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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의 겨울과 아디

by 허블

죽음조차 어딘가에 묶여있는 흐름이라는 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참호 속에서 순무의 겨울을 보내며 느낀 것이다.



때때로 보급품이 올라올 때면 우리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순무 빵보다도

술이며 담배를 아귀다툼하느라 눈을 번뜩였다. 한 사람만 빼고,



그를 처음 눈치챈 건 위문차 전선에 들른 황제가 병사들에게 훈장을 전달했을 때였다.

오랜 참호전에 지친 우리들은 그것을 받는 둥 마는 둥 하였으며

누군가는 바닥에 집어 던지기까지 했지만

그만은 아주 자랑스럽게 훈장을 받아들었고,

가슴팍에서 떼는 일이 일절 없었다.



술, 담배도, 음담패설도 전쟁이 끝났으면 하는 바람도 그와는 먼 곳에 있었다.

조국의 앞날을 진지하게 걱정한다거나, 책을 읽거나,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

참호에서 본 그의 모습이었다.



우리들은 그런 그가 지나치게 진지하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싫지 않았다.



그는 상관이 내리는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고, 공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으며

부상으로 실려갔을 때도 재빨리 퇴원해 본인의 자리를 채웠다.

병상에서 그렸다는 그의 그림에는 독일의 건축물과 디즈니 캐릭터가

아름답고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언젠가 그가 슬퍼하는 것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아끼던 떠돌이 개 '폭슬'이 사라졌을 때다.



그의 별명은 '아디(Adi)' 예술가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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