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
Dear Eun,
얼마만의 편지일까. 우리 그동안 참 많이 변했지? 스무 살의 우린 꿈이라는 단어로 만났고 함께 울고 웃으며 이제는 엄마로, 그리고 유학생으로 살아가고 있어. 일과 사랑에 정열을 담던 언니의 눈이 얼마나 초롱였는지 언닌 알지 못할 거야. 삶과 사회가 이따금씩 던져주던 절망의 비를 맞고도 우리가 지금의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은 아마도 언니의 그 반짝이던 눈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던 나의 무릎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 엄마가 되어 자신을 잃어가는 것이 두렵다는 언니의 그 말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해. 그럼에도 꿈을 향해 뛰는 심장과 포기하지 않는 손을 가진 이를 우주는 결코 외면하지 않을 테니 언니 조금만 더 힘내!
20대 후반, 정말 대학을 또 가려고?
수많은 방학을 보내던 그때의 나는 언젠가 지금의 내 나이가 된다면 조금은 분명한 길 앞에 설 줄 알았어. 여전히 돈과 씨름하고, 이 긴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며 살아가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대학을 가겠다는 나의 선택에 처음으로 한숨 쉬던 부모님의 얼굴이 이제는 희미해질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우습게도 이제 나의 흐릿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
우연히도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독일에서 처음 정착한 도시였던 쾰른을 지나는 기차 안이야.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당시 내가 가졌던 마음가짐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의 향수처럼 내게 스미네. 나는 독일에 왜 왔을까. 이토록 길어질 학생생활을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대학을 갓 졸업한 그때의 나는 패기 넘치는 청춘이었고 과감했어. 아빠가 주신 2천만 원이라는 돈이 얼마나 감사하고 큰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 대학을 준비하는 과정과 언어 시험을 치르는 과정은 쉽지 않았어. 돈과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렇게 원하던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내게 남은 것은 백만 원 남짓한 돈과 지나간 2년이라는 세월이더라.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 시간들을 나는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한국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에 색안경이 끼워지기 시작하니 내가 가고자 하는 이 길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건 사실이야. 아빠는 나의 2년을 ‘낭비’로 바라보았고 앞으로의 도전은 오로지 ‘나의 힘’으로 해내기를 권했어. 입학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지원해줄 수 없으며 감당할 수 없을 시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 ‘귀국’ 뿐이었어. 하지만 나는 쾰른에서의 그 시간들이 얼마나 값졌는지, 만남과 깨어짐 속에 얼마나 많은 성장이 있었는지 알았기에 포기가 안되더라. 오랜 가동시간 뒤 이제야 속도가 붙기 시작한 기차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나는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그 길을 절대 멈추고 싶지 않았어.
맨바닥에 헤딩
해 봐야지. 부딪힐 바닥이 있다면 그래도 가 볼만하다는 생각으로 나아갔어. 나는 가진 것 없이 홀로 헤쳐나가야만 했던 그 상황을 주변에 당당히 알렸어. 지금의 상황은 지나고 보면 그저 인생의 한 점일 뿐일 테니. 언젠가 지나갈 이 순간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이룬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았어. 이러한 나의 간절함이 세상에 진동하여 주변의 상황과 사람들이 나를 돕기 시작하더라. 나는 기적처럼 장학금을 받았고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어. 그곳에서 만난 이들을 통해 코로나 임시 지원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매달 500유로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으며 생활할 수 있었어.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정했고 나의 지친 마음에 꽃과 같은 위로를 주더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진정한 마음으로 다가와준 그들을 통해 나는 우정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썼어. 이처럼 마음을 울리는 만남은 국경을 초월할 수 있음을 깨달았지.
마음에 안정을 찾기 시작하자 나는 자연스레 학업에 빠져들게 되었어. 언어와 학문을 탐구하는 과정 안에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모순적이게도 ‘행복감’ 같은 것이 피어났어. 그것은 삶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평안함이었는데 이렇게나 불안정한 삶 가운데 나는 어떻게 매일 밤 ‘행복하다’ 말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주체적인 삶이 주는 선물 같은 것이었나 봐. 그렇게 삶에 터를 내리기 시작하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아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생겼다고 말해야 할까. 공부를 하는 목적과, 이곳에서 내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 혹은 독일에서 어쩌면 두 곳 모두에서 일을 하게 될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 고민했고 그것은 삶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지.
휴식과 자기 계발의 방학
하지만 제대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심각한 체력 저하를 경험했어. 하루 종일 수업에 집중하기 위해 쏟는 에너지와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해야 하는 공부들로 인해 내게 남은 체력은 거의 無에 가까웠지. 뿐만 아니라 더불어 아르바이트와 과외까지 병행하고 있으니 무쇠가 아닌 이상 지치지 않을 수 없더라. 하지만 나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을 포기하지 못해 자주 만났고 맥주만큼이나 와인을 좋아하는 독일인 친구들과 함께 길고 즐거운 밤들을 보냈어. 그것은 어려운 학업 가운데 주어진 단비 같은 시간들이었으나 모든 것이 합쳐지니 나는 결국 몸은 탈이나 버렸어. 수면 부족과 함께 찾아온 위염으로 난생처음 독일 응급실을 가게 되었지 뭐야.
몸으로 얻은 깨달음을 통해 지난 학기 나는 조금은 고요한 시간을 보냈어. 하지만 공부의 양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니 체력은 더 나빠졌고 나는 살아남기에 급급해지더라. 결국 오랫동안 가지 않은 헬스를 다시 등록해서 다니기 시작했어.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는 반드시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지. 오로지 아무것도 안 하는 그 시간들은 천천히 나를 다시 충전시켰고 학업과 관계 모든 면에 다시 초록불을 켜기 시작했어.
‘무언가를 해야’만 시간에 의미를 부여했던 한국에서의 방학과는 달리 현재의 나는 어떻게 하면 잘 쉬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어. 마음 같아서는 아르바이트와 과외도 모두 쉬고 햇살 비춘 발코니에 앉아 하루 종일 책만 읽고 싶지만 살아가기 위해 일을 쉴 순 없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규칙적인 운동과 충분한 수면을 통해 잃었던 눈의 총기와 몸의 탄력을 찾아가는 지금, 나는 감사하게도 삶에 여유를 주는 법을 다시 찾기 시작했어. 한국에서 보내온 책들을 읽으며 그동안 놓친 한국문학의 흐름과 시대의 감각을 알아가고, 다음 학기 논문 주제와 관련된 책들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이 시간들은 말 그대로 값진 시간들이야. 아니라고? 내가 너무 지루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고? 어쩌면 그런지도 몰라. 하지만 언제까지 주어질지 모르는 나의 유학생활을 후회 없이 보내고 싶어. 도전을 위해 체력을 기르고, 도약을 위해 책을 읽는 나에게 이 여유로운 방학은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기회인 것이지.
가장 클래식한 것을 통한 깨달음 : 여행
사실 나는 집순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야. 나의 타고난 여행/도전 욕구는 언제나 마음 안에 들끓고 있지. 지금도 나는 사실 Hamburg로 향하는 기차 안이야. 시간이 거의 나지 않던 학기 중에도 나는 주말이면 근교로 홀로 여행을 자주 떠났는데 그것이야 말로 나에게 인생을 그리게 하는데 좋은 영감이 되어주었어. 기차 안의 사람들의 표정, 낯선 도시의 카페에 앉은 사람들, 그리고 저마다의 속도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도 열심히 살고 싶어 진달까. 그들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리고, 도시가 주는 느낌과 냄새를 가슴 안에 담을 때면 마치 무언가를 이룬듯한 느낌을 받아.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일상에 스며들어 좋은 아이디어가 되어주지. 무엇보다 여행을 통해 얻는 새로운 에너지와 뜻하지 않은 만남은 우리의 기분을 완전히 바꿔주잖아. 때론 그것이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주 작은 그 기억들이 평생에 남는 아주 소중한 것이 되어줘.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함부르크 여행이 나에게 가져다줄 것들이 정말 기대돼.
학생이지만 학생 아닌 나의 일상으로
용돈 받아 쓰며 걱정 없는 주말을 보내던 한국에서의 대학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현재의 나는 ‘어떻게 하면 부모님께 용돈 드리는 학생이 될 수 있을까’를 치열하게 고민 중이야. 이 여행이 끝나면 나는 2주간의 짧은 방학을 끝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하지만 그때의 나는 오늘의 나와는 또 다른 내가 되어있을 거야. 여행과 삶을 통해 만남 경험들이 나의 지경을 넓혀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해. 그렇게 느리지만 확실한 발걸음을 내딛다 보면 학생이지만 학생 아닌 사회인이 되어있지 않을까? 나는 스티브 잡스와 같이 위대한 이들이 대학을 중퇴하고 자신의 비즈니스를 이룬 것을 볼 때면 마음 안에 불꽃을 느껴. ‘나는 과연 이곳에서 다시 공부를 하는 것이 맞나?, 지금이라도 나의 비즈니스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정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학생으로서도 자신의 비즈니스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이 학업을 처음 시작했던 그 마음가짐으로 내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찾기 위해 애쓴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학생이지만 학생 아닌 사회인으로, 유학생이지만 유학생 아닌 듯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어. 그렇게 살다 보면 찾을 수 있겠지. 정말 나다운 것을, 그리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언니, 오랜만에 나눈 우리의 대화가 나는 참 좋다. 엄마가 되어도 여전히 고민하는, 안정을 바라지만 끝없이 도전하는 우리의 이야기는 나 스스로에게도 언제나 좋은 영감과 자극이 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각자의 방학을 잘 보내고, 머지않은 미래에 만나 함께 웃을 수 있길 바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