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돌멩이가 카페 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그 돌멩이는 원래는 카페 '밖'에 속한 사물이었으나 한 아이의 손에 의해 '안'으로 옮겨졌다. 나는 옆 테이블에 앉아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 돌멩이가 카페 안에 들어온 일은 임시적 사건이므로 그것은 곧 바깥으로 다시 옮겨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돌멩이를 옮긴 아이는 나의 아들(18개월)이었기에 그 돌멩이를 바깥, 즉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일은 나의 혹은 남편의 과업이었다. 다만 돌멩이의 자리가 옮겨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때 나는 독서에 몰두하고 있었고 돌멩이의 자리를 되돌리는 과업을 잠시 미루어 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남편과 아이는 다시 밖으로 나가 카페 앞 개천가에서 놀고 있었다.)
잠시 후 퇴근 중이던 카페 직원 한 분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 돌멩이를 발견하셨고, 아주 재빠르게 그 돌멩이를 카운터에 계신 다른 직원분에게 전달했다. '이게 저기 있더라고' 한 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일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으므로 돌멩이의 출처에 대해 미처 설명할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카운터에 가서 '돌멩이를 올려둔 것은 제 아들이 한 일이고 돌멩이를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할 의무가 제게 있으니 돌멩이를 돌려주세요'하고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돌멩이를 받은 직원분의 반응이 너무나 태연했다. 그분들에게 그 돌멩이는 카페 안에 있던 돌멩이들 중 하나로 인식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마침 그 카페 내엔 커다란 화분이 여러 개 있었고 화분에는 돌멩이들도 많았다.) 아이가 밖에서 안으로 돌멩이를 옮겨 놓는 과정을 지켜보지 못한 이들에게 그 돌멩이는 '원래부터' 안에 속한 사물이었다.
나는 엄마가 엄마가 아니었던 때로부터 나의 엄마가 된 때로 옮겨지는 과정을 보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엄마였던 사람은 없는데, 엄마는 원래부터 엄마로 태어났을 거라고 쉽게 생각해 온 것 같다. 나에겐, 엄마라는 정체성이 여전히 부대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 문득 우리 엄마는 어떻게 엄마가 되어 갔을까 상상해 본다. 예전에 종종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기는 하다. 나를 낳기 이전, 내가 부재했던 때 엄마의 일상에 대해. 그리고 나를 임신하고, 나를 출산하고, 어린 나를 돌보던 시절에 대해. 엄마는 스물다섯에 나를 낳았고 이제는 엄마 인생에서 나의 엄마가 아니었던 때보다 나의 엄마로 살았던 때가 더 길어졌다. 나의 물음에 대한 엄마의 대답이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엄마의 그 시절에 대한 복기는 마치 납작한 옛날 신문 같았다. 그저 한 조각의 길지 않은 빛바랜, 어렴풋한 서술이었다. 엄마에게도 이젠 너무나 아득해져 버린 것 같다.
엄마라는 이름을 소거한 엄마는 어떤 종류의 문장일까. 그 문장을 건너뛰고서는 아무래도 나의 엄마가 된 한 인간을 온전히 설명하기란 불가능할 텐데.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요즘이다. 상상력의 방향이 비단엄마에게만 향하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현상했을 수많은 어떤 장면들을 묵과한 채로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실례를 범하기가 얼마나 쉬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