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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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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Mar 12. 2017

#3. 남쪽을 향해 달리는 차 (11)

2014.09.11.~09.12. 나미비아

 “영차.”

 오랜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카멜레온 백패커스의 창고에서 배낭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에 접한 배낭의 무게에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적응되었다.

 타카코 누나와 유키 형은 아저씨와 아주머니, 나를 카멜레온 백패커스에 내려주고 차를 반납하러 간 참이었다. 숙소에서는 신분증을 확인하고 본래 내일인 12일까지 맡기로 했던 짐을 먼저 건네주었다.

 숙소에서는 뜻밖의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스바코프문트의 사막 하늘 백패커스에서 마주쳤던 한국인 여자분이 있었는데, 숙소에서 묵고 있다가 우리 일행을 보자 반겨준 것이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이전에도 아프리카의 다른 곳에서 그 여자분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반기는 정도가 남달랐다.

 오늘의 잠자리는 카멜레온 백패커스의 야영장에 텐트를 치는 것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야영장을 이용하는 비용은 1인당 100 나미비아 달러, 물론 자신의 텐트는 필수였다. 정확히 일주일 전, 렌터카 여행을 시작하기 전날인 9월 4일 목요일에 구입한 120 나미비아 달러짜리 텐트는 생각보다 상당한 값어치를 하고 있었다.

 야영장에 아저씨 아주머니 부부와 나의 텐트를 각자 설치하고 함께 쇼핑을 하러 나왔다. 아무래도 한국의 기숙사 근처에 있던 홈플러스보다 아프리카의 픽앤페이를 가는 빈도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은 건 착각인가. 아무튼 픽앤페이에서는 이틀간 일용할 양식인 카레, 양파, 감자, 고기와 즉석 치킨 같은 주전부리 그리고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라면까지 챙긴 뒤, 픽앤페이 오른쪽에 위치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500원짜리 소프트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 먹으며 쇼핑몰을 벗어났다.


 “와, 이건 치킨에 대한 모욕이야.”

 태어나서 이렇게 맛없는 치킨은 처음 먹어보았다. 도대체 치킨에 무슨 짓을 하면 이렇게 맛이 없을 수가 있을까. 잠시 치킨의 본질에 대한 중차대한 고뇌에 빠지는 시간을 가졌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 본점을 두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케이프타운에 본점을 둔 숍라이트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아프리카 대형마트 픽앤페이의 즉석 치킨은 말 그대로 어마어마하게 맛이 없었다.

 그 무궁한 퍽퍽함에 경의를 표하며, 닭 조각 하나를 씹어 넘기고는 입을 열었다.

 “한국 나온 지는 얼마나 된 거예요?”

 예의 여자분은 학생이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실내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나이는 나와 같았다.

 “한 반년쯤 됐네요. 벌써.”

 “비용은 한국에서 마련해서 오신 거예요?”

 “네,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서 돈을 모았죠. 이제 벌써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니까 너무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졸업 전에 이렇게 여행을 해보고 싶었어요.”

 “집에서 걱정도 꽤 했겠는데요?”

 “네, 그래도 별 수 있나요. 부모님께 죄송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인생에서 한 번 밖에 없을 기회니까요.”

 그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곧 타카코 누나와 유키 형이 들어왔다. 우리 일행은 마지막으로 다시 모여 최종 비용인 렌터카 세차비를 계산했다. 이로 인해 다섯 일행의 렌터카 여행에 대한 모든 정산이 끝났다. 왠지 기분이 헛헛하다. 아무래도 이따가 맥주를 마셔야겠다.


 함께 장을 봐 온 카레를 먹는 대신 타카코 누나, 유키 형과 함께 카멜레온 백패커스를 나섰다. 모레부터 떠날 사막 여행에 대비하여 내일 빌리러 갈 렌터카를 유키 형과 함께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카드보드 백패커스로 가는 길에 타카코 누나는 장을 보러 따로 떠나가고, 유키 형과 숙소의 로비에 앉아 와이파이로 차를 검색했다.

 “뭐 나오는 거 있나요?”

 “글쎄. 차가 잘 안 나오는데? 매진인 것 같기도 하고, 있는 것들은 왠지 크고 비싸고.”

 우리는 둘 밖에 없었으므로 큰 차는 필요 없었다. 그냥 가장 아담하고 가장 저렴한 녀석이 필요했다.

 “피곤한데 그냥 내일 발품 팔면서 찾을까?”

 “그러죠, 뭐. 설마 없을까.”

 타카코 누나는 돌아오자마자 간장 베이스로 맛을 낸 파스타와 토마토 파스타, 그리고 샐러드를 뚝딱 만들어 왔다. 수영장이 보이는 외부에 앉아, 한 병에 18 나미비아 달러인 맥주를 사다 마시면서 수다를 떨었다. 보통은 유키 형이나 내가 첫마디를 꺼내고 타카코 누나도 대화에 합류하는 식이었다.

 “한국에서는 학창 시절에 학교 끝나고, 혹은 주말에 뭐 하고 놀아?”

 “뭐 여러 가지 있죠. 친구들끼리 축구나 야구 같은 운동도 하고, 당구 치러 가기도 하고. 그래도 가장 인기 있는 건 쇼핑, 노래방, 그리고 PC방 아닐까요?”

 “PC방?”

 “인터넷 카페요. 한국의 학창 시절은 게임 빼면 시체죠. 아, 일본에서 유행하는 콘솔 게임이랑 달라요. 한국에서도 콘솔 게임을 하는 사람은 꽤나 많지만 한국 게임의 주류는 온라인 게임이죠.”

 “오, 그래? 일본에서는 온라인 게임하는 사람은 꽤 드문 편인데. 별로 인기도 많이 없고.”

 “한국에서의 온라인 게임은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해 있어요. 이-스포츠라고 부르는 장르죠.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이나 계정을 팔아서 돈을 버는 사람도 굉장히 많이 존재하고, 대결 형태의 게임의 경우에는 프로게이머 선수들이 활약하며 일부는 억대 연봉을 챙기기도 해요. 이-스포츠 경기장에 가서 관람하면 선수들이 앉아 있고 관중들이 큰 화면으로 게임을 지켜보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신기하다. 그러면 선수들도 있고, 일반 학생들도 많이 즐기는 거야?”

 “물론이죠. 초, 중, 고등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에서도 인기가 엄청나요. 대학에서 체육대회 하잖아요. 몇몇 대학에서는 그때 야구, 축구, 줄다리기처럼 게임도 종목에 들어 있어요. 예전에는 스타크래프트였는데 요즘에는 리그오브레전드가 대세죠.”

 “그건 좀 재미있다. 체육대회에서 온라인 게임이라니.”

 “하물며 이런 농담도 있었는걸요. 일반적인 한국 학생한테 키가 나보다 작달지, 공부를 나보다 못한달지, 하는 걸로 놀리면 그냥 넘어가지만 ‘게임도 못 하는 게’라고 하면 발끈한다고. 그 정도로 게임에 대한 자존심이 꽤 강해요.”

 “여자도 그렇게 게임을 많이 해?”

 “보통은 남자들이 더 하지만 요즘은 여자들도 꽤 많이 하는 편이에요. 뭐 물론 남자든 여자든 손도 안 대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요. 어쨌든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두루두루 게임을 사랑하는 나라죠.”

 “일본에서는 아직 게임이라고 하면 혼자서 혹은 가족끼리 즐기는 느낌인 것 같은데. 우리는 학생이 아니어서 요즘 트렌드는 모르겠지만. 들어보니 꽤 흥미로웠어.”

 다음으로는 군중심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특히나 한일 간의 체육대회 등에서 한국인들이 다 함께 큰 소리로 애국가를 부른 달지 아리랑을 부르는 등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그에 대해서는 물론 장단점이 있겠지만 그들은 대체적으로 조금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모든 사람에게는 개인의 성향이 존재하며 어떠한 틀로 개인을 규정할 수는 없겠으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생성되는 국민성이나 집단의 성격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사회에서 자라온 사람들끼리 서로를 부러워하거나 혹은 조금 다른 관점으로 서로의 모습을 보며,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수다는 밤 10시까지 이어졌다. 이미 눈앞의 맥주병에 적힌 글씨도 잘 안 보일만큼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다.

 “너무 늦었네요. 이제 가봐야겠어요.”

 “내일은 언제 어디에서 볼까?”

 “아침 9시에 픽앤페이 앞에서 어때요?”

 “알겠어. 잘 쉬어.”

 “편안한 밤 보내세요.”

 내일 함께 돌아다니며 렌터카를 알아봐야 할 유키 형과 약속을 잡고 카드보드 백패커스를 벗어났다.

 카드보드 백패커스에서 픽앤페이 방향으로 향하는 길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이, 안녕? 잘 지내?”

 슬쩍 뒤를 보니 다섯 명의 흑인들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나이는 이십 대 초반에서 삼십 대 초반 사이로 보였으며, 입 꼬리를 추켜올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잘 지내냐니까?”

 그들은 건들거리며 점차 주변을 에워쌌다. 한 명은 바로 옆까지 다가와 각종 필수품을 넣은 채 항상 매고 다니는 크로스백을 툭 건드렸다. 이미 카드보드 백패커스는 저 멀리로 멀어졌고, 밤 10시 10분이 지나가는 빈트후크의 거리에는 지나가는 자동차조차 거의 없었다.

 드문드문 설치된 가로등에서 나오는 빛이 그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나의 그림자는 그들의 그림자에 파묻혀갔다.

 미치겠군.

 걸음을 조금 빨리하다가 길가에 놓인 돌멩이 하나를 발로 찼다. 돌멩이는 휙 날아가더니 도보 옆의 수풀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것을 신호로 그들이 갑자기 달리는 자세를 취했다.

 망할.

 크로스백을 품에 안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나의 그림자가 그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형태를 갖췄다. 이윽고 그들의 그림자도 달리기 시작했다. 장소가 픽앤페이 옆의 큰 사거리로 옮겨지자 이윽고 그들의 그림자와 나의 그림자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

 깜빡대는 신호등과 철창을 내린 상가들 사이로 긴장한 숨소리가 퍼졌다. 돌아보니 그들은 다시 천천히 걸으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무어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웃음소리도 간간히 들렸다. 이내 그들은 다른 갈림길로 사라져 갔다. 아마 작정하고 쫒았더라면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장난 삼아 동양인 하나를 상대로 놀려본 것일 수도 있었다. 안도감과 긴장감이 동시에 가슴을 강타했다.

 큰일 날 뻔했다.

 오늘은 별 일 없이 끝났지만 언제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른다. 케이프타운에 처음 도착한 8월 27일 밤에도 늦게 혼자 돌아다니며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런 실수를 반복하고 말았다.

 픽앤페이에서 카멜레온 백패커스까지는 큰 길이 놓여있다. 하지만 마치 세상 모든 사람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제발 아무도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주변을 경계한 채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여기 맞아?”

 “아저씨가 이 부근이라고 했는데, 이상하네요.”

 유키 형과 만난 뒤 카멜레온 백패커스 부근의 주택가를 전전하며 렌터카 회사 ‘유로카’의 사무실을 찾고 있었다. 아저씨가 이 근처라고 알려준 것을 기억하여 인근을 뒤지고 있었으나 도무지 렌터카 회사는 보일 기미가 없었다.

 “이러다가 오전 다 가겠는데요? 일단 카멜레온 돌아가서 물어볼까요?”

 카멜레온 백패커스로 돌아오니 아저씨는 이미 어디론가 외출했다고 하고, 계산대에 가서 직원에게 유로카의 위치에 대해 물으니 이곳에서도 렌터카 빌려주는 일을 한다면서 우리를 그 사무실로 안내했다.

 카멜레온 백패커스의 렌터카 사무실은 어제 잤던 야영장보다 좀 더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크지 않은 백패커스엔 도무지 없는 게 없었다. 여행자에게 참 적합한 숙소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렌터카 사무실에 앉아있던 직원은 우리에게 스프링 제본된 얇은 안내 책자를 내밀며 물었다.

 “이번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내일부터 3일 동안 차를 빌리려고 하는데요.”

 오늘은 9월 12일 금요일, 내일부터 당장 여행을 시작하여 월요일에 돌아온 뒤 화요일에는 다시 길을 떠날 생각이었다.

 직원은 우리에게 책자를 펼쳐 보이며 설명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빌리실 수 있는 차종이고요. 여기 수동인지 자동인지, 연비나 성능은 어떤지, 짐은 얼마나 실을 수 있는지 적혀 있어요.”

 “가격은 어떻게 되나요?”

 그녀는 책자 뒷부분의 다른 쪽을 펼쳐 보였다. 그곳에는 차량 모델명과 24시간 단위로 나눠진 표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를 보시면 차량과 시간대에 해당하는 가격을 보실 수 있어요.”

 “여기, 이걸로 부탁드릴게요.”

 우리의 일정에 맞는 가장 저렴한 녀석을 골랐다. 흥미롭게도 수동과 자동의 가격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으로 요청했다.

 “잠시 만요. 지금 있는지 알아볼게요.”

 이 사무실은 렌터카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 다른 렌터카 업체와 연결해주는 곳이었다. 그녀는 곧 연계 회사인 ‘버젯’과 ‘아비스’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지금 두 곳 모두 차가 없다고 하네요.”

 “수동이나 조금 더 큰 차라도 어떻게 안 될까요?”

 “네, 물어봤는데 이번 주말에는 차가 이미 모두 나갔나 봐요. 정말 미안합니다.”

 유키 형과 나는 서로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생각보다 긴 하루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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