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전남 Oct 14. 2023

악! 가방이 통째로 사라졌다!

대한민국 경찰 여러분 존경합니다

좋은 차로 업그레이드 해드릴게요


대부분 패션의 도시라고 부르지만, 개인적으로 밀라노는 영원한 축구의 도시다. 두오모와 스칼라극장을 둘러보고 렌터카 업체로 향했는데, 렌터카 업체 직원이 '인테르' 유니폼을 입고 있다. 오호라. 바로 축구드립을 들이댄다. 인테르 주축 선수인 '캉드레바'에 대한 존경과 '라우타로 마르티네스'에 대한 기대감을 풀어내자, 과묵해만 보이던 렌터카 업체 직원도 입이 귀에 걸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쩌면 당연한 서비스, 미리 예약한 소형차 대신 포르셰 마칸을 제공받았다. 아자뵹!


고속도로를 쭉쭉 미끄러져 나간다. 비싼 차는 다 이유가 있구나. 순식간에 제노아를 지나 1차 목적지 친퀘테레에 도착했다. 유럽 어학연수 시절 우연히 들른 친퀘레테를 언젠가 가족과 함께 가고 싶었는데, 그렇게 기회가 찾아왔다. 숙소를 잡고 지중해를 끼고 자리 잡은 친퀘테레(5개의 마을)를 하나하나 돌아본다. 걸어보기도 하고, 기차를 타기도 하고, 배를 타기도 하고... 다양한 이동 수단이 도무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기념이 될 작은 소품들도 반갑다. 누군가는 그림 같은 풍광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사진으로 느끼기 어려운 감성에 지갑이 절로 열린다. 


친퀘테레 마나롤라




멀리 기우뚱 기울어진 탑이 보인다. 전 세계 부실공사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저 유명한 ‘피사의 사탑’이다. 쓰러지는 탑을 낑낑거리며 들어 올리는 사진 대여섯 장 찍는 게 목표인데, 한가한 친퀘테레와 비교해 사람이 꽤 북적거린다. 숙소 주차장이 만차라 주변에 적당히 주차를 하고 보니, 환브로는 이미 피곤에 곯아떨어졌네. 지환이를 억지로 깨우고, 려환이는 들쳐 안고 일단 숙소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숙소, 일단 꼬마들 침대에 던져놓아야 짐을 옮길 수 있겠더라. 숙소는 은근 사탑 뷰다. 테라스에 나가 고개를 돌리니 멀지 않은 곳에 솟아 있는 사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창문에 이상한 수건이 붙어있어.


짐을 챙기러 간 아내가 고개를 갸웃한다. 렌터카 창문에 수건이 붙어있다는데, 말인가 방귀인가. 일단 달려가본 현장은 참혹했다. 창문에 붙어있다는 수건을 걷어 올리자 깨진 창문이 드러났다. 도둑이다. 수건은 창문을 최대한 조용히 다치지 않고 깨기 위해 사용된 모양이다. 트렁크에 실린 커다란 짐가방 두 개가 통째로 사라졌다. 머리가 하얘진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불과 10여 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주변을 둘러보기로 하고, 아내가 숙소 주인장을 불러냈다. 난감해하는 주인장, 놀러 잠이 깬 환브로는 당혹감 속에 눈물을 흘렸다.


렌터카 무상 업그레이드, '운수 좋은 날' 


숙소 체크인을 위해 들고 간 지갑과 여권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랩탑과 고프로 등 고가 제품부터 환브로 장난감과 앞서 사들인 소소한 기념품까지 싹 쓸어갔다. 아, 친퀘테레의 멋진 풍광이 담긴 그림도 들고 갔더라. 당장 옷가지도 없고, 난감하기 짝이 없다. 숙소 주인장 도움을 받아 경찰에 신고를 했다. 범행 시각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고, 범행 특성상 주변에 사는 불량배들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인근 CCTV만 확인해도 충분히 범인 검거가 가능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가 만난 이탈리아 피사 경찰들은 쓰레기 그 잡채였다. 신고를 한 숙소 주인장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가 직접 경찰서로 가야 한다는 거다. 현장 검증 이런 거?  없다. 그냥 무조건 경찰서로 일단 오라고 한단다. 어이없어하는 찰나 경찰 순찰차가 옆을 지나친다. 하늘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숙소 주인장이 경찰차를 세워 상황을 설명하니, 어라 순찰차가 그냥 떠나버리네. 경찰서로 가서 신고하라는 똑같은 소리다. 그런데 이 순찰차가 갑자기 후진해 돌아온다. 10분 뒤면 경찰서 문 닫으니까 서둘러 가는 게 좋을 거라고 친절(?)한 안내가 이어진다.


영사관에 연락을 해보니, 이 동네 경찰들이 좀 그렇다고 이해하라는 설명이다. 난민이 많이 몰려들면서 치안이 악화됐다는데, 이 정도면 굳이 경찰이 있을 필요가 있기는 할까. 좋은 차를 공식 주차장이 아닌 곳에 주차해서 그렇다면서 피해자 책임론까지 언급하는데, 위로하는 방법도 이보다 더 거지 같을 수 없다. 어쨌든 문 닫기 전에 경찰서로 가야지. 깨진 유리창 사이로 바람 솔솔 들어오는 차를 끌고 극적으로 경찰서 도착하니, 서류 한 장 던져준다. 보험사 제출용 도난 확인증이다.


그래, 꼭 필요해서 훔쳤을 거야.


여행을 중단하고 바로 귀국길에 오를까 고민했지만, 망연자실 환브로에게 여행에 대한 나쁜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정말 예기치 못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도 여행이다.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여행을 통해 환브로가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을 익히기를 바랐다. 쇼핑센터로 달려가 최소한의 생존 비품을 사들였다. 옷가지가 필요했고, 휴대폰 충전기를 사야 했다.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 남들 다 찍는 쓰러지는 탑 밀어 올리는 사진도 팡팡 찍으며 기운을 내보았다. 하지만 충격은 여전했고, 아직 그 누구도 마음껏 미소 짓지 못했다.


마르세유 대성당에서 마음의 평화를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다. 마르세유 대성당은 차분한 적막으로 환브로 가족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아마 우리 물건을 가져간 도둑들도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야. 우리보다 더 그 물건이 필요했을 수도 있어. 힘든 일이지만, 이제 우리 그 도둑들을 용서해 주면 어떨까. 아빠는 떨리는 목소리에 환브로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무서웠을까, 소중히 아껴온 물건들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환브로가 정말 도둑들을 용서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웃음을 되찾기 시작했다.




여행을 마치고 일 년이 조금 넘게 지난날. 가족들을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친퀘테레에서 구입한 그림을 다시 구입해 보기로 한 것!  작은 화실이었지만 구글링과 SNS 검색 등을 통해 연락처를 찾아내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작가는 놀랍게도 환브로를 기억했다. 게다가 그간의 사정을 듣고는 이탈리아를 대신해 사과를 하고 싶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림을 다시 구입해 가족들을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말에는 무한 박수와 함께 깜짝 할인가를 제시했다.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금액에 이탈리아 경찰로 시작된 부정적 감정마저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렇게 다시 한 달쯤 흐른 뒤 이탈리아에서 놀라운 소포가 도착했다. 애초 구입한 그림과 같은 그림이 그려진 작은 엽서 한 장... 우리 가족은 그렇게 다시 한번 깔깔 유쾌한 웃음잔치를 벌여본다ⓚ.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작은' 추억


작가의 이전글 크루즈 어디까지 타 봤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