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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oheleth Jun 18. 2022

외판원의 밤

신입사원 때의 일이다.


야근의 적막함을 깨기 위해 코코아 한잔을 티스푼으로 젓고 있는데, 탕비실 문 너머로 서류를 잔뜩 든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식사 후 정리를 하느라고 사무실 현관문을 열어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보험사나 카드사에서 나온 것임은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볼만하였는데, 여의도의 절반이 어두워져 있을 이 시간에 아직도 문 열린 사무실을 찾아다니는 외판원은 흔치 않은 것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나를 제외한 모두는 이미 식후 담배 한 대씩 물고 사무실을 나갔을 터라, 그의 계약서에 사인을 해줄 사람도 그를 쫓아낼 사람도 나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텅 빈 사무실을 보면서 곤란해하는 그에게 말을 거니, 그의 허리가 반쯤 숙여지고 있었다. 입사 두 달이 지나는 동안, 이 사무실에서 누군가에게 허리를 숙이는 대접을 받아본 것은 이 밤이 처음이었다.


내일 오전까지 10장의 계약서를 가져가지 않으면 급여를 받을 수 없다고도 이야기했다. 밑도 끝도 진실도 알 수 없는 세일즈 기법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으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긴장조차 풀려버린 그의 두 눈썹이 그 말에 현실성을 더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하루에 1장의 계약도 따낼 자신감조차 삶의 무게에 산산이 짓밟혀버린 듯하였다.


"다들 어려운 거, 잘 아시잖아요."


불행히도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하여도 대학원 졸업 후 몇 달로 이어진 무직 생활에 나의 예금잔고는 극적으로 줄어 있었고, 그 긴긴 터널을 이제 막 빠져나와 간신히 급여가 계좌로 들어오기 시작한 신입사원에게 그를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가 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는 조용한 말로 그렇게 대꾸하는 것뿐이었다.


그러한 배려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대게의 능숙한 외판원이라면 그런 부드러운 대응을 받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손을 서류가방 안으로 집어넣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신입사원인 나를 '과장님'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자존심 아래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용기를 긁어내며 선처를 호소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그의 숙여진 허리는 끝끝내 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명함 한 장을 건네는 데에서 그치고 사무실을 나서야만 했다. 그의 축 처진 어깨 위로 외판원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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