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할 따름

새로운 것은 곧 익숙해진다

by 하리니

일곱 번째 대만 출장을 마치고 한국 복귀를 준비합니다. 작년 6월에 처음 온 이후로 헤아려보니,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100일 이상을 대만에서 보냈습니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낯설기만 하던 이곳의 풍경은 이제 제법 익숙한 동네처럼 느껴집니다. 여전히 좋은 곳이지만, 밤 길 한구석에서 가끔 출몰하는 '바선생'만큼은 끝내 적응이 안 되네요.


저는 반도체 칩을 설계하는 엔지니어입니다. 저희가 개발한 제품의 일부 성능이 목표치에 도달했는지 검증하기 위해 이곳 대만에 왔습니다. 해당 테스트에는 개당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초고가 장비와 고도의 전문 인력이 필요한데, 대만에는 감사하게도 이러한 테스트 환경을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파트너사가 있습니다. 지난 1년간 이곳을 오가며 제품을 담금질했고, 마침내 처음 계약했던 모든 평가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작년 이맘때, 첫 평가를 앞두고는 상당한 긴장과 우려가 있었습니다. 당시 저희가 목표로 했던 성능은 이전에 가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이제껏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만 봤던 운전자가 처음으로 시속 150km 주행에 도전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과연 제품이 이 속도를 견딜 수 있을까? 혹시 달리다가 바퀴가 빠지거나, 조향이 틀어지는 심각한 문제는 없을까?’ 걱정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흐른 지금, 그 모든 평가는 끝났습니다. 수많은 우려를 뚫고 우리가 만든 제품은 목표했던 성능을 훌륭하게 발휘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외에도 수많은 다른 성능들 또한 기대치만큼 발휘해 곧 제품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기적처럼 느껴졌던 일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불과 1년 전만 해도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던 ‘시속 150km’는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기준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우리는 시속 600km라는 4배 더 높은 성능을 목표로 다음 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까마득한 도전이지만, 신기하게도 예전만큼 두렵지는 않습니다. 아마 ‘시속 150km’의 성공이 안겨준 자신감 덕분이겠지요. 그리고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시속 600km’ 역시 우리에게 ‘당연한’ 기술이 되어 있을 겁니다.


이처럼 반도체 기술의 발전은 비범함(Unusual)이 평범함(Usual)이 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어제의 혁신은 오늘의 표준이 되고,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가차 없이 과거의 것이 됩니다. 예술 분야에서 오래된 ‘클래식’이 세월이 흘러도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과는 사뭇 다른 길입니다. 반도체 기술은 오직 더 높은 용량, 더 빠른 속도, 더 낮은 전력 소모량 같은 냉정한 숫자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며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이번 출장을 마무리하며 문득 낯설었던 대만의 풍경이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난 1년간 ‘불가능’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기술이 ‘당연한’ 현실이 되는 과정을 겪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버겁고 낯설게 느껴졌던 수많은 일들이,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익숙한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며 적응해 나갑니다. 끊임없이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 어쩌면 이것이 기술의 발전과 우리 인생의 공통된 숙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작가의 이전글허구의 외줄 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