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인 캐나다 변호사다

한국인과 캐나다인 그 중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어요

by Shin

나는 한국인 캐나다변호사다.


나는 한국인이다. 태권도장에서 찰진 발차기 소리와 함께 시흥의 초등학교와 안양의 중학교를 나온 꿈 많은 소년이었다. 할리스 커피에서 일하며 사회의 쓴맛을 보았고 병장 만기전역을 했다. 나에게 힙합은 Eminem의 속사포 랩이 아니라 빅뱅의 감성이며 락은 Queen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버즈의 가슴을 울리는 코드다. 카카오톡이 멈추면 내 세상도 멈춘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캐나다의 느긋함에 물들어버린 내게 한국의 치열하고 경쟁적인 삶은 낯설어져버렸다. 운전중 보행자가 지나가길 기다리던 나를 향한 뒷 차의 경적소리에 긴장이 가득하다. 뒤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고 있는 내 손은 한국에서는 조금 낯설고 이질적이다. 김치란 일 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 한 음식이 되었고, 맵지 않은 음식에 길들여진 미각은 신라면 한봉지조차 계란을 두개는 풀어야 할 만큼 변해버렸다.


나는 캐나다인이다. 숲과 산, 바다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자연의 숨결을 느끼며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로스쿨을 마쳤다. 같은 분야라면 누구나 알만한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고 캐나다의 무역사절단 일원으로 캐나다를 대표한다. 매주 한번은 와인과 치즈가 나오는 행사를 참석하여 사회의 주류가 된 것 마냥 여유롭게 잔을 들고 캐나다의 경제와 정치에 대한 나만의 의견을 던지며 대화를 나눈다.


나는 캐나다인이 아니다. 택배 하나 받는 데 일주일, 간단한 서류 하나 발급에 몇 주를 기다려야 하는 캐나다인의 느긋함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말하고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변호사이면서도, 영어 한마디 실수할까 움츠러드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하키나 풋볼이 주제인 대화에서는 은근슬쩍 자리를 비우거나 침묵 속으로 물러서 내 존재감을 희미하게 만든다. 여전히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팁을 낼 때면, 너그러운 마음보다는 의구심이 든다. (심지어 나는 커피를 포장해가는데?)


한국인과 캐나다인의 경계선에 애매하게 서 있었다. 어떤 순간에는 한국인으로, 또 다른 순간에는 캐나다인으로, 다만 어느 한쪽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정확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 채 이리저리 널뛰기하며 살아왔다. 어느 한쪽과 온전히 융화하기엔, 나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혹은 어느 한쪽과 멀어지기엔 나는 이미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얽혀져 있다. 한국인도 캐나다인도 아닌, 한국에서는 검은 머리의 외국인 그리고 캐나다에서는 이민자로 소속감 없이 남겨져 있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경계선 위에 서있다. 다만 무언가 달라졌다. 온전히 어느 한쪽에 속할 수 없다며 안정감을 갈구하기 보다는 이 모호함 자체를 내 정체성으로 정의했다. 두 세계를 다 경험해보았기에 각각의 좋은 부분만을 받아들였다.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았기에 두 쪽 모두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경계선이 나를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 되었고 내 모호함은 장점이 되었다. 한국인으로서 반과 캐나다인으로서 반이 더해진 결과는 하나가 아닌 둘 셋이 되었다.


나는 어쩌면 가장 절묘하게 한국인과 캐나다인을 섞어놓은 사람이다. 온전한 한국인도 캐나다인도 아니지만, 또 외국 정서에 너무 물든 예의 없는 교포도 한국 정서가 너무 뚜렷해 향수병을 앓는 이방인도 아니다. 두 문화가 얽히는 지점에서 느끼는 혼란과 갈등, 그 속에서 얻은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