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한 글자 획수가 58획이라고요????
가끔(?)이지만 해외여행을 하는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그 무언가를 느끼고 싶어서다. 한국에서는 빙하를 볼 수 없고, 한국에서 화산의 열기를 느낄 수도 없다. 푸른 초원을 뛰어다니는 코끼리와 얼룩말 떼를 볼 수도 없고,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뒹굴 수도 없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어디든 언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영상으로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 때문일 테다. 물론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과거와 비교해 감흥이 덜해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난 요즘 음식에 주목한다. 한국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그 어떤 나라 본연의 맛, 그 맛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물론 그냥 놀러도 간다.
이번 중국 여행도 음식이 중요한 포인트였다. 어마무시한 자연환경과 유구한 역사에서 비롯된 다양한 문화유산이 여행자를 유혹하는 중국이지만, 여기 중국요리가 빠질 수 없다. 한국에서도 중국요리를 먹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중화요리 아닌가. "아무리 '정통'이 붙고 '원조'가 붙어도 중화요리는 중화요리일 뿐 중국요리는 될 수 없다"는 근거 불명의 신념을 갖고 중국 본토 음식에 도전해 본다. 그런데 중국이 넓다. 생각보다 많이 넓다. 땅은 넓어도 비슷비슷한 미국과는 또 다르다. 기후가 다르고 식재료가 다르고 민족 구성마저 차이가 있는 데다, 미국과 달리 영향을 주고받는 이웃나라도 꽤 많다.
딱히 중요한 내용도 없이 늘어진 서론을 뒤로하고, 본격적인 음식 사냥에 나선다. 시안에서 만난 첫 번째 몹은 바로 졸개급 탕탕탕후루루루루루 '탕후루'라는 녀석이다. (원조 논란이 있을까 모르겠지만) 탕후루는 중국이 원조다. 남송시대 병에 걸린 황제 애인에게 탕후루를 먹였더니 회복됐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퍼져나가며, 지금의 탕후루가 시작됐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되시겠다. 처음에는 산사나무 열매를 설탕에 달여 꼬치에 꽂았다는데, 지금은 알다시피 꽤 진화했다. 산사나무 열매는 물론 딸기, 샤인머스킷, 호두 등 이것저것 되는 대로 꽂아댄다.
중국 탕후루는 일단 저렴한 가격이 주요 무기다. 게다가 거리 곳곳 구석구석에 탕후루 상인이 포진해 있다. 원하면 언제든 쭉쭉 빨아댈 수 있다는 건 절대 만만한 녀석이 아니라는 방증! 일단 한 번 맛을 보기 시작하면 또다시 사 먹을 수밖에 없는 매혹적인 맛을 자랑한다. 대만에서 맛본 탕후루를 추억하며 한국 탕후루를 힐난하곤 했는데, 이제는 대만 탕후루는 기억에서 대략 잊혔다. 일단 과일을 감싼 설탕이 두껍지 않다. 아슬아슬 얇은 막을 형성했는데, 그 적절한 두께가 감탄을 자아낸다. 과일이 의외로 신선하다는 점도 놀랍다. 노점에서 파는 탕후루와 매장에서 파는 탕후루 가격 차에 비해, 탕후루 맛과 질의 차이는 크지 않다. 이대로 탕후루에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그저 졸개급인데.... 의식이 흐릿해질 무렵,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노점에서 산 탕후루 과일이 살짝 맛이 간 느낌적 느낌이다. 수차례 격투 끝에 이렇게 중국 탕후루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으하하.
다음은 난생처음 대면하는 녀석이다. 언젠가 전설적인 이름에 대한 이야기는 언뜻 들은 기억이 있다. 실제 사용하는 한자 가운데 획수가 가장 많은 글자로 기억한다. 획수가 무려 58획이나 되는 무시무시한 한자를 품은 이름의 이 음식은 뱡뱡면이다. '뱡뱡면 뱡'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한자를 쓰는데, 한글로 좀 비벼보려고 '뺭뺭면'이라고 해봐도 상대가 안 된다. 넓적한 면발이 특징인데, 넓적하게 면을 만들 때 나는 소리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역시 믿거나 멀거나 전설이 있더라.
산시성 특산 요리로 현재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뱡뱡면을 요리하는 곳이 없다고 한다. 부산에 한 곳 있었는데, 2024년 말 문을 닫았기 때문이란다. 예전보다는 못해도 여전히 한국에서 탕후루가 팔리는 걸 보면, 뱡뱡면이라는 이 녀석이 이름값을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감을 갖고 뱡뱡면을 상대하러 거리로 나섰다. 지역 명물인 만큼 거리 곳곳에서 뱡뱡면 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 한자를 몰라도 상관없다. 무지막지하게 복잡한 한자가 연달아 있으면 뱡뱡이다. 대충 검색기 돌려서 유명한 집을 찾아냈다. '이가네 뱡뱡면', 집안 성을 걸고 파는 음식점이다. 무참히 패하더라도 강한 녀석과 상대하는 게 진정한 무사도, 식당 안으로 난입에 성공한다.
호기롭게 뱡뱡면을 주문했다. 여기에 산시성 스타일 '유포면'을 추가한다. 스트리트푸드파이터에서 백종원이 하얼빈에서 먹었고, 흑백요리사에서 정지선 셰프가 만든 그 요리다. 뱡뱡면에 비해 매우 익숙한 한자라 안 시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먼저 식탁에 오른 건 '러우지아모'되시겠다. 산시성 명물 음식이라고 하면 뱡뱡면과 함께 잘 따라붙길래 주문을 넣었다. 서양 햄버거의 원조격이라는 또 다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담긴 음식이다. 냠냠, 챱챱, 기대가 컸을까. 배고플 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수준이다. 맛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딱히 일부러 찾아 먹을 것도 아닌 평범한 장수, 단칼에 씹어먹고 진정한 무장 '뱡뱡면'을 기다린다.
드디어 나타난 뱡뱡면과 유포면 형제. 넓적한 면을 사용했고, 국물 없이 비벼먹는다는 점이 비슷하다. 유포면은 우리 짜장면처럼 소스가 넉넉해 보이지도 않는다. 싱거운 거 아냐. 에이, 일단 비벼보자. 쓱싹쓱싹, 진정 소스가 부족한 걸까 잘 비벼지지도 않는다. 그래도 어떻게든 비벼내고, 본격적인 결투에 돌입한다. 입맛이 제법 까다로운 려환이가 갑자기 괴성을 지른다. "오, 이거 맛있다!" 지환이도 엄지를 추켜세운다. 의심의 눈초리로 음식을 응시하던 아내도 아이들의 반응에 미간이 팽팽해진다.
뱡뱡면은 미트볼파스타와 우리 짜장면을 절묘하게 조합한 맛이 느껴진다. 달짝지근함이 덜하면서도, 상콤하면서 묵직한 쫄깃함이 입안을 맴돈다. 아이가 싫어할 수가 없다. 면이 넓적해 소스가 적어 보이지만, 기본 제공되는 소스가 딱 적절하다. 유포면은 일종의 오일파스타 느낌이다. 중국 음식을 이탈리아 음식 등에 비유하는 게 참 미안한데, 지식과 표현력이 짧은 걸 어쩌랴. 여하튼 풍미만 놓고 본다면 유포면이 뱡뱡면을 압도했다. 파기름을 마늘과 고춧가루를 얹은 넓적한 면발 위에 부었는데, 면의 식감과 식재료가 뿜어내는 풍미가 군침을 돌게 한다.
솔직히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유포면이다. 뱡뱡면을 인정하지만, 뱡뱡면을 먹고도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포면을 맛보고는 그대로 KO를 당했다. 더 이상 덤빌 수가 없었다. 아직도 이번 여행에서 상대할 중국 음식들이 산적해 있는데, 벌써 이렇게 드러눕다니. 일단 숨을 고르고 체력을 비축한 뒤 다음 녀석을 만나러 가자. 중국 대륙을 대표하는 양꼬치와 훠궈 장군들이다. 그나저나 유포면 때문에 하얼빈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