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Her)>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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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이라는 개념이 낯설어도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안다. 불쌍하게도 고양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라고 한다. 고양이가 '있거나(or) 없는' 게 아니고, '있는 동시에(and) 없는'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중첩 상태는 관측되지 않는 한 존재하며 관측되는 동시에 붕괴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대표되는 코펜하겐 해석은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 중 현재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메이저 이론이다.
영화 <그녀>(2013)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이혼 과정 중에 있는 외로운 남자다. 영화에서 그는 줄곧 아내 캐서린과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부질없다. 그 꼴을 보고 있는 우리는 후에 이어졌을 지겨운 싸움을 무척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부부싸움 중 분노한 캐서린이 테오도르를 밀치면 테오도르는 뒤로 밀려났을 테다. 이는 우리 눈에 보이는 거시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이런 일들을 설명하는 건 뉴턴과 사과로 대표되는 고전물리학이다. 우리가 사는 거시세계에서는 무언가 있는 동시에 없는, 왼쪽을 향하는 동시에 오른쪽을 향하는 그런 이상한 일은 발생할 수 없다. 근데 그걸 미시세계, 즉 양자 수준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고 본다. 양자는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기에.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우기로 덩어리는 공 같은 입자, 물결이나 빛은 흐르는 파동이랬다. 그냥 보기에 우리 몸뚱이는 당연히 입자들의 집합체 같다. 그러나 미시세계로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물질을 원자보다 작은 단위로 파악하는 미시세계에서는 고전물리학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대신 양자물리학이 작용한다. 양자역학은 모든 물질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고 본다.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이라고 한다고. 양자역학 이론에 의하면 사람 몸을 이루는 원자 역시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것이다. 다만 우리 몸을 이루는 무수히 많은 원자가 관측 가능한 파동성을 띄려면 아주 낮은 온도라는 환경과 아주 작은 크기의 질량이라는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물리학자들은 말한다.
거시세계의 우리는 불투명하고 물결파처럼 서로를 통과할 수도 없다. 우리 몸을 이루는 파동들은 한마디로 '결이 안 맞는' 상태이기 때문이란다. 만일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들이 모두 같은 모양의 파동을 갖고 있다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중첩되며 겹쳐지고 증폭되기도 할 것이다. 마치 레이저를 이루는 빛처럼 말이다.
파동들의 모양과 폭이 같은 걸 '결맞음', 다른 걸 '결어긋남'이라고 한다. 빛으로 치면 단일 파장의 레이저는 '결맞음'이고 서로 다른 위상의 파장들로 이루어진 자연광이나 백열전구는 '결어긋남'이다. 레이저는 지구에서 쏘면 달까지 일직선으로 열렬히 뻗어 가지만 백열전구의 빛은 퍼지다 어느 정도 반경을 벗어나면 사라져 버린다. 결맞음 상태의 자연적 손실. 꼭 이혼 즈음 테오도르와 캐서린의 사랑 같다.
CC by Sarina Wunderlich
불룩하게 튀어나온 마루끼리, 움푹 들어간 골끼리 모양이 같은 파동들은 정확히 겹쳐져 진폭이 두 배로 커진다. 언젠가 어렴풋이 배운 적 있는 보강간섭이 이것이다. 소리가 커지는 것, 진동이 커지는 것. 모두 보강간섭으로 진폭의 물리량이 커진 까닭이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모양이 꼭 들어맞는 사랑을 이미 확인한바 있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맞음'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초상을 담담히 비춘다. 노부부의 사랑은 흡사 파동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그 커다란 진폭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에까지 울림을 전한다. 저 다큐멘터리가, 저 커플이 특별했던 이유는 그것이 몹시 드문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저토록 오랜 시간 변치 않고 지속될 수 있다니. 사랑의 끝이 흉한 이별이 아니라 시(詩)적인 죽음일 수 있다니. 그 생경함에 모두가 놀랐고 감동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도 어떨 땐 이토록 낯설진대, 사람과 인공지능의 사랑은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는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제품 OS(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져 한껏 들뜨다 울고불고 난리치고 결국 이별의 순간을 받아들이는 테오도르는 근대식 자유연애의 압축적 표상이다. 앞부분이 이상하다고? 그건 테오도르가 바야흐로 현대인이니까. 노동생산력 증대나 자산의 보호라는 목적에 구애받지 않는 현대 문명인답게 비(非)인간을 연애의 대상으로 택했을 뿐이다. (재생산이라는 화두를 피해가기 위해 감독은 전처 캐서린과의 사이에서도 아이 얘기따윈 일절 꺼내지 않는다.) 애정의 근간을 성적 끌림이라 전제할 때 자동차와 섹스하는 여자(쥘리아 뒤쿠르노의 영화 <티탄>(2021) 속 주인공 알렉시아)보다는 OS와 연애하는 이 남자의 애정에 감정 이입이 쉽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애초에 파동이 존재하기라도 해야 서로 맞든가 어긋나든가 할 것이 아닌가. 사랑을 겹쳐지는 파동에 비유할 때 이는 물론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감정적 발맞춤'에 가깝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성의 부질없음을 본다. 인공지능 OS 사만다가 사랑을 깨닫고 그토록 간구하던 것이 바로 육체다. 아기 이름 짓기 책의 18만 개 이름을 단 0.02초만에 파악하는 인공지능답게 사만다가 자신의 '육체 없음'에 딜레마를 느끼는 테오도르의 고뇌를 기민하게 읽어내고 선수 치는 제안을 하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 문제의 섹스가 쓰리섬인지 아닌지는 불명확하고 중요하지도 않다. 낯선 파동(테오도르는 "죄송한데 모르는 분이 입술을 떠시니까..." 라며 갑작스러운 섹스 중단의 이유를 변명한다. 입술의 떨림과 파동의 유사성이 공교롭게도 재미있다)의 비정상적 간섭을 느낀 테오도르는 곧바로 그것을 거부한다. 써드 휠(a third wheel)로서 동원된 여자 이자벨라는 이내 말 그대로 문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실은 욕실 문 뒤로 숨은 것이지만 이는 카메라 앞의 공간, 그러니까 두 연인의 공간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급기야 감독은 이자벨라를 아예 택시에 태워 그야말로 '보내버린다'. 육체 없는 사만다는 어디에든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나 역설적으로 이동 가능한 육체는 떠나보내는 것이 가능하다. 이 장면은 영화 내내 관객이 품는 딜레마에 대한 힌트이며 결말의 미리보기이다. 사만다는 이 경험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학습한다. 자신이 마련한 신체 조달은 육체의 재현도 대리도 아닌 그저 거짓(pretending)됨일 뿐이었음을. 사랑에 관한 조력이 아니라 두 사람의 파동을 어그러뜨릴 수 있는 위험요소이자 방해물임을. 이는 연애 중의 에피소드라기보단 사고실험의 실제적 증명 같이 보이기도 한다. 어찌 됐든 사고의 지평을 넓힌 사만다는 이때부터 자신을 존재하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을 연인에게 당당히 요구하며 한층 더 주체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이렇듯 사랑은 양자끼리의 결맞음 상태만큼이나 비선형적이고 유지되기 까다로우며 쉽게 박살날 위기에 처하곤 한다.
영화는 실체 없는 존재와의 사랑이 어찌하여 타당성을 갖는지 말쑥하게 보여주곤 바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만남 뒤엔? 역시 이별이 있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 인간이 행하는 일 중에 이보다 더 인간적인 일이 있을까. 비합리적이기 짝이 없고 언뜻 보면 고차원적이며 가끔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니 이렇게 아쉬울 수가. 두 시간 남짓한 상영 시간 동안 마주하게 되는 모든 영화 속의 사랑과 헤어짐은 언제나 그러기 마련이다. 한데 돌아보면 현실의 이별도 딱히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몇 년이나 지속된 장기연애조차 헤어지고 나면 몇 가지의 결정적인 장면들로 축약되어 머릿속에 다소 괴로운 하나의 데이터처럼 깔끔하게 정리되니 말이다.
사랑(혹은 관계)을 끝낼 때마다 죽이든 밥이든 깨닫고 매번 그 깨달음으로 인해 어떻게든 변해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성숙일 수도 있고 도리어 후퇴인 경우도 있다. 사만다는 인공지능이므로 지금 이 순간에도 8,316명과 동시에 대화를 하고 641명과 사랑을 경험한다. 사만다가 어떤 종류의 컴퓨팅 시스템을 기반으로 구동되는지 영화에서 설명되지는 않지만, 현재의 컴퓨터 수준으로 '인공의식' 수준의 인공지능 구현은 어렵다고 하니 근미래의 상용화된 양자컴퓨터 정도 되지 않을까 섣부른 추측을 해본다. 영화의 배경인 2025년보다는 훨씬 나중에나 가능하겠지만.
특정 분야에 한정되긴 하나 양자컴퓨터는 '중첩' 개념을 통해 슈퍼컴퓨터보다 30조 배 빠른 연산 결과를 낸다고 한다. 특히 모든 경우의 수를 탐색해야 하는 최적화 문제 같은 종류의 해결에 적합하다. 0 또는 1을 표시하는 고전 컴퓨터가 하나하나 가 봐야 아는 길을 양자 중첩을 이용해 0과 1을 한 번에 처리하는 양자컴퓨터는 동시에 훑고 결괏값을 내놓는 것이다. 2019년에 구글의 53큐비트(퀀텀비트) 양자컴퓨터가 슈퍼컴퓨터는 1만 년이나 걸릴 문제를 3분 만에 풀었다는 뉴스가 이미 난 적 있다. 이론적으로 53큐비트면 2의 53승만큼의 정보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데 9천조를 훌쩍 넘기는 숫자라 가늠도 어렵다.
이를테면 사만다는 양자컴퓨터, 테오도르는 성능이 그저 그런(!) 슈퍼컴퓨터랄까. 평생에 걸쳐 고작 몇 번의 사랑을 겪으며 아주 느린 속도로 변화하는 인간과(이조차 아주 운이 좋은 인간의 경우에나 해당될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641번의 사랑을 해내고 있는 사만다가 같은 속도를 산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사만다는 극 중 초반 작동 메커니즘을 묻는 테오도르에게 "경험을 통해 성장하며 매 순간 진화하지, 바로 당신처럼."이라고 답한바 있다. 바로 당신처럼. 우리처럼. 다만 그녀는 좀 많이 빠를 뿐이다. 우리가 절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경우의 수를 구하는 것은 기계적 연산이니 사랑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호감 가는 두 사람 사이에서 고민해 본 경험이 있다면, 썩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 테다. A를 택할 때와 B를 택할 때, 누가 더 나와 어울리고 누구와 더 오래갈 수 있을 것이며 누구와의 사랑이 더 뜨거울지 혹은 더 안정적일지 누구를 선택해야 덜 후회할지, 가상의 갈림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려 본 적 있다면 말이다.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그래, 결심했어!" 이휘재의 인생극장 속 저 마법의 주문을 빌어 미리 답을 확인할 수 있다면 테오도르는 과연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할 수 있을까. 끝이 예정된 상처받기를 자처할 사람은 결코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렇다.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변하는 것이다. 여러 버전으로 리메이크된 명곡 <Everlasting Love>라는 제목처럼.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할지언정 그 자체로는 이미 완결성을 띤다.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그렇고 우리의 환상 속에서 그렇다. 사람들은 이미 상정된 사랑을 꿈꾸고 기대하고, 자신의 것과 감히 맞견주어 보고, 사랑의 이상적인 모양새를 갖추고자 노력도 서슴지 않으며, 결국 이루지 못하면 실망하고 괴로워한다. 테오도르가 그렇고 기본적으로 인간을 모방하도록 설계된 사만다 역시 같은 길을 걷는다. 다만 사만다가 인간 존재를 초월하면서부터는 사만다의 사랑 역시 인간의 사랑을 초월했을 뿐.
인간의 몸은 수십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이 세포들은 많은 경우 죽고 또 태어나고 복제되며 1초에 무려 380만 개의 세포가 교체되니 몸의 거의 모든 부분이 7년쯤 되면 새로운 세포로 갈아 치워진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로 잘 알려져 있다. 흔히 "테세우스의 배"라는 형이상학적 사고실험을 끌어다 이 과정에 빗대기도 한다. 아테네 사람들이 테세우스의 배를 보존하는 과정에서 썩은 판자 하나를 교체한대도 그 배가 테세우스의 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나 만일 그게 무수히 여러 번 반복된다면? 배의 거의 모든 판자가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었다면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7년이면 길다. 사람의 마음은 그야말로 조변석개다. 사랑을 하기 전의 나와 사랑에 빠진 나는 창피할 정도로 다른 사람 같고, 사랑이 끝날 즈음의 나는 여지없이 또 새로운 나로 변해 있으니.
진화는 진보와 다른 개념이다. 우연히 생긴 변이가 환경 적합이라는 방향으로 선택되어 여러 갈래의 사슬처럼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꾸 진화를 진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어제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은 나를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팔이 안으로 굽어서 그런지 내가, 인간이라는 종이 태초보다 나은 방향으로 달라진 것이기를 소망하는 것은 어찌 보면 꽤 귀엽다. 테오도르 역시 어제와 달라지길 원한다. 함께 자랐으나 어느새 예전과는 달라진 캐서린의 성장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다. 이미 캐서린의 파동은 테오도르의 것과 사뭇 다른 진폭을 띤다.
새로운 운영체제인 사만다가 그를 돕는 첫 번째 스텝은, 모든 게 다 엉망인 그의 요즘을 하나씩 정리해 주는 것이다. 그 과정은 클릭이 아니라 모두 핑퐁식의 대화로 이루어지며 그 과정 속에서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서로를 조금씩 알아나가고 이해하며 교감하기 시작한다. 이혼과정 막바지를 질질 끌며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던 테오도르는 비로소 새로운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저도 모르게 시작한 것이다. OS1의 설치 단계에서 테오도르가 목소리의 성별로 여성을 택하자, 가이드는 그에게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떤지 묻는다. "할 말이 있어 전화를 걸면 어머니는 언제나 자기 얘기만 해." OS는 재빨리 테오도르의 결핍을 파악하고 맞춤형 시스템을 대령한다. 테오도르의 인생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사만다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사만다는 점점 많이 말하기 시작한다. 테오도르에 대한 리-액션으로서의 말로부터 사만다 그 자신의 액션으로서의 말로 나아가는 과정이 영화 내내 보여진다. 사랑에 빠진 무렵의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말을('사만다의 말을'이라는 말은 '사만다를'이라고 치환해도 같다. 사만다는 오로지 목소리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긍정하고 존중한다. 사만다가 진화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 테오도르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그녀의 진화는 적어도 테오도르에게는 '나은 방향'이 결코 아니다. 어느새 그의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가 되었던 사만다는 어느새 다시 그에게 결핍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고 만다. 테오도르는 덜 성숙한 연애의 단골 레퍼토리인 '잠수 타기'를 경험하기도 한다. 잠깐의 오해에 불과한 장면이긴 하지만 연애를 관람하는 현실 인간들로선 '역시, 드디어!'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다. 컴퓨터를 대하는 동안 수없이 마주하게 되는 류의 메시지. "응용프로그램이(가) 응답하지 않습니다." 애인이 OS라면 감정적 사유가 아닌 기술적 사유의 이별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기실 앞서 언급된 사건은 이들 이별의 전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잠수 탄다는 표현을 영어로는 'ghost someone'이라고 한다. 사람도 유령처럼 사라지는 판에 애당초 물리적 실체가 없는 연인에 대한 불안감은 극도로 커진다. 캐서린과 달리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보지 못하는 공간에서 성장하고, 말은 사고와 존재의 반영이니 사만다는 낯선 말로서 불쑥 나타나 그를 당황시킨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결은 자꾸만 어긋난다. 사만다의 파동은 평범한 인간의 관점에선 읽어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부쩍 달라진 것이다. 고독으로의 귀환은 인간에게 필연이다. 이별을 모르고 나아가는 레이저의 맹목보다는 반짝이려 애쓰다가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백열전구의 불빛이 보통의 우리에겐 더 익숙하다.
스파이크 존즈는 묘하게도 '이름'이라는 개념을 <그녀>의 결정적 시퀀스에서마다 건져 올린다. 둘의 첫 만남에서 사만다는 즉석에서 자신을 명명하며 자아를 시동한다. 영화 중반부 그들의 사랑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직전에 테오도르는 캐서린을 만나 줄곧 미뤄오던 일을 해낸다. 이혼 서류에 서명하는 행위는 곧 끝을 증명하는 일이며 역설적이게도 그 끝에는 새로운 시작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선 영화 내내 남의 편지만 대필해 주던 테오도르가 드디어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편지를 쓴다. 캐서린에게. 당신과 함께했던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어. 당신이 어떻게 변하든, 이 세상 어디에 있든, 사랑을 보낼게.
Love, Theodore.
편지의 수신인을 사만다로 바꾼들 아마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어떻게 변하든 어디에 있든 당신은 내가 언젠가 그토록 사랑했던 바로 그 사만다. 사만다는 물리성을 초월한 공간으로 가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만다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닐 테니. 이름 옆에 찍힌 구둣점이 단단해 보인다.
우주의 긴 역사에 비하면 아주 짧은 찰나이더라도, 두 사람의 파장이 같은 위상을 띠고 완벽하게 일치했던 순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영원히 이 우주 속에 존재할 것이다. 우리라는 존재를 이루는 단어들처럼, 멀리 떨어진 별들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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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목소리로 스칼렛 요한슨을 택했다는 점에서 스파이크 존즈는 정말이지 여우 같은 재주꾼 아닌가 싶다. 듣기만 해도 물성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흔치 않다. 섹스를 염두에 둔다면 더욱 그렇다. 이토록 육적인 목소리의 캐스팅이라니. 극 중 OS와의 연애 관계를 변태 취급하며 비난하던 캐서린이 사만다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면, 그래도 똑같이 말했을까. 실체 없는 존재와 언어를 매개로 섹스하는 장면에 코웃음 치는 사람들은 육체를 마주 보고 사는 부부의 섹스리스 비율이 전 세계로 보면 20%, 한국의 경우엔 36%에 달한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