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가 된 지, 두 달이 되어간다. 오늘은 씁쓸한 한숨을 뱉으며 왜, 구독자가 늘지 않을까, 혹은 내가 글을 써도 되는 사람인가란 사념에 사로잡힌 브런치 작가님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노트북을 열었다.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어쩌다 글을 올리면 얼마 후 구독자가 이탈하는 현상을 두어 번 겪었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 일정을 쪼개가며 국가자격증 화상회의 연수를 받으며 짬짬이 글을 쓰고 있다. 아, 어쩔 땐 짬이 나지 않아서 잠을 줄이며 쓰기도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버겁다거나 내가 왜 이렇게까지 애를 쓸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는다. 그저 요란하지 않게 노트북을 열고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글을 쓸 뿐이다. 내가 처음부터 글쓰기에 이렇게나 쿨한 사람은 아니다. (글쓰기에 쿨해진 일련의 계기는 뒤에 쓰겠습니다.)
어쨌든 가끔 브런치에 새로 게재된 글들을 살펴보자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 드디어 브런치 작가 되다, 써야만 해서 씁니다, 오래 쓰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등등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글이 참 많이 올라온다. 그만큼 많은 작가님들을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고민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종종 브런치 구독자가 늘지 않는다며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 인생의 회한으로까지 연결되는 작가님들을 볼 때면 가슴이 조금 아리다.
브런치 작가들 중엔 이미 출간 경험이 있는 분들도 많고 어떤 방식으로든 글을 쓰는 일과 연관된 직업을 갖고 계신 분들도 많다. 나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였고, 출판사에서 재직한 경험이 있지만 글 쓰는 일로 밥 벌어먹고 산 경험은 없다. 보도자료 작성이나 광고 카피를 제작한 경험은 많지만 순전히 나의 이야기를 쓴 글밥을 먹고 산 적은 없는 거다. 그런 나도 돌이켜보면 늘 글과 함께였다. 나의 글쓰기가 이렇게 담담해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나 되짚어봤다.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나의 10대 시절, 글쓰기)
내가 처음 글이라는 걸 쓰기 시작한 건, 본격적으로 열일곱 살 때였다. 아예 책과 담을 쌓고 사는 아이들보다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지만 소위 책벌레라고 할 만큼의 풍부한 독서량을 가진 학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초등, 중학생 때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내서 담임선생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늘 백일장에 참가하는 학생도 아니었다. 물론 백일장에 참가하여 상을 탄 적은 있지만 백일장 상을 휩쓰는 정도는 아니었다는 거다.
그래도 중학교 3학년 때 방학숙제로 영화감상문을 제출한 적이 있는데 선생님이 교무실로 호출했던 경험은 있다. “이런 비평 수준은 어린 학생한테 나올 수 없는 시선이야. 인터넷에서 발췌했니? 솔직히 말하면 0점은 안 줄게.”라고 했던 도덕 선생님의 작가 권유가 있었다. 또, 중학교 2학년 때였나. 담임이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어느 날 교무실로 조용히 나를 앉혀놓고 말씀하셨다. “너는 백일장용 글쓰기를 잘하는 편은 아니야. 근데 대학에서 문예창작과에 진학해서 작가가 됐으면 좋겠다.” 정도의 말을 들었을 뿐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열일곱 살 때였다. 주로 단편소설을 썼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집 안에 작가 한 명 없는데 어느 날부터 여러 명의 등장인물을 만들어 소설을 썼다. 훗날 내가 왜 고등학생 때 애들과 떡볶이 먹고 히히 낙낙할 시간에 독서실에 앉아 노트에 소설을 썼을까 생각해봤다. 나는 그때 외로웠다. 외로워서 글을 썼다.
사회성 결여나 오타쿠는 아니었는데 그 나이 또래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 시절 사춘기 소녀들은 옆 반 누구랑 누가 사귀는 것, 혹은 주말 시내에 나가 놀 때 어떤 옷을 입을지에 대한 열띤 토론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 나는 사람은 왜 살까. 사람은 왜 태어날까.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런 것에 관심이 많았으니 그들이 볼 땐 나는 어딘가 좀 붕 뜬 사람 같았을 거다. 친구는 많았는데 세상에 종종 혼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고독감을 해소하고자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서 소설을 썼다. 그러고 나면 기분이 한결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10대의 나는 외로워서 글을 썼고, 글을 꽤 잘 쓴다는 말에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하는 글쓰기가 좋았다. 그때 처음 쓴 단편 소설의 제목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다. 당시 학급 문예지를 만드는 게 유행이었는데 내가 싫어하는 언어 선생님이 내게 단편소설을 하나 써보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었다. 나는 부단히 위선적이고 악랄한 그 선생님의 인품을 꼬집는 글을 썼다. 사람을 등장시키는 건 좀 너무하단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정글에나 나올법한 동물들을 의인화하여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사는 약한 동물들을 정신적으로 이용하는 그 선생님의 감정을 인지화 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맹랑한 구석이 있었다. 10대의 나에게 글쓰기는 외로움을 덜어주는 기분 좋은 포장지였다.
한 자루의 펜과 너와 나의 가슴으로 (나의 20대 시절, 글쓰기)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나는, 고2 때 열렬한 첫사랑과 연애를 하느라 성적이 더 내려갔다. 그 시절 야간 자율학습이나 과외, 학원 등으로 바빠서 학교 밖에서 시간을 보낸 적도 거의 없는 남자 친구였지만 날라리 남자 친구에 속을 썩느라 온 정신이 뺏겼다. 나는 선택권이 없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그나마 조금 타고난 능력이라고는 약간의 글쓰기 능력뿐이었다. 수시전형으로 오로지 글쓰기로 단판 승부를 보는 대학에 응시하였고 258:1로 수시전형 산문 부문에 합격하였다. 그때 희대의 바람둥이였던 남자 친구 때문에 했던 속앓이를 일기장 열 권에 달하는 분량으로 써 내려가다 보니 글발이 올랐던 것도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맙네.)
그 후로 어느 종합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는데 선배들은 주구 장창 술을 먹였다. 술을 먹을 때마다 선배들의 선창에 맞춰서 구호를 외쳤다. (나는 그때도 그 구호가 너무나 민망스러워서 입만 벙긋댔었다) 선배들이 “한 자루의 펜과” 하면 후배들이 “너와 나의 가슴으로” 하고 쓰디쓴 소주를 원샷했다. 정말 촌스럽기 짝이 없는 구호였지만 20대 땐 정말 한 자루의 펜과 뜨거운 가슴에서 쏟아내는 말들을 써 내려가기 바빴던 것 같다. 어느덧 대학 4학년이 되어서 졸업하면 뭐 해 먹고살지?라는 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그냥 쓰고 싶은 글, 마음이 외치는 글을 썼다.
사실 내가 대학에서 쓴 글의 총량보다 이십 대 후반에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어서 꼬박 1년 반 동안 쓴 글의 양이 더 많다. 이십 대 후반에 나는, 살기 위해, 죽기 싫어서 글을 썼다. 파혼하고, 돈 잃고, 직장 잃고, 마음 너덜너덜해지고, 몸도 아프고. 뭐 어디다 나 가슴 아프다고 외쳐댈 때도 없어서 글로 풀었다. 솔직히 그때 우울증을 좀 심하게 앓고 있을 때라 종종 죽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해서,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순간의 잘못된 판단을 할까 봐,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온종일 소설만 쓴 적도 많았다. 문학 공모 마감을 핑계로 하루에 10시간에서 12시간씩 소설을 쓰고 퇴고를 하다 보면 구역감이 올라오고 하늘이 빙빙 돈다. 그럴 때면 지칠 때로 지쳐서 침대에 쓰러진 채 잠이 들곤 했다. 지금 그때 썼던 글들을 펼쳐보면 거의 빙의된 수준의 글처럼 감정이 진하다.
어쨌든 글쓰기에 미친 몰입감을 털어냈고 덕분에 나는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 이십 대의 나에게 글쓰기는 나를 살린 은인이다. 그렇게 신들린 듯 써 내려간 많은 글은 애초에 목표로 했던 신춘문예나 메이저 문예지에 응모하지 않았다. 이건 진짜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진심인데. 행여나 어디 한 군데 등단이 되면 그냥 그대로 죽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이룬 후, 그것을 유지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또한 나의 글쓰기가 형편없다는 것을 들키기 전에 나는 당선과 함께 먼지처럼 사라져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때라 그랬나 보다. 고로 이십 대의 나에게 글쓰기는 은인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나를 찾는 여정의 쏠쏠한 재미 (나의 30대 시절, 현재 진행형 글쓰기)
더는 작가에 대한 눈곱만큼의 열망을 갖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딱 6년이 다 되어갈 때쯤. 나는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다. 운 좋게 한 방에 됐다. 이번만큼은 주변에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브런치에 ‘ㅂ’ 도 꺼내지 않고 있다. 일부러는 아니고 절로 그렇게 되었다. 처음엔 브런치 측에서 내 글을 다음이나 카카오톡 메인에 많이 실어줘서 하루 조회 수가 5만이 넘어갈 때도 꽤 많았다. 조금 고무된 마음으로 들뜨려다가도 곧바로 차분해지면서 그저 덤덤하게 다음엔 무슨 글 쓰지?라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이젠 삼십 대 초반도 아닌 중반. 몇 년 전만 해도 서점에 가면 소설 섹션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치 전쟁에 나갔다가 처참하게 무너진 패잔병처럼 소설책이 가득한 쪽에 가까이만 가도 가슴이 쓰렸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에 덤덤하다. 간혹, 많지도 않은 브런치 구독자가 내가 새 글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구독 취소를 하는 날도 있었다. 3초 정도 뭐지? 싶다가도 바로 마음이 잔잔해진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미 난리가 났을 거다. 내 글쓰기에 어떤 문제라도 있는 걸까, 역시 내 글은 형편없다며 전전긍긍했을 거다.
그뿐이랴. 아마 출간이라는 목표에 다다르지 못할까 봐 온갖 걱정을 껴안으며 마음을 부르르 떨었을 게 분명하다. 지금의 나는 브런치 글이 다음 메인에 올라가 조회 수 5~7만을 찍어도, 구독자가 이탈해도. 그저 그렇구나, 할 뿐이다. 잔잔하게 글쓰기를 정진해나갈 방법이 무엇일까 고심하는데, 에너지를 쓴다. 삼십 대의 나에게 글쓰기는, 어두운 터널을 뚫고 펼쳐진 희망의 오솔길이다.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사유하고 글로 풀어내는 작업을 통해 조금씩 모든 면에서 진화해간다. 나는 다시는 십 대의 나처럼 글쓰기라는 소위 있어 보이는(?) 도취에 빠지지 않는다. 이십 대의 나처럼, 글쓰기를 감정의 부대낌을 해소하는 최선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그저 글쓰기를 통해 진짜의 나를 조금 더 탐색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다각적으로 둘러볼 뿐이다. 인생에 다정한 애정을 가지고 글을 쓴다.
글쎄. 간혹 '내가 글을 써도 되는 사람일까’ 의구심을 품는 글들을 브런치 내에서 읽게 되는데 나는 그 어떤 사람도 글을 쓰면 안 되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단지, 모든 이의 글쓰기의 여정은 다르기에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글쓰기 실력을 한탄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물론 이왕이면 나만 좋은 글보다는, 읽히는 글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중한 고민이야 필요하겠지만 자신의 글쓰기가 어떻게 무럭무럭 자라나는지 지켜봐 주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글쓰기 실력이 무르익는 때는 저마다 다를 테니깐 말이다. 어찌 됐든 삼십 대의 나에게 글쓰기는, 이제야 비로소 쏠쏠한 재미, 식지 않는 인생에 대한 애정과 나를 찾는 아름다운 여정이다. 브런치에 모든 작가님들이 자신의 글쓰기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나를 비롯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