야기하기는 동료 인간의 성격, 신뢰 가능성을 판단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이는 협력으로 이어졌으며, 협력 행동 없이 생존은 불가능했다. '수다 떨기와 이야기하기'라는 형질은 자연선택의 결과, 인간의 본능이 되었다고 말이다.

수다 떨기와 이야기하기는 다윈주의적 현상이다(232쪽).



출산 전 한창 교직생활을 할 때는 교실에서, 교무실에서, 복도에서 하루에도 백 명이 넘는 사람들과 마주쳐야 했다. 그때는 이야기가 넘쳤다. 내면의 수용 가능 범위를 넘어서는 이야기들을 감당하고 처리하는 게 과제라면 과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출산과 육아, 휴직, 코로나라는 환경은 나에게서 타인의 이야기들을 상당수 차단시켰다. 근래의 나는 대체로 이야기에 고픈 상태다. 그러므로 설거지와 이어폰의 결합은 나에게 필연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이므로.


p.s. 아, 설거지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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